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과 자유로움의 경계
혼자인 게 좋았다.
언제부터인지를 묻는다면, 태어날 때부터.
엄마가 기억하는 나는 다섯 살 때쯤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동생을 낳게 되면 엄마가 찌찌를 주는 거냐고
그 이후부터 단 한 번도 동생을 원한적도, 동생을 낳아달라고 한 적도 없는
엄마의 말을 빌리면 그야말로 독한 아이였다.
내 기억으로도 난 태어나 지금까지 동생이 한 번도 필요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혼자 자랐다.
혼자여서 외롭지 않았냐는 질문을 살면서 일천 번쯤 들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둘셋이면 안 외롭냐고 되물었다.
인생은 원래 혼자라는 걸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다.
사랑을 혼자 받는 게 좋았고, 다 내 것인 게 좋았다.
나는 사랑을 나눠 받는 느낌이 싫었다.
유난히 질투가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나보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게 싫었다.
그러면서도 자존심을 지켜야 하기에 그걸 밖으로 티 내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쓰며 살았다.
프라이버시에 매우 민감하다.
무엇을 공유해 사용해 본 적이 없기에 내 물건을 남이 건드리는 것이 싫었다.
내 껀 내꺼고 니 껀 니꺼다.
반대로 말하면 남의 것을 건드리거나 빌려달라거나 사용하는 것이 낯설어서 참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예민하다고 했고 까칠하다고 했다.
인정
예민하고 까칠하나 무례하지 않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동일하게 나한테 해주길 바랐다.
"혼자여서 저래"
이런 말이 듣기 싫어서, 나는 최대한 예의 바르게 행동했고
"혼자 자란 거 같지 않아"라는 말을 꽤 많이 들었지만 들을 때마다 이게 칭찬인 건지 아닌 건지 헛갈렸다.
지금의 환경은 그때와 많이 변했지만 80년대 생인 나는 자라는 동안에 공동체를 중시하는 것이 미덕이었고, 억지로 '함께'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소풍, 수학여행, 현장학습, 체육대회, 수련회. 이런 일련의 모든 것들이 나는 다 싫었다.
마음 맞는 친구들이 있는 해에는 그래도 버틸만했고, 그렇지 않은 해에는 귀찮고 번거로운 행사였다.
그냥 공부나 하지 이런 건 도대체 왜 시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억지로 따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왜 다들 즐거워하는 것 같아 보이는 이런 행사가 난 왜 싫은 것인가.
스무 살이 되고 대학에 가서 나는 너무 좋았다.
이런 행사들에 억지로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내 스스로 시간표를 짤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마음 맞는 친구를 선택해서 4년 내내 다닐 수 있다는 점이 너무도 좋았다.
억지로 해야 하는 이런 것들을 벗어나는 나는 친구들과 같이 하는 여행도 축제도 MT도 모두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난 그냥 '억지로' 시키는 모든 것들이 싫은 사람이었다.
공부는 혼자 하는 거야
독서실이나 학교 자습실이나 누가 보는 곳에서 공부하는 것이 싫었다.
공부는 한 만큼의 성과가 나왔다. 잘하면 잘하는 대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기에 자존감의 근원이었다. 지금도 많은 부모님들이 그렇겠지만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난 간섭받지 않는 자유를 얻기 위해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다. 마음먹으면 난 할 수 있어라는 정체성이 생겼다. 난 나를 믿을 수 있었고, 이 힘은 내가 살아가는 거의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공부를 하다 보니, 공부하는 것 자체에서 오는 쾌감이 생겼다. 새벽 4시 그 시큰한 공기아래 커피를 마시며 이어폰을 꽂고 god 음악을 듣고 있으면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누구에게 내 취향을 묻지 않을 자유
혼자 하는 쇼핑을 즐겼다. 친구끼리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쇼핑은 내 취향대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친구의 시선을 신경 써가며 물건을 고른다는 일이 두세 배의 피곤함을 나에게 더해주었다. 쇼핑자체가 목적이 아닌 경우에는 친구들과 놀러 쇼핑을 하기도 했지만, 물건을 사는 것이 목적인 경우에는 혼자가 훨씬 편했다. 여행도 그랬다. 이곳이 지금이 좋은지 물어보지 않을 자유가 있는 혼자 걷는 여행을 사랑했다.
혼자 낯선 도시 이곳저곳을 걸으면 내 속도에 맞춰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여행자들의 천국이라는 태국의 카오산로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 다는 바로 그 로마의 거리를 혼자 걸으면서 나는 날 만들어 갔다.
더 이상 혼자일 수 없는 순간을 지나고 있다.
그렇다고 비혼주의자나 독신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저 혼자 있는 걸 좋아했을 뿐 당연히 가정을 이루고 나처럼 외동아이를 낳아 단란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꿈이었다. 나처럼 홀로 있는 것도 가끔씩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고, 날 닮은 딸을 낳았다. 그 딸을 이제 어느 정도 키워냈을 즈음 남편과 딸아이는 내 인생에는 없었던 옵션인 동생이야기를 했다. 삼 년간의 대치? 끝에 나는 항복 아닌 항복을 했고, 마흔에 둘째를 낳았다. 그렇게 혼자서는 화장실도 갈 수 없는 시간을 다시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