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아빠에게 퇴사 선언하기 (3)

아빠의 사랑은 시원한 미에로 화이바 한 잔과 함께

by 세니seny

내가 퇴사한다고 말하면 아빠가 화를 내는 건 아닐지 걱정했는데 그래도 나를 응원해 주었다.


한참있다 방에서 나온 아빠는 갑자기 미에로 화이바 먹을래? 하면서 냉장고에서 음료수병을 하나 꺼내왔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푸하하하-
그게 뭐야!

나는 미에로 화이바라고 하길래 당연히 조그만 병, 우리가 흔히 아는, 목욕탕에 가면 종종 사 먹는 100ml짜리 작은 병인줄 알았다. 그런데 아빠가 냉장고에서 꺼내온 것은 그 작은 병을 확대한 것처럼 커져있는(?) 대형 미에로 화이바 페트병이었다. 이상하게 그게 너무너무 웃겼다.


콜라병 같은 일반 페트병 모양이 아니라 미에로 화이바 유리병 모양을 그대로 확대한 듯한 1리터짜리 커다란 병이었다. 평소에 보지 못한 형태인 데다 상상도 안 했던 모양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그런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었던 것 같다.


22222.png 평상시에 먹는 건 왼쪽, 아빠가 사 온 건 오른쪽. 실제로 봐야 크기가 확 차이 나는데...ㅎㅎ


미에로 화이바 자체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한테는 어렸을 때 목욕 끝나고 가끔 마시던 음료수로 각인되어 있다. 이상하게 목욕하고 먹고 나면 참 시원하고 달달한 게 맛있었고 이상하게 건강음료의 이미지가 있었다. 하지만 결국 설탕물이라 건강에 딱히 좋지는 않았을 음료수.


응!
나 마실래!


오늘 아침만 해도 회의실에 팀원 두 명을 불러놓고는 특히 신입사원에게 보고서 이렇게 쓰라는 둥 저렇게 숫자를 넣으라는 둥 제법 권위를 챙기며(?) 팀장스러운 역할을 하던 나였는데 집에 와서는 애기처럼 "응! 나 마실래!" 하며 마음 편하게 자기주장을 하는 나였다.


아빠는 소파에 앉아있는 나랑 엄마에게 미에로 화이바 한 잔씩을 따라주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마시니 참 맛있었다. 달달한 설탕물이고 색소 넣은 음료면 좀 어떠리. 24시간 내내 마시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가끔 마시는 건데.


그렇게 엄마랑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 더 늦어지기 전에 내가 사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후딱 나갈 준비를 하고 "나 갈게~~~~~~" 하고 집을 나섰다. 분명 이를 닦았는데도 입 안에 미에로 화이바 맛이 남아있었다.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에서 문득 떠올랐다.


이게 바로 울 아빠의 사랑 표현 방식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료수 한 잔 먹을래? 하며 나눠주는 것. 아까도 시장에서 김을 구워왔다면서 집에 좀 가져갈래? 하며 이쁘게 김을 넣어둔 비닐팩을 내 눈앞에 흔들어 보이는 것. 그런 것.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여기서 울면 안 되는데…


내가 중요한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아빠는 혹시 얘가 결혼이라도 한다는 걸까, 한편으로 기대(?)했을 텐데. 결혼은커녕 멀쩡하게 잘 다니고 있는 회사 심지어 팀장까지 승진시켜 준 회사에서 팀장 달았다고 한지 1년도 안 돼서 그만둔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겠지.


나는 지금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이니 나의 가장 가까운 가족은 여전히 엄마와 아빠다.


나는 성인이니까 내 인생에 관련된 결정은 (결국은) 내가 한다. 하지만 그게 엄마, 아빠에게 영향이 가는 부분도 있고 그로 인해 내가 도움을 받을 부분도 있으니 결정 사항에 대해 공유한다. 물론 그 결정을 내리기 전에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공감을 구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내가 결정을 했음에도 엄마 아빠에게도 영향이 있고 내 인생의 흐름이 바뀌는 결정이 될 테니까 꼭 직접 말하고 싶었다.


부모님은 첫 번째 자식인 나로 인해 처음으로 부모가 되었다. 처음 아이를 키워봤으니 뭔가 잘못한 게 있을 수 있고 그걸 굳이 찝어서 잘못이라고 하지 않아도 뭔가 부족한 게 있었을 테다. 그리고 나도 자식이랍시고 함부로 대들거나 막말을 해서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분명 있을 거다. 아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런 중요한 선택을 했을 때 세간의 눈에 보이는 것보다 그래도 네가 중요하다고, 네가 건강하고 스트레스받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를 응원해 주는 부모님이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빠는 그냥 냉장고에 사 온 음료수가 있어서 한 잔 꺼내서 준 거겠지. 냉장고에 들어 있어서 미지근하지 않고 차가워서 시원하게 느껴져 더 맛있었던, 그 미에로 화이바 한잔에 담긴 아빠의 마음을 느꼈다고 한다면 너무 비약인 걸까. 비약이면 뭐 어때? 우리 아빠는 우리 아빠고, 아빠의 사랑을 가장 잘 아는 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아빠의 딸인 나일 테니까.


고마워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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