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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롸이프 Jun 24. 2024

6살 딸과 엄마, 스위스 2주 여행기 (1) 인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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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까지만 해도 해외여행은 꿈도 못 꿨지만 딸이 6세 유치원 형님이 된 지금, 엉겁결에 둘이 스위스 2주 여행을 하게 됐다.



13년째 일해온 회사에서 최근 퇴사를 각오할 만큼 힘든 일을 겪는 와중에 남편 출장 소식을 듣고 무작정 저지른 일이다.


사실 나는 누가 뭐래도 일도 육아도 척척 해내고야 마는 슈퍼우먼을 자랑하다 보기 좋게 무너지는 중이었다.


잠시라도 한국에서 모든 걸 내려놓으려 하니 우선 시야부터 물리적으로 분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때마침 스위스항공에서 인천-취리히 직항 편이 신설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모든 것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서둘러 비행기 표를 끊고 나니, 불안한 마음에 걱정병이 든다. ‘2주 동안 애 유치원 보내고 혼자 쉬었어도 되지 않았나?’ ‘근데 집에서 놀면 뭐 하나? 놀사람은 있나?’…


워킹맘의 알량한 모성애와 혼자 쉬고 싶다는 마음속 갈등은 언제쯤 타협이 되려나


남(의)편이 출장 가는 제네바는 직항이 없고 한국시간으로 밤에 떨어지는 환승은 도저히 애 데리고 혼자 자신이 없어서 취리히 인앤아웃으로 끊었는데…취리히에서 제네바가 스위스 끝에서 끝이었구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취리히 1박, 루체른 2박, 베른 1박, 제네바 5박 찍고 다시 바젤 3박 후 취리히 아웃으로 반강제 스위스 도시 투어를 기획한다. 아이가 아직 만 4세라 융프라우 같은 고지대는 과감히 포기했다 너의 미래 여행지에 양보한다.


시차 적응부터 밥은 잘 먹을까, 갑자기 아프지 않을까, 심심해하지 않을까…요즘 가장 무서운 말 ‘엄마 놀아주세요…’ 출발일이 다가오면서 가뜩이나 힘든데 내돈내산 스트레스를 자처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병의 2차 습격


그새 꿈같은 2주가 흘렀고, 한국에 돌아와 결국 다시 현실을 마주했지만 그럼에도 결론은 ‘오길 정말 x100 잘했다!’

텔레비전과 키즈카페, 오락실을 오가는 자극에서 벗어나 아이는 대자연을 온몸으로 즐겼고, 내 마음도 위안을 받았다.


스위스는 공원을 비롯해 여행지 곳곳마다 아이들 놀이터가 주변에 항상 있어 구글맵에서 playground 찍고 후기를 참고해 그 중심으로 돌아다녔다. 그네 타러 스위스 왔나 싶을 정도로…



코로나 이후 어딜 한번 가려면 늘 예약 전쟁과 시간제한에 쫓기듯 살았는데 여기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놀이터에서

놀고 싶은 만큼, 실컷 놀게 뒀다.


시간이 가면 가는 데로, 땅 파고 나뭇가지 주워오고 자연에서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거 다하게



심지어 기차 안에도 놀이터가 있다니 말 다했다. 아이는 언어가 안 통해 답답해하기도 했지만 또래보다 이제 막 말이 트기 시작한 어린 동생들과 잘 놀았다.


한국에서는 밥을 잘 안 먹어 걱정이었는데 여기선 빵과 치즈, 과일이 너무 맛있다 보니 오히려 매일 잘 먹고 다녔다.


호텔은 무조권 기차역 근처에 잡아서 짐 들고 다니는 동선을 줄였고, 돌아다닐 때는 애를 태우고 이동할 수 있도록 나온 기내용 캐리어를 유용하게 썼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스위스는 유럽 구시가지 특유의 돌바닥이 그나마 많지 않은 편이다.



캐리어 트라이크에 태우고 다녔어도 일단 많이 걸어 다녀야 하는 유럽여행은 아직 여섯 살에게는 무리였는지 매일 저녁 8시면 곯아떨어져 육퇴 했다.


나도 애랑 단둘이 이렇게 오랜 여행은 처음이라 하도 긴장을 하고 다녔더니 육퇴와 동시에 눕자마자 꿀잠이 들었다. 잠시라도 핸드폰을 보지 않고 스르륵 잠든 게 언제였나.


물론 아이 컨디션이 여행의 질을 크게 좌우하기 때문에 여행 오기 전부터 좋다는 종합비타민을 서로 다 때려 넣었다.


관광명소는 쿨하게 패스하고 아이가 즐길 수 있는 자연과 놀이터 위주로 다녔다. 기대 이상으로 여행의 모든 순간을 즐기는 아이를 보면서 어디서든 엄마와 함께했던 즐거운 시간 아이 정서발달에 좋은 밑거름이 될 거란 생각에 밥 안 먹어도, 좋은 거 안 봐도 충만한 기분이었다.



아이는 지금도 스위스에서 깔깔거리며 웃었던 때를 회상한다. 공원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다 참새가 날아와 한입 뺏어먹은 일, 산책을 하다가 맞은편에서 오는 강아지가 내 다리에 박치기 한 일, 해변에서 수영하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서 돌아오는 길에 비를 쫄딱 맞은 일…


기억들이 하나같이 조그맣고 소중하다. 때 묻지 않은 아이의 마음에 나도 한번 더 치유받은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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