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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Feb 06. 2021

이번 생에 깁스는 처음이라 (하)

깁스 생활자가 할 수 있는 것 : 독서 그리고 내 방 여행하기

'이번 생에 깁스는 처음이라 (상)'에서 이어집니다.



     갑자기 앞으로 약 한 달간 깁스를 하고 최대한 움직이는 것을 조심하며 지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내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인데도 이렇게 된 것이 너무나 싫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로 몸이 불편하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짜증과 불안감이 일게 마련이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깁스 때문에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내 정신을 우울로 가득 찬 구렁텅이에 계속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방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만 했다.






     방구석에서 움직이지 않고 제일 하기 좋은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독서다. 책을 펼치면 세계 여행은 물론이고 상상 속의 세계에서도 유영이 가능하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원제 : 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 맨 처음에 실린 ‘바빌론의 탑’에 나오는 것처럼 책을 펼쳐서 읽었을 뿐인데 끝도 보이지 않는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가 반대로 땅 속 깊숙한 곳까지 갈 수도 있다. 


     그런데 다리가 이렇게 되고 보니 항상 책을 빌리러 가는 도서관에 가기가 힘들어졌다. 엄밀히 말하면 '갈' 수는 있다. 하지만 혼자 운전해서 도서관에 가거나 산책 겸 걸어서 도서관에 가던 것과 달리 이제는 누군가가 차를 태워다 줘야만 도서관에 갈 수 있다. 그리고 도서관에 가면 미리 생각해놓은 책을 골라오기도 하지만 서가를 돌아다니며 책을 고르는 재미가 있는데 그것도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전자책 서비스 중 하나인 밀리의 서재 무료체험을 신청했다. 마침 한 달간 무료체험을 할 수 있었는데 깁스도 한 달 정도만 하면 된다고 했으니 기간도 잘 맞아떨어졌다.


     밀리의 서재에는 생각보다 책이 많았다. 이전에 예스 24 ebook와 리디북스를 써본 적이 있었는데 확실히 밀리의 서재가 이용하기가 편하고 앱도 깔끔했다. 좀 매니악하거나 외국 작가들의 책은 없는 것들도 있었지만 평소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싶었는데 못 본 책들이나 비교적 최신작들도 꽤 많이 있었다.


     이런 나에게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내 방 여행하는 법'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의 저자는 18세기 프랑스 사람으로, 장교와 결투를 벌여 42일간의 가택연금형을 선고받고 집 안에서 이 책을 쓰게 된다. 벽에 바짝 붙어서 걸으면 둘레가 서른여섯 걸음 나오는 장방형의 방에 갇힌 그의 신세와 내가 다를게 뭘까?


     또한 종이책 기준 장장 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에이모 토울스의 장편소설 '모스크바의 신사' 속 주인공인 로스토프 백작 생각도 났다. 로스토프 백작은 살아있는 동안 메트로폴 호텔을 벗어날 수 없는 종신 가택연금에 처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호텔 안에서 여배우와 사랑도 하고, 아홉 살 소녀 니나도 만나고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도 하는 등 수많은 일을 경험한다. 그리고 해외의 소설까지 갈 필요도 없이 조선 시대의 여러 왕과 정치가들도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형벌을 받거나 먼 지역으로 유배를 가서 힘든 시간을 보낸 이야기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나도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처럼 적극적으로 '내 방 여행하기'를 해 보기로 했다. 내 방 여행하기의 테마는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으니 방 안에서 크리스마스 느끼기'로 정했다. 그래서 방을 둘러보며 크리스마스 느낌이 나는 소품을 찾았는데 무려 다섯 개나 있었다.



첫 번째, 아빠가 사다 줘서 책상 위에 놓여있던 연금복권이다. 아빠가 지지난주에 연금복권을 사다 줬는데 그게 7등에 당첨되어서 다시 이번 주 복권으로 바꿔오셨다. 그래서 이번 주 추첨을 기다리고 있기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상 위에 올려놨는데 자세히 보니 앞면에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이 그려져 있고 거기엔 '복권 푸르게'라는 멘트가 적혀 있었다. 복권도 시기와 분위기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 처음으로 설치해 본 가랜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기에 가장 좋은 건 무엇보다도 크리스마스트리와 조명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작은 방에 그걸 둘 자리가 없었다. 심지어 요즘 유행하는 벽걸이 트리마저도 걸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발견한 게 가랜드였다. 커튼과도 잘 어울리고 손쉽게 분위기를 바꿀 수 있어 좋았다.







세 번째, 내 방에 일 년 내내 놓여있는 작은 트리 장식으로, 지금은 침대 헤드 위에 올라가 있다. 2018년 유럽 여행 때, 크리스마스 소품이 유명한 핀란드가 아니라 엉뚱하게 에스토니아(또는 라트비아)에서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8월에 여행을 했는데 그 해 12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샀고 이 장식을 보면 크리스마스와 동시에 당시의 여행이 떠오른다.





네 번째, 내 방 화장대에는 조화로 된 미니 트리가 있다. 몇 년 전에 방에 크리스마스트리를 들이고 싶어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생화로 된 트리 화분을 샀었다. 그런데 식물 기르기 아니 죽이기 마스터 똥 손인 나는 역시나 그 화분을 죽이고 말았다. 그래서 생기는 좀 떨어지지만 죽지 않는 조화를 들였다. 조명도 사다가 둘러놔서 조명을 켜놓으면 나름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난다. 이것도 일 년 내내 방에 있는데 한여름 밤에 조명을 켜놓고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기기도 한다.





다섯 번째, 지금 내 방에 흐르고 있는 음악이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는 노래를 크리스마스에만 들으라는 법은 없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서야 깨달았다. 그 뒤로는 여름에도 캐럴이나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노래를 듣는다. 겨울에는 이런 노래를 듣기만 해도 온 몸 전체로 쏙쏙 스며드는 것과는 달리 여름엔 더위와 부조화를 이루는 것 같으면서도 겨울의 설레는 느낌을 가져다줘서 좋다. 


그런데 이건 아마도 내가 여태까지 크리스마스가 겨울에만 오는 북반구에 살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남반구는 크리스마스도 여름이니까, 뜨거운 여름에 크리스마스 노래를 듣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얼마 전 유튜브에서 발견한 아주 마음에 드는 배경음악 채널이 있는데, 정말 카페에서 틀어줄 법한 가사가 없으면서 약간의 비트가 있는 잔잔한 배경음악이 많다. 그중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는 음악도 있어서 요즘 자주 들으며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찾아보니 이렇게 작은 내 방 안에서도 크리스마스를 담뿍 느낄 수 있었다.

    발가락에 철심을 박거나 수술까지 가지 않고 깁스로 해결된다는 것만 해도 다행인 거다.

    불편하긴 해도 재택근무가 가능하니 일도 할 수 있고,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따뜻한 집이 있다.

    그래서 나는 당분간 '내 방 여행하기'를 좀 더 적극적으로 실행하기로 했다.


    어디에도 갈 수 없기에 오히려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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