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1월의 어느 날, 추운 날 밖에 안 나가기

추운 겨울날,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걸 선택할 수 있는 나는 행운아

by 세니seny

2025년 1월 초의 일기입니다.


올 겨울은 그래도 안 추운 편이지만 그래도 겨울이니까 추운 날이 한 번은 오기 마련인데 그게 바로 내일이다. 바로 목요일.


원래 별일 없으면 항상 목요일 오전에 악기연습실에 갔다. 그런데 이번 주는 날이 조금 풀리는 토요일로 미뤘다. 악기연습실에 가는 건 나와의 약속이라 꼭 목요일에 안 가도 된다. 토요일에 가도 1주일에 한 번만 가면 된다.


회사를 다니던 때는 대체로 그것이 뭐가 됐든 출근을 해야 한다. 폭우가 쏟아지던 폭설이 내리던, 지하철이 파업을 하건 버스가 파업을 하건. 내가 속이 메슥거리고 울렁거린 탓에 하루 종일 죽만 먹고 기운이 없건 간에. 이유도 모른 채 갑자기 두통이 와도 그러거나 말거나 회사를 가야 한다. 이 모든 병의 원인은 아마도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다.


<야무진 고양이는 오늘도 우울>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이 있는데 직장인 공감 힐링물이다. 주인공은 도쿄 시내의 높은 빌딩에서 일하는 사무직 직원인 후쿠자와 사쿠로, 일본에서는 흔히 사무직 여직원을 칭하는 OL(Office Lady의 준말)이다. 고향을 떠나 블랙기업에 취직해 야근과 격무에 시달리던 사쿠.


어느 날 퇴근길에 집 앞 공원에서 버려진 듯한 검은 고양이 한마디를 발견하게 되고 마치 자신의 처지 같은 마음에 이 고양이를 키우기로 한다. 이 고양이의 이름은 유키치인데 이 작은 고양이가 필요에 의해 거대화되면서 마치 사람처럼 집안일을 도맡아 하게 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이 이야기가 직장인 공감 힐링물이냐고?

거대묘 유키치는 사쿠가 직장생활을 잘해나갈 수 있도록 도시락 준비는 물론이요 모든 집안일에 통달되어 있다. 청소, 세탁, 빨래 및 장보기까지도. 나도 혼자 살게 되면서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집안 살림 건사하는 것도 큰 일이다. 그래서 공감을 하면서도 그런 상황들이 웃기고도 짠했다.


한 명의 직장인이 회사에 나가 제대로 일을 하려면 가정을 받쳐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일반적인 가정에서는 그 역할이 ‘엄마=가정주부’로 되어 있는데 그게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그나마 주부 업무가 적성에라도 맞으면 다행인데 엄마라고 해서 모든 엄마가 주부 업무가 적성에 맞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인 사쿠가 맨날 회사 가기 싫다고 징징거려도 회사에 가면 또 일을 잘한다. 왜냐? 고향에 내려가기 싫으면 일을 해서 내가 먹고 살만큼은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귀여운 고양이-라기엔 너무나 유능한 거대묘 유키치-도 키우고 있다.


유키치가 있기에 사회생활을 제대로 영위해 나갈 수 있는 사쿠는 고양이를 끝까지, 잘 부양해야겠다 싶으니까 더 열심히 한다. 열심히 + 잘하지 않으면 회사에서 잘리니까. 안 잘리려고 그렇게 주말출근에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거다. 특히나 집안일에 젬병인 사쿠는 유능한 유키치의 도움을 받아야만 회사에 나가 한 명의 인간으로서, 1인분의 일을 할 수 있다.


하여간 이런 사쿠가 어느 날 아침 일어났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다. 당당하게 저 아프니까 못 가요, 가 아니라 그래도 회사에 가야 된다고 징징댄다. 서양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이런 정서는 동양권(?) 아니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비슷하게 통하는 면이 있다.


회사에서 오늘 해야 될 중요한 미팅이 있다면서. 상대적으로 업무가 한가로울 때 아프면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쉴 수 있는데 사람이 절대 그럴 때 아프지 않다. 마치 알고 그러는 듯이 바쁘고 빠지기 어렵고 꼭 그런 시기에 병이 온다.


