온전하게 노을을 본 저녁, 그거면 됐다
2024년 12월 31일의 기록.
11월 말에 자격증 실기 시험도 무사히 치르고 12월 중순에 결과까지 받았다. 이제 구직활동을 해야 하는데 이게 얼마나 길어질지 몰라 그동안 짧게라도 일하기로 했다. 그래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구했는데 하필 근무기간이 12월 말에서 1월 초에 딱 걸쳐 있었다.
여태 항상 연말에 쉬기는커녕 그때가 1년 중 제일 중요할 때라 야근은 기본이고 심지어 디폴트로 주말출근까지 했었다. 그래서 올해는 그 지긋지긋한 회계일을 그만뒀으니까 최소한 출근은 안 하겠구나 했는데 정규직이건 알바건 똑같이 출근을 하고 앉았다. 이것도 운명이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올해의 마지막 날도 출근.
어제도 컴퓨터가 안 돼가지고 거의 아무것도 못 했다. 심지어 오늘도 계정 로그인이 안 돼서 계속 기다렸다. 그 시간 동안 혹시 몰라 가져간 책을 야무지게 읽었다.
결국 오전 내내 계정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전에 핸드폰도 하고 책도 읽고 블로그 포스팅거리도 쓰고 부동산 검색도 하면서 나름 알차게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됐다. 카페테리아에서 밥 먹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았는데 잘 안 들려가지고 끊으니 전화가 다시 왔다. 내가 다시 걸려고 했는데 관리자다. 오늘 내로 계정문제가 해결이 안 될 거 같다면서 오늘 근무는 13시까지로 칠 테니까 이만 퇴근하란다. 이럴 거면 오늘 출근은 왜 한 거지?
그래도 오늘은 12월 31일.
12월의 마지막날이기도 하고 2024년의 마지막날이기도 한데 그들이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날만큼은 곱게 일찍 들여보내주네. 정규직과 다르게 이 일은 시간제로 월급을 받는 아르바이트다. 결국 오후 근무를 안 했으니 사측도 그만큼 비용 지불을 안 하고 내 시급은 까이겠지만 나는 행복하다. 오늘은 오전 내내 아무 일도 안 하고 점심만 잘 먹고 짐 챙겨서 나왔다.
원래 오늘 빌릴 책이 있어가지고 좀 멀리 있는 도서관에 갔어야 했는데 낮에 근무가 끝나니 해가 떠있을 때 가게 되었다. 눈누난나. 가서 책도 잘 빌리고 도서관도 한번 쓱 둘러보고 와야지. 이 도서관에 갈 때마다 매번 이곳을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동네 집값은 무지막지해서 평생 못 이룰 꿈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따 저녁때 혼자라도 올 한 해를 함께 마무리하고자 작은 케이크 한 조각을 사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올해의 나.
변화를 추구한다고 약간은 아니 조금 많이 무모하지만 잘 다니던 회사를 퇴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면서 한 해 동안 외국 나가는 비행기를 이렇게 많이 탄 것도 처음이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거 같고 체류기간으로만 따져도 그렇다.
오키나와(1월) : 3일
+ 미국(2월) : 8일
+ 유럽 (4~6월) : 60일
+ 미국(9월) : 8일
+ 도쿄(10월) : 10일
+ 나고야(12월) :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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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90일이다 (ㅋㅋㅋ)
계획했던 대로 관광통역안내사(줄여서 관통사) 자격증을 따긴 했지만 취직이 요원하다. 이게 좀 아니, 가장 큰 문제다. 내가 생각한 방향과는 조금 달라지려고 하고 있다.
일단 에어비앤비 체험 호스트 선정이 되면 그걸 잘 굴려보려고 하는데 국내외 정세가 좋지 않다. 물론 아-주 장기적으로 본다면 이런 건 하나의 작은 틈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도 단기적으로는 안 좋은 추세가 이어질 수 있겠다. 코로나도 끝나고 한창 흐름 좋았는데 말이야. 대통령 탄핵정국에다 연말에 큰 비행기 사고까지.
