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공원에서 이름 없는 악사의 음악을 들으며
스페인광장과 누에보다리를 지나 좀 더 안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북적이는 곳에서 벗어난 느낌이 좋다.
그렇게 혼자 열심히 걸어가고 있는데 건너편에 아기 유모차와 함께 서있는 부부가 있었다. 부부는 뭔가 얘기 중이었고 6개월? 아니 3개월도 안 되어 보이는 (아기를 안 키웠다 보니 아기 사이즈를 모르겠네) 하여간 진짜 정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듯 작은 아기가 유모차 안에서 혼자 고개를 두리번거리길래 나도 모르게 순간 아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기가 이걸 볼 지, 안 볼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데 그 찰나의 순간, 아기는 손 흔드는 나를 발견했고 진짜 너무 순수하게 웃으면서 같이 손을 흔들어 주는 게 아닌가!!! 정말 귀여워. 길을 지나가는 순간 그 잠깐의 1분도 아닌 30초도 안 되는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내가 행복했던 만큼 아가도 행복했기를.
점점 더 골목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온다. 자연스레 그 소리를 따라갔다.
작은 공원 같은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서 무명의 악사가 연주를 하고 있었다. 기타 소리로 인해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 공간이 순간 빨간 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나무와 새소리와 함께 매우 매력적인 공간이 되었다. 이 공간을 완성해 주는 소리. 이런 사람들 덕분에 여행의 순간들이 완성된다.
적당히 해가 들면서 + 그늘도 있는 곳에 자리가 나서 거의 한 시간 정도를 앉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두 달간 유럽여행을 하고 있는 내가 꼭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곳에 갈 때마다 말이 바뀌고 주변 풍광이 바뀌며 여기서는 옳았던 게 저기에선 틀리기도 하는 것과 같은 것들.
한참 시간을 보내고서야 일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태까지 여행을 다니며 여러 곳에서 많은 연주자들의 퍼포먼스를 봐왔다. 하지만 가난한 여행자인지라 한 번도 돈을 낸 적이 없는데 그동안 안 낸 거까지 포함해(?) 여기서 돈을 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얼마를 내야 알맞은 건지 그 적정한 가격을 모르겠는 거다. 물론 많이 주면 당연히 좋아하겠지만 장기 여행자로서 나도 주머니 사정이란 게 있으니까.
고민하다 1유로를 냈는데 다른 사람들이 돈 낼 때는 뭔가 고맙다는 제스처를 취해주던 아저씨가 나한테는 아무 반응도 안 해줘서 좀 슬펐다. 아무래도 금액이 너무 적었나 보다. 미안해요 아저씨. 저는 여행이 끝나고 돌아갈 곳이 없는 백수라서요.
올드타운 꽤 안쪽까지 들어왔기 때문에 이제 슬슬 돌아서 나가기로 했다. 근처에 특이한 성당이 하나 있다고 해서 가보고 가다 보니까 론다 엽서에 가끔 나오는 특이한 문도 발견했다. 사진도 찍고 걸어 나오니 다시 누에보 다리. 삼성역 코엑스에서 어딜 가도 별마당 도서관으로 모이는 것처럼 론다에선 어디로 가도 결국 누에보 다리로 통한다.
여행용 다이어리를 쓰면서 여행지에서 받아온 지도나 내가 산 엽서를 붙여 놓는다. 론다에 들렀을 때도 관광안내소에 갔더니 쉬는 시간이라 닫혀 있었는데 이제는 열려 있어서 지도를 하나 받아오기로 했다.
지도를 받고 원래 가려고 계획했던 공원이 바로 뒤에 있어서 가봤는데 여기는 아코디언 연주자가 있어서 아까와 분위기가 또 달랐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의자가 없어서 앉을 데가 없더라. 아까 의자가 있었던, 예상하지 못했던 그 이름 모를 작은 공원에 오래 머물다 오길 잘했다.
잠깐 쉬었다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갔다. 내 앞에 있는 여자애들 둘이 맛 테스트로 계속 이거 달라 저거 달라하는 사이 나도 맛을 보고 골라야 하나 했는데 그냥 노란색 바닐라맛 달라고 했다. 자극적이지 않은 그냥 바닐라맛이었다. 역시 이탈리아에서 먹은 젤라토가 맛이 다르긴 하다.
시간이 애매해서 버스터미널 내려가는 길에 상점가를 구경하면서 슬슬 내려왔다.
오늘은 적당히 딱, 잘 즐긴 거 같다. 여행을 하면서 이 '적당히'라는 걸 충족시키기 상당히 어렵다. 그 점에서 오늘은 꽤 만족스러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