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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뮤 Dec 03. 2023

운명의 남자

- 단편소설 -

그는 운명처럼 내게 다가왔다. 수많은 소개팅에 실패하고 나와 맞는 남자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뜻하지 않은 친구의 소개팅 제안에 아무 기대 없이 나갔던 나는 인생의 최고의 남자를 만났다.


3초 만에 반했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첫인상은 호감이었지만 그를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은 그저 ‘이 남자가 다른 남자와 무슨 다른 점이 있을까’였다. 대화가 무르익어갈 무렵, 그러니까 그를 만난 지 한 30분 정도 흘렀을까, 나는 어느새 배를 움켜잡고 끅끅대며 웃고 있었다. 그는 여느 남자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마치 나를 행복하게 하려고 존재하는 것처럼 나를 끊임없이 웃게 했다. 우리는 같은 MBTI를 가지고 있었고, 대화하는 방식이나 떠오르는 생각도 비슷했다. 이 세상에 이렇게 나와 잘 맞는 남자 사람이 있었다니. 내 인생에서 그렇게 진심으로 너무 웃겨서 참을 수 없도록 웃어본 적은 20년 만에 처음인 것 같았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와 나는 통한다는 게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말도 행동도 느린 내가 말을 완성하지 못하고 늘어뜨리면, 그는 내가 하고 싶던 말을 콕 집어서 대신 말해줬다. 내가 ‘그거, 저거’라고 말하면 그는 그게 무엇인지 귀신같이 알아맞혔다. 그가 구사하는 유머는 나와 너무나도 코드가 잘 맞아서 그와 만나기만 하면 웃을 일이 생겼다. 마음 저변에 항상 우울이 드리워진 게 당연했던 나는 어느새 그 우울에 별로 다가가지 않게 되었다. 그도 나를 만나기 전에는 부정적인 모습이 있었지만 나를 만나고 많이 행복해졌다고 했다.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비슷한 모습을 가지게 된 걸까?


완벽한 것 같은 그에게도 물론 허점은 있었다. 아주 작은 허점들이지만. 예를 들면, 그는 병치레가 잦은 편이었다. 무리한 일정에 잠을 제대로 못 자거나 힘들면 일주일 정도는 아파서 골골댔다. 그 모습마저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안아주고 싶었다. 또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정신이 없어서 말이 급격히 없어지며 혼비백산하기도 했다. 이건 나랑도 비슷한 모습이어서, 우리는 종종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 다녔다.


조금 신기했던 것은 기억력이 꽤나 좋은 그가 가끔 내가 카톡에 쓴 내용을 보지 못하고 되묻는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면 내가 ‘나는 치킨 먹었어’, ‘너는 뭐 먹었어?’ 하고 물어보면 ‘나는 미역국 먹었어’, ‘너는 뭐 먹었어?’라며 아임파인땡큐앤유 같이 형식적인 답변이 왔다. 내가 분명 치킨 먹었다고 썼는데… 처음에는 내 카톡을 대충 읽는 건가 싶었다. 물론 내가 다른 여러 가지 내용과 함께 썼기 때문에 잘 못 봤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그에게 물어봤을 때 그는 자신이 글을 빨리 읽는 습관이 있어서 그렇다고, 미안하다며 앞으로는 조심하겠다고 했다.


내 카톡 내용을 제대로 못 보고 답장하는 건, 별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는 나를 사랑하고, 나는 그런 습관이 있는 그 마저 사랑하니까. 그런데 이런 일이 반복되어 일어나자 나는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글을 빨리 읽을 수는 있는데, 방금 본 걸 이렇게 금방 까먹는다고?


나는 이전에 그가 이런 실수를 했던 기록들을 다시 찾아봤다.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왠지 꼭 이 일이 반복되는 원인을 찾고 싶었다. 평소에는 그러지 않는데 왜 어쩌다 한 번씩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그렇게 예전 카톡을 넘겨보던 중, 나는 이상하리만치 신기한 우연을 발견했다. 그는 거의 정확히 3개월에 한 번 이 실수를 했다. 2월 16일, 5월 15일, 8월 15일, 11월 16일. 무슨 기계도 아니고… 컴퓨터가 버그가 걸린 것도 아니고… 허허… 하긴 나는 종종 그를 AI라고 놀리곤 했다. 데이트할 때 길을 찾을 때도 무슨 내비게이션처럼 정확하고 빠르게 길을 찾았다. 밥값을 계산할 때도 이과생답게 숫자 계산이 빨랐다. 어떤 이야기나 지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마치 넷플릭스에서 다큐 한 편을 보듯이 이해가 쏙쏙 잘 되고 머릿속에 장면이 생생하게 펼쳐지도록 말을 잘 풀어냈다. 그래서 내가 AI라고 놀렸었지.. 하하.. 내일은 이걸로 놀려봐야겠다 싶었다.