나도 이번 달 12월 초에 나고야 갈 때 제주항공 비행기를 타고 다녀왔기 때문에 더 소름 돋았다. 게다가 올 한 해 비행기를 그렇게 많이 탔는데 무사한 걸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안전이 제일이다. 사고 한번 나면 그동안 잘했던 건 아무 소용없다. 안전에 관해선 돈이 들더라도 예외를 두면 안 된다. 사람들이 그걸 왜 모를까. 이익을 내야 하는 곳이 있고 아닌 게 있는데. 갑자기 세상을 뜬 그분들과 그 주변 분들의 심정을 헤아릴 길이 없다.
아무튼 내, 외부적으로 여차저차 걱정이긴 하지만 일단 이거 저거 시도는 해보려고 한다. 내년은 그래서 시도하는 해가 될 거 같다. 그렇게 하면서 자리 잡아가야지. 그렇게 흘러가야지. 너무 강하기만 하면 부러진다니까.
아참, 이렇게 직업이 없이 쉴 때 해 지는 시간에 밖에 나가서 노을을 많이 많이 봐야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7,8월은 너무 덥기도 했고 해가 떨어질 시간에 수영을 다녔다. 9월부터는 수영을 오전으로 옮겨서 시간도 됐는데 왜 안 봤지? 그러다 보니 어느새 12월이 되었고 심지어 올해 마지막날이 되어 버렸다.
웃프다, 웃퍼. 오히려 집에 있었는데도 노을 하나 제대로 시간 내서 볼 수 없다니. 그렇다면 역시 집에서 노을이 보이는 곳으로 이사를 가야겠어. 기승전-이사. 요즘은 내년에 어디로 이사 갈지 집보느라 꽂혔다.
그래서 밖으로 나왔다. 오늘의 노을을 보기 위해서 그리고 기록하기 위해서. 적어도, 2024년의 마지막날 그 하루의 노을이라도 온전히 봤잖아? 그러면 되는 거잖아? 오늘부터 읽기 시작한 책도 2024년 독서목록에 넣는 것처럼.
너무 미리부터 나와 있으면 일몰까지 오래 기다려야 하니까 꼼수를 써서 일몰시각 십분 전쯤 시간을 맞춰서 나왔다. 그랬더니 여기가 수평선이 보이는 데는 아니라 이미 해는 저 아파트 선 너머로 꼴깍 넘어가서 그 나머지 잔여 빛만 하늘을 덮고 있다. 그래, 보이진 않지만 저 너머에 해가 분명 있다고. 그렇게 해가 완전히 지기까지를 기다린다.
사위가 점점 어두워진다. 이 시간은 참 아름답다. 공식적인 일몰 시간은 지났다. 지평선이나 수평선? 같이 해가 보이는 곳이라면 일몰 때 해가 그 선으로 꼴까닥 넘어가는 모습이 되게 신기하고 재밌고 그 뒤로 이어지는 그다음 풍경도 보기 좋다.
일몰 = 해가 넘어가는 시간
일몰시각 다음의 시간의 하늘이 너무너무 예쁘다. 보통은 퇴근하고 돌아오면서 아주 가끔씩 겨우 봤던 하늘이다. 해가 지고 난 뒤와 어둠이 찾아오기까지의 그 약 30분 정도의 시간. 우리가 매직아워라고 부르는 그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도 부른다는, 이내의 시간이라고도 부른다는 그 시간. 말하고 보니 이 시간을 지칭하는 표현이 참 다양하다.
아름답다.
그동안의 12월 31일은 정시 퇴근은커녕 항상 ‘오늘은 야근해야겠네? 그래도 제야의 종 치기 전에 집에는 가야지’하며 저녁식사 하러 나왔다가 겨우겨우 해 떨어지는 것도 볼까 말까였었다.
그러니 조금 춥기는 해도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이렇게 해가 지는 광경을 가만히 서서 볼 30분이라는 여유가 나에게 있을 줄이야. 그거면 된 거 아닐까. 올해 생각했던 것만큼 노을 지는 하늘을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12월 31일에라도 봤으니까 그럼 된 거 아니겠어? 그렇게 생각한다.
완전하게 검은색으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기까지는 일몰시각 후 1시간 정도 걸린다. 그래서 그거까지 보고 싶었지만 발도 시리고 생각보다 추웠다. 집 앞이라 별다른 대비도 하지 않고 나와서 그런가. 그래서 일몰시각 이후로 한 30분 정도 하늘을 지켜보다가 들어왔다.
나는 2024년 12월 31일의 노을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