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디톡스에 이은 무지출 챌린지까지
비가 온다 했었는데 날이 맑고 종점에 거의 다 와가자 아주 멋진 풍경이 펼쳐졌다. 오늘날이 맑아서 하늘이 그대로 호수에 비친다. 너무 예쁘잖아. 스위스 물가가 비쌌던 다 이 풍경값 때문이었나 보다. 그나저나 코는 끊임없이 흐르고 목도 약간 붓는 느낌이랄까 답답해지는 느낌인데 괜찮으려나 이거… 호숫가는 더 쌀쌀할 텐데.
역에서 내려 슬슬 걸었다. 호숫가 쪽으로 가면서 미리 알아본 핫초코를 파는 가게 찾아봐 놨으나 결국 못 찾고 지나갔다. 덕분에 무지출 챌린지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늘만 아니면 한낮의 햇살은 따가웠다. 해가 잘 드는 곳에 의자가 많이 있었고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많이 점심 먹고 있길래 나도 그 틈에 앉아 미리 싸 온 빵으로 점심을 먹고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았다. 너무 졸린데 너무 뜨거워. 코찔찔이니까 그래도 추운 거보단 더운 게 낫지 않겠냐며 햇빛을 받으며 한참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 있다 보니 거의 두 시가 다됐다. 두 시반까지는 역으로 돌아가기로 해서 이제는 일어나서 호숫가 주변을 좀 더 걷기로 했다. 노리플라이의 <beautiful>이 저절로 떠오르는 풍경이었지만 인터넷이 안되니까 혼자 흥얼거리다 바이올린 레슨 때 선생님하고 마지막으로 녹음한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이중주를 틀어보았다. 개엉망이다.
그래도 꾹 참고 끝까지 듣고 나니 더 잘하고 싶다는 욕망이 올라온다. 아마추어 주제에 이대로 손가락이 굳어버릴까 봐 무섭다. 당분간은 레슨은 받기 어려우니 연습실이라도 다닐까 생각 중. 아님 평일레슨이라도 받아? 공부도 해야 되는데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아서 큰일이다.
역으로 돌아와 기차에 탑승했다. 이번엔 자리를 예약했는데 왜 이렇게 구석에 심지어 역방향으로 예약을 했네. (오른쪽 맞긴 맞는데) 하하하 이쯤 되면 역방향의 여자다.
그래도 비어있는 자리가 많아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앉아본다. 아침엔 인도 대가족이 같은 칸에 탔는데 이번엔 인도 남자애들이 한 무리다. 숙소는 원래 여성전용으로 했다가 좀 싸게 하려고 혼성으로 바꿨는데 일단 6인실에 남 2, 여 2로 두 자리는 비었다. 남자 둘은 동양인인 거 같고 심지어 한국인 같은데 말은 안 걸어봤다. 보니까 서양사람들은 눈 마주치면 디폴트로 "Hi~"라고 자연스럽게 인사하는데 나도 동양사람이랑 눈 마주치면 이상하게 인사를 안 하게 된다.
어제처럼 먹구름이 끼더니 빗방울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아까 오는 길에 날씨 좋을 때 실컷 봤으니 됐지. 거의 다 내릴 때 돼가지고 졸다 보니까 사람들이 내리려고 다 일어나 있었다.
중간에 한번 갈아타야 했는데 기차표에 다음 기차 시간이 안 나와있어 가지고 승강장 내려가서 플랫폼 번호를 확인했는데 내 목적지인 인터라켄 동역이 종착역으로 나와있는 게 없다. 검표원이 보이길래 물어보니 바로 눈앞에 있는 거 타란다. 타고 3분도 안 됐나, 바로 출발한다. 아무래도 한번 더? 갈아타야 하는 거 같은데 정신 잘 차리고 있어야지.
역시나 슈피츠에서 한번 더 갈아탄다. 기차가 3분 정도 계속 연착 중이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18:05 출발이다. 그리고 마침 기차도 방금 도착해서 추운데 밖에서 안 기다리고 안으로 쏙 들어왔다.
기차에서 한 번도 조용히 온 적이 없다. 그러려면 일등석을 타야 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소리에 너무 민감하게 구는 걸까? 쓸데없는 통화는 하지 말고 (심지어 요샌 영상통화라 상대방 떠드는 거까지 강제로 들어야 함) 얘기할 때는 좀 소곤소곤했으면 좋겠다. 나 같은 예민러는 힘들다.
마지막으로 인터라켄으로 가는 기차로 갈아탔는데 세계 온갖 언어로 여행 잘하라는 문구가 있는데 한국어만 없다. 그러고 보니 중국어도 없구나. 그리고 안내방송하는데 이탈리아어는 없고 독일어 -> 프랑스어 -> 영어 순이다.
독일어는 아예 모르는 언어고 프랑스어는 조금 알아듣는 언어. 이걸 들으면서 내가 들은 게 맞나? 약간 의구심을 가졌다가 100%는 아니어도 가장 자신 있는 영어를 듣는 순간 의심은 확신이 된다. 내가 들은 게 맞았구나, 하는. 방송 내용은 연결 편을 기다리는 중이라 몇 분 뒤에 출발한다는 안내방송이었다.
스위스 여행은 비쌌지만 그만큼 눈에 담기 어려운 풍경을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정작 이 나라 사람들에겐 참 비효율적이겠지만 나같은 언어여행자 입장에선 같은 말을 여러 다른 나라 말로 들을 수 있어 강제로 공부가 되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