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제 내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 너한테 있어서 나의 존재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뭐라고 생각해?
신기하게도 0.1초 만에 내 머릿속에 단 한 단어가 떠올랐다.
- 친구.
그는 내게 친구, 연인, 가족 그 이상의 중요한 존재로 느껴진다. 그런데 '친구'라는 단어가 떠오른 건 왜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란 두 개의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다"라고 했다. 볼테르는 "우정은 영혼의 결합이다"라고 했다.
나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철학자들만큼 길이길이 남길만한 말을 만들어 내지는 못해도, 그들이 했던 말과 같은 맥락의 생각을 순간 순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자들은 우리가 느끼는 것을 아주 적절한 말로 더 정교하게 표현하고 개념화 해온 것이다. 그들이 연구하는 것도 결국은 '우리라는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살아가느냐' 이니까.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와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볼테르 같은 유명한 철학자들이 친구라는 존재에 대해 남긴 말에 대해 나는 그를 대입해 보며 깊이 공감해 본다. 그를 만나면서 나는 그와 나의 영혼이 마치 하나였던 것처럼 이질감 없이 섞여드는 기분을 내내 느껴왔다. 오랜 세월 서로 다른 삶을 걸어온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만나 마음의 교류를 하는데 그 과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정다운 건 으레 있는 일은 아니다. 우리는 정말 '친구'라는 단어의 궁극적 의미에 완전히 다다른 만큼의 진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느낀다.
내가 이를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지금까지 해온 수많은 다른 인간관계와의 비교를 통해서였다. 가장 유의미했던 차이는 바로 '내가 그 앞에서는 진정한 나 자신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보통의 친구들과 있을 때는 '좋은 친구여야'하고, 부모님과 있을 때는 '착한 자식이어야'하고, 회사 동료들과 있을 때는 '유능한 직원이어야'했다. 그러나 그와 있을 때는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론 그의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지만, 그 생각이 내 말과 행동을 구속하지는 않았다. 그는 나의 외모나 능력 그 너머의 어떤 것, 말하자면 나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해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잘 보일 필요도, 그의 눈치를 볼 필요도, 내가 아닌 나를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에너지를 소비하던 나는 그를 만날 때만큼은 에너지를 충전했다. 그는 그야말로 안식처였다.
그런데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느낀다고 했다. 그는 이것을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된다'라고 표현하곤 한다. 가면을 벗어던지고 날 것의 나 자신으로 마주하는 우리 서로가 어떻게 친구가 아니겠는가.
아직도 신기하다. 사람들과 말하는 것이 어렵고 사실 대화라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내가 어떻게 그 앞에서는 그렇게 편하게 조잘거릴 수가 있는 것인지. 전화통화를 부담스러워하던 내가 어느새 그와 종종 전화를 하고 있다. 연인이니까,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니까, 전화를 해야 하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대화가 하고 싶어서, 서로 말이 하고 싶어서 전화를 한다. 카톡을 자주 하는 것을 싫어하던 내가 그와 시시콜콜한 카톡을 주고받으며 행복해한다. 아침 점심 저녁 메뉴나 출퇴근을 그저 서로 보고하는 카톡이 아니라, 지금 내가 어떤 상태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말하는 카톡을 한다. 그리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는 지금 어떤지 묻는 카톡을 한다. 종종 서로 돼지라고 놀리면서 유치한 농담을 하고, 다음엔 어떤 새로운 것을 하며 놀 것인가를 궁리하며, 서로의 마음상태와 몸상태가 어떤지 체크하는 따뜻함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린 틀림없이 친구다. 둘도 없는 친구. 보통 친구보다 '사랑해'를 조금 더 많이 외쳐대는 우리지만, 그래도 친구는 친구 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