그나마 요새는 조금 유연하게 돌아가는 회사인 경우 재택근무를 할 수 있으니 과거에 비하면 많이 괜찮아진 편이다. 하지만 코로나 전만 해도 재택근무는 무슨, 재택근무란 건 꿈도 못 꾸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아무튼 그런데 지금의 나는 선택할 수 있다.


춥다?
너무너무 춥다?


그럼 굳이 나갈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된다. 그래서 내일은 하루 종일 집에서 (집안도 춥다는 건 함정이지만...ㅋ) 안 나가고 버틸 거다.


덧.

이날의 결말.


나는 결국 이번 겨울 들어 현재까지 가장 추웠다는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간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토요일로 미룬 악기연습실 때문에 토요일 아침이 되어서야 현관문을 열고 나갔는데 집 앞이 얼어있는 거다. 그런데 정말 딱 우리 집 앞만. ‘뭐야, 이상하네?’ 하면서 나갔다 왔고 오후가 되니 얼음이 녹아가지고 바닥이 질퍽거렸다. 그러고 집에 들어왔다.


토요일 저녁. 주말이라고 좀 풀어져가지고 저녁 먹고 <홍김동전> 보면서 낄낄대고 있는데 아무래도 집 앞 복도가 시끄러웠다. 여기는 복도식 아파트이고 특히 1층이다 보니 엘리베이터 앞에서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떠들면 그게 고스란히 다 들려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생각보다 소란이 오래 지속되었고 무엇보다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마치 우리 집 앞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아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시끄러워’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우리 집 문을 두들긴다. 똑똑똑.


보통 집으로 찾아오는 경우는 가스검침 정도밖에 없다. 나머지는 잡상인이거나 수상한 사람이니 문을 열어줄 일이 없다. 보통 이런 경우 나는 절대 문을 안 열고 사람 없는 것처럼 대답을 하지 않는다. 어차피 평상시에도 집에 조용히 있으니 가능하다. 그런데 이 날은 촉이 왔다. 이상하다 싶어서 ‘누구세요?’ 그랬더니 관리실이라고 했다.


무슨 일이지? 하며 문을 열었더니 작업하시는 분들이 여러 명 있었다. 알고 보니 우리 집 수도계량기가 터졌다는 거다. 이게 뭔 일이래. 수도계량기가 터졌다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 이걸 누가 발견해서 신고한 건지 아님 이분들이 점검 차 돌아다니다 발견한 건지 모르겠으나 오늘 아침에 나갈 때 현관문 앞 복도에 살얼음이 얼어있었던 게 계량기가 동파돼서 그랬던 거였다. 그것도 모르고 난 이상하다고 생각만 했네?


물이 나오냐고 물어봐서 물은 다행히 잘 나온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을 밖에서 시끌시끌하며 작업하는 소리가 났다. 뭐라도 드렸어야 했나? 그분들의 업무이긴 하나 우리 집 계량기 터진 거 때문에 밤늦은 시간에 추운 데서 작업을 하게 하니 죄송했다.


다음날 현관문을 열고 나가보니 전부 다 깔끔하게 고쳐져 있었고 바닥에는 미끄러지지 말라고 천 같은 걸 깔아놓으셨다. 그리고 또 다음날. 나가다가 아파트 청소하시는 분을 만났는데 여기는 왜 이런 걸 깔아놨냐고, 이렇게 하면 오히려 이 천이 얼어서 넘어져서 다친다면서 그걸 치우고 얼음을 다 깨 주셨다. 미안해죽겠네, 정말.


우리 집 수도계량기가 동파돼서 물이 샜는데 그거 때문에 넘어질까 봐 관리실에서 깔아놓은 거라고, 정말 감사하다고 몇 번을 고개를 수그렸다. 엄밀하게 말하면 내 부주의 때문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어쨌든 우리 집 수도계량기가 동파돼서 물이 샌 것 때문에 관리실에 청소아줌마까지 안 해도 될 일을 하는 수고를 겪었다.


앞으로는 수도계량기 동파방지를 위해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에는 반드시 수도꼭지를 약하게 틀어놓고 다니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다. 다행히 수도계량기를 교체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다니도록 신경 써서 그런지 남은 겨울은 별다른 사고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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