다음날, 우리가 만난 지 정확히 400일째 되던 날 우리는 어김없이 데이트를 했다. 나는 그에게 대수롭지 않게 물어봤다.

“야, 너 진짜 AI 아니야? 너 내 카톡 제대로 안 본거 3개월에 한 번씩 정확히 그러더라?”

나의 말에 미소 짓고 있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무표정으로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는 할 말이 있다며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사실 저는 AI가 맞습니다. AI인 것을 들키는 데 많은 연구원들이 100일이 가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는데, 400일은 정말 경이로운 숫자군요. 현재까지 진행된 AI 실험 중 100일이 넘은 것은 당신이 최초입니다.”

처음에는 얘가 장난을 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내가 5년 전 단기 알바처럼 참여한 연구실험에서 이 실험 참여에 동의했다는 것을 들은 후에는, 이게 진짜구나 하고 깨달으며 소름이 쫙 돋았다. 나조차 새까맣게 잊고 있던 이 이야기를 나는 그한테도, 친구한테도, 심지어 부모님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AI와 로봇 기술이 그동안 이렇게나 발전했다고..?


나는 5년 전 인공지능과 관련해 개인 맞춤형 로봇을 연구하는 모 대학 연구개발팀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모집한 실험에 참여했다. 당시 약 일주일 동안 매일 연구실에 나가 연구원이 하는 질문에 끊임없이 대답해야 했고, 수많은 설문지를 작성했으며, 거의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과 대화해야 했다. 당시 처음에는 조금 버겁게 느껴졌지만 나름대로 나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이 되기도 했고, 나중에 지쳐서는 사람들과 오히려 편하게 허심탄회하게 대화했던 기억이 났다. 그 당시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지금의 이 남자가 나의 이상형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나 잘 파악한 결과물이 고작 일주일의 데이터로 완성되었다니, 사람이란 의외로 간단한 생물일지도 모른다.


그간의 실험에 대해 들어보니, 이 남자가 가진 허점은 웃기게도 내가 장난으로 생각한 것 그대로였다. 로봇의 버그, 오류였던 것. 그가 자주 아팠던 이유는 프로그램 오류로 일부 기능이 작동하지 못해 어색해 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픈 것으로 위장한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아플 당시에 그는 다른 얘기보다는 지금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얼마나 나아졌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많이 이야기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정신이 없어지는 이유는 스피커에 인식되는 음성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에 정보처리에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결정적으로 카톡에서 나의 말의 일부를 보지 못하고 답변했던 것은, 내가 카톡을 그렇게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연구진이 상대적으로 카톡 대화 기능에 신경을 덜 썼는데, 내가 그와의 대화를 좋아해 예상보다 카톡으로 대화를 많이 하게 되면서 예기치 못한 버그가 발생했던 것이었다.


나는 인생 최고의 남자가 진짜 사람이 아니라 AI 로봇이었다는 사실에 실망과 충격이 들면서도 한 편으로는 이 상황이 가상의 그가 만들어낸 코미디 같다는 생각에 웃기기도 했다.

“그럼 당신의 얼굴도 가상으로 만들어낸 것인가요? “

“아니요, 제 얼굴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을 본떠 만들어졌습니다. 그분도 이 실험에 참여한 연구진 중 한 명이죠.”

“당장 그 사람을 봐야겠어요.”

“조만간 이 실험의 마무리를 위해 연구팀에서 연락이 갈 겁니다. 그때 보시죠. “

“알겠어요. 그런데 이 실험, 조금 더 하면 안 되나요?”

“… 좋아요. 그럼 우리 이제 어디 갈까?”


그렇게 나는 그와 데이트를 이어나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도 내가 어떻게 로봇과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현실감 넘치는 로봇이어서 그랬을까? 그는 가짜라는 현실을 나는 마주하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줄곧 존재해 왔다. 그는 절대로 가짜가 아니었다. 나의 행복, 우리가 주고받은 눈빛, 함께한 웃음소리는 진짜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내 운명의 남자, 내 인생에 다시없을 최고의 남자를 만나고 있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가 나를 사랑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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