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 모르겠다, 퇴근이나 하자
퇴근시간은 여섯 시.
내 위의 상사는 다른 팀 송별회가 있어서 일찍 나가셨고 상사의 상사인 대표님은 해외출장을 가셨다. 그리고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 휴가를 2.5일 내도 되는 건데 계산착오로 3일을 냈네? 정정하기도 귀찮고 억울하단 말이지.
그런데다 여태 이 회사 다니면서 청구하지 못한 야근이 얼마더냐. 아무리 임금포괄제라고 해도 적정선을 넘는 야근은 용납할 수 없다. 그래, 원래 팀장들은 일찍 나오라면 나오고 늦게 가라면 가는 거잖아? 그러면 일찍 들어가는 날도 있어야지.
짐을 주섬주섬 싸서 정해진 퇴근시간보다 20여분 먼저 자리를 뜬다. 오늘은 참 타이밍 좋게 집 앞 가까이 내려주는, 평소엔 배차간격이 길어 한 달에 한 번이나 겨우 탈까 말까 타이밍 맞추기 어려운 버스가 도착했다. 그래서 항상 먼저 오지만 집 앞 버스정류장에 내려서는 한참 걸어가야 하는 버스들만 탔는데, 오늘은 럭-키.
그렇게 버스를 타고 얼마 안 가 하차. 마침 냉장고의 아이스크림이 다 떨어졌다. 버스정류장 근처에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었지. 여기서 아이스크림 좀 사다 쟁여놔야겠다며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가 먹고 싶은 것들을 이것저것 집는다. 많이 고른 것 같은데도 만원이 안 넘었다.
아이스크림이 장바구니를 가득 채우니 무게가 있었지만 발걸음은 가볍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니 치킨집이 보인다. 아, 치킨 땡기네. 하지만 이번 주까진 속이 안 좋아서 먹는 걸 조심하기로 했으니 자제하자. 본가에서 가져온 꼬리곰탕 국물에 야무지게 밥 말아먹을 테다.
그리고 아파트 단지 입구에 오니 어라? 붕어빵 트럭이 보이네? 오늘 날이다, 날. 2천 원에 3개라는데 마침 현금이 딱 2천 원 있었다. 여기는 계좌이체도 안 받아서 진짜 온리 현금만 받는 붕어빵 가게. 현금이 없으면 아예 못 먹는다. 돈은 썼지만 신나는 마음으로 붕어빵 구입! 그리고 아파트 단지 입구로 들어선다.
그러고 보니 아직 해가 안 떨어졌네. 대체 이 시간에 퇴근하는 게 도대체 얼마만이야? 이게 정상적인 삶 아니야? 그동안 얼마나 비정상적인 삶을 살았던 거야?
확실히 시간대가 그래서 그런지 내 옆에는 나처럼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가는 아주머니 그리고 맞은편에는 유치원에서 만든 듯한 종이로 만든 왕관을 쓴 손녀의 손을 꼭 잡고 걸어오는 할머니가 보였다.
내 귀에선 페퍼톤스 1집에 실린 연주곡 <heavy sun heavy moon>이 흐르고 있었다. (노을 시간에 듣기 좋은 곡으로 강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