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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아테네의 프라이빗 비치에서 오후를

선베드에 누워 손가락 사이로 시간 흘려 보내기

by 세니seny

이제 해변가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동한다. 버스에서 내려서 입구를 못 찾아서 헤매다 중간에 있는 가게를 통해서 들어가야 하는거 같아서 들어갔더니... 선베드가 있는 쪽은 프라이빗 비치라고 한다.


프라이빗 비치는 우리나라에는 잘 못 본 개념인데 일정 구역을 업체가(?) 차지해서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외국은 이런가보다. 신박하네. 날이 뜨겁긴 한데 바다에서 수영을 하기에 물은 차가워서 수영할 생각은 안했고 (4월말) 어차피 선배드에 누워 있을 생각이었으므로 프라이빗 비치를 이용하기로 했다.



선글라스를 벗으니 눈이 아릴 정도로 눈부시게 파란 바닷가가 펼쳐져 있다. 다리랑 발은 옷으로 가렸는데도 개뜨겁다. 잘 덮지 않으면 홀라당 타게 생겼다.


어제부터 일정에 여유가 많아서 그런 생각을 했다. 돈을 물 쓰듯이 쓴다는 표현이 있는데 지금의 나는 마치 시간을 물 쓰듯이 쓰고 있다는 것. 움켜쥔 손을 펼치면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줄줄 세듯이 그렇게 시간을 쓰고 있다.


2013년, 9개월간의 갭이어 덕에 이후로 10년을 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의 쉼도 분명 그럴 계기가 될 거란 걸 안다. 하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인생의 숙제를 하고 있지 않다는 찜찜함을 아직도 지워내지 못했다. 이번 여행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이상하게 오늘도 클래지콰이 1.5집이 떠올라 듣기 시작. 20대에 함께한 음악이 평생(?) 간다더니 진짜 그런가봐. 한동안 안 들었는데도 이렇게 뜬금없이 생각나고 또 십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너무 감각있어서.


평화로운 해변 풍경. 그리고 다소 밋밋했던 맥주 mythos. (@아테네, 2024.04)


뭐라도 마실까 싶어 겨우겨우(?) 메뉴를 받고 흔치않은 밀크쉐이크를 먹을까 하다 오늘이 문득 그리스 여행의 마지막 날임을 깨닫고 그래도 그리스 맥주는 한번 마셔봐야지 하며 mythos를 시켰다. 사람들의 기대하지 말란 평이 생각났는데 역시나 시원하긴 한데 왠지 모르게 카스가 생각나는 맛이었다. (맛이 그다지 없었다는 말이다)


그나저나 바다를 좀 보고 싶어서 앞쪽 자리를 찾다보니 약간 거의 끝쪽에 왔는데… 앞자리가 비어 있다 했더니 이 더운 시간에 영업하기를 포기한 발마사지 중국 아주머니들과 튜브와 해변타올을 빌려주는(?) 파는 흑형들의 아지트였던걸까.


신기하게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약속이나 한듯이 그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하필이면 왜 내 앞자리에서 중국어가 들려오나요. 매일 여행다니는 인구가 1억명이라면서도 한편으로는 해외노동자로 일하는 이런 사람들도 많은 그러니까 한마디로는 절대 정의할 수 없는 나라가 중국이다.


맥주는 훅훅 마셨더니 금방 다 마셔버렸고 <불안의 서>를 읽다가 아무래도 바다 앞이라 그런가 잘 안 들어오길래 <랩 걸>을 읽기 시작했다. 술술 읽히네. 눈으로는 바다를 한번 보고 귀로는 테니스 같이 생겼지만 좀더 큰 탁구채 같은 채로 사람들이 탁탁 경쾌하게 볼을 치는 소리를 들으며 한참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여섯시가 됐는데도 해가 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 바다에 몸을 담가보지 못한 건 아쉽지만 아직 두달간이나 아니 이제 7주간의 여행이 남아있으니 그동안 분명 수영할 일이 있을거다.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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