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의 기록 : 마지막 목적지, 응봉산에서 노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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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마지막 목적지는 응봉산이다.
일몰시간을 놓칠까 봐 급하게 나오느라 카페 화장실도 안 들렀는데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일몰도 일몰인데 완전한 야경을 보려면 일몰시간이 좀 지나서도 있어야 하는데 추위도 추위지만 이거 화장실 가고 싶어서 어떡하지.
마침 버스정류장에 쉼터가 있어서 거기서 좀 쉬면서 노닥거리다 응봉산으로 출발했다. 얼마 안 걷고 나서 바로 입구에 도착했다. 체감상 한 5분도 안 올랐나. 그리고 전망대 90미터 표지판 앞에 화장실 발견! 살았다! 화장실에서 나오니까 1분도 안 걸려서 팔각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날 진짜 잘 잡았다. 구름도 적당하고 날도 그렇게까지 안 추웠고 노을이 막 지고 있었다. 서울 시내와 한강이 전부 다 내려다보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올라올만하다. 노을로는 가성비 최고다.
해는 딱 먹구름이 가려버렸지만 움직이는 건 알 수 있다. 붉은빛이 점점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때문이다. 사진에는 안 찍하겠지만 내 눈에는 보이는 비행기가 지나간다.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하늘을 보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 시간에는 페퍼톤스 1집을 들어줘야 한다. <heavy sun heavy moon>을 첫곡으로 듣는다.
음악을 틀지 않아도 차소리가 자동으로 ASMR처럼 들린다. 일몰시간을 2,3분 앞두고 나니 오늘의 해는 저너머 이름 모를 어느 야트막한 산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눈 깜빡할 사이에.
그런데 그것과 대조되어서 보였던 게 바로 아래에 있는 강변북로에 늘어서있는 차들의 조명이 용산구 쪽으로 향하는 즉 나한테 뒤꽁무니를 보이는 차들은 전부 빨간빛을 반대로 내 쪽으로 오는 차들은, 성동구 쪽으로 오는 차들은 전부 하얀빛 아님 약간 노란빛을 띠며 차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늘엔 붉은 노을이 지상엔 붉은 차량 후미등이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의 시간을 교체하자는 표시를 보내는 것처럼. 신기했다. 여기 올라와야만 보이는 볼 수 있는 것들이다.
BGM <high romance>, 페퍼톤스
해는 넘어가버렸지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하늘과 땅이 완전히 공수교체가 될 거다. 그럼 도시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지. 그야말로 깜깜한 밤하늘과 불빛이 넘실대는 도시를. 그 모습을 보기 위해 또 기다린다.
나는 올해 내 생애 가장 긴, 두 달 간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그 여행에선 몇 번이나 일몰을 볼 수 있을까. 가능하면 일상에서 보단 많이 봤으면 한다.
BGM <fake traveler>, 페퍼톤스
점점 어두워진다. 해는 시야에서는 사라졌어도 여전히 빛을 보여주고 있다. 3호선 철길이 함께 지나가는 동호대교엔 파란불이 들어와 있어서 눈에 띈다.
하얀 전조등은 다이아몬드, 빨간 후미등은 꼭 루비 같다. 보석이 도로에 콕콕 박혀있다. 도로뿐만 아니라 건물 꼭대기에도. 온 세상이 반짝반짝한 보석으로 가득 차있다.
오늘 아침에 꾼 산 불나는 꿈은 오늘 이런 야경을 보게 되리라는 암시였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불나는 꿈은 대체로 길몽이라는데 현금을 안 챙겨 나와서 복권을 사지 못했다.
BGM <everything is ok>, 페퍼톤스
점점 더 어둠이 짙어지고 같이 일몰을 보던 사람들도 하나둘 사라져 가고 손가락도 슬슬 시려온다.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완벽한 어둠이 내려앉은 모습까지 보고 가려고 한다. 또 이런 날이 많지 않을 것을 알기에.
BGM <검은 산>, 페퍼톤스
아까 일몰이 질 때도 꽤 자주 비행기가 지나갔는데 이제 어두워지니까 불을 밝힌 비행기가 여전히 하늘을 지나간다. 뭐가 반짝여서 별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게 별이 느리게나마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 치고 꽤 빠른 속도로.
공식 일몰시간으로부터 40여분 정도 지났을까. 많이 어두워졌지만 아직 동편 하늘엔 어스름하게 해의 흔적이 남아있다. 어차피 기다린 거, 저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BGM <검은 우주>, 페퍼톤스
공식 일몰시간으로부터 약 50여분이 지난 저녁 6시 30분. 이제야 동녘 하늘에도 희미한 해의 흔적이 사라졌다. 서녘하늘은 이미 어두워진 지 오래다.
이제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야지. 이렇게 서울시내를 버스 노선 하나로 여행해 보기가 끝났다. 가만 생각해 보니 계속 같은 버스 노선을 타고 내리는 바람에 버스 환승은 하지 못했다는 슬픈 소식과 함께 :(
버스 1회 차 탑승 : 옥수동~효창공원 1,500원
버스 2회 차 탑승 : 효창공원~유진상가 1,500원
버스 3회 차 탑승 : 유진상가 ~ 봉국사 1,500원
버스 4회 차 탑승 : 숭덕초교 ~ 응봉산현대아파트 1,500원
총 6,000원 지출.
같은 노선의 버스를 네 번이나 탄,
재밌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