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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Young Kim Dec 10. 2017

포기하지 않는 한 희망은 있다 - 천천히 꾸준히

송재희 (Staff Database Engineer @ Visa Inc)

나는 전자 공학을 전공했지만, 반도체 엔지니어가 아니라 데이터베이스 엔지니어이다. 잠시 전공을 살려 휴대폰을 개발하기도 했었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몇 년을 일했지만, 나의 대부분을 경력은 데이터와 데이터베이스에 관련했다. 나는 데이터를 좋아한다. 데이터를 잘 관리하고 잘 이해하고 또 데이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데 평생을 바쳤고 앞으로 계속 그런 삶을 살 것이다. 일 외에는 등산을 좋아하고 특히 남들이 위험하다고 걱정하는 암벽, 얼음, 빙하 등반 등 이런 것을 하고 다닌다. 또한, 시간이 날 때마다 블로그, 웨비나, 페이스북 페이지 등으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나누기를 좋아한다. 또한, 선교사로서 매주 주일 말씀을 전하고 학생들과 성경공부를 하면 제자 훈련을 하고 있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책을 읽는다. 미국 생활의 장점 중의 하나는 직장과 개인 생활의 균형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과 후에 개인 생활이 보장되고 자기 개발이나 취미 활동할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키포인트:

 -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았다. 긍정적으로 항상 가능성을 찾았고 노력했다.  필자도 여러번 인생의 위기가 있었다. 정말 몇 번 죽을뻔 했다가 살아 나기도 했고 다음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어려운 시기들이  있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고 긍정적으로 노력했다.

 - 도전 정신을 잊지 않았다. 해보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시도하다 실패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도전했다.

 - 호기심을 잃지 않고 항상 배웠다. 취업을 위한 공부, 먹고 살기 위한 공부 삶을 지치게 한다. 호기심으로 공부하고 몰랐던 것을 알고자 배우면 지치지 않고 즐겁게 살 수 있다. 꾸준히 이렇게 하다 보면 자신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것을 알 수 있다.

디달리 정상 - 빨간 옷을 사람이 필자다. 디달리는 복미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6, 160m) 매년 1000 여명이 시도하지만 정상 성공 률은 50% 정도 밖에 되지 않고 산악


전 한국에서의 커리어에 대해 간단히 요약한다면? (학력, 회사, 업무 종류)


석사 과정에서 인공지능을 공부했다. 1990초 였기에 그 당시는 생소한 학문이었고 군사 쪽이나 학문적 접근이 많았지 실제적 응용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공군 학사 장교로 40개월 근무하고 휴대폰을 개발하는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취직하여 휴대폰을 개발했다.


현재 미국에서의 커리어를 간단히 요약한다면? (회사, 업무종류)


2000년 미국에 와서 주니어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미국계 작은 회사에 입사했다 C#을 이용 중간 계층 응용 프로그램 개발하다 점점 데이터베이스 관련 일을 더 많이 하게 됐다., 회사가 성장하며 데이터베이스 관리와 개발을 전담하게 됐다. 1인 데이터베이스에서 팀의 규모가 커지고 비즈니스 정보 필요가 커짐에 따라 BI(Business Intelligence) 프로젝트를 하게 됐다. 8년의 기간의 기다림 후에 영주권을 받게 됐다. 


사내 정치로 더 이상 성장의 가능성을 못 느끼고 BI 개발자로 다른 회사로 옮겼다. 새로 옮긴 회사에서 막 BI 팀을 구성하고 활발하게 데이터 웨어하우스를 개발하는 중이었다. 여러 부서의 사람들을 만나 회의하며 비즈니스 요구를 수집하고 문서화 했다. 동시에 데이터 웨어하우스 서버 환경을 설계했고 구축했다. 데이터를 수집하고 검증하고 다양한 리포트를 만들었다. 이렇게 1년여 이상 열심히 노력했고 몇 몇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진행 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 정치 관계로 BI 프로젝트는 다른 부서로 넘어가게 되었고, 필자는 원치 않게 엔지니어링 부서 안에 커뮤니케이션 부서로 재배치 되었다. 


데이터 베이스 관련 일이 아닌 지식 관리(Knowledge Management) 관련 일을 3년 정도 하였다. 지식 관련일을 하며 내가 아는 지식을 잘 정리하고 다른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알게 됐고 여러가지 지식 관리 기술들을 익히게 됐다. 다시 데이터베이스 엔지니어링 부서로 배치됐고 이제 데이터베이스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현재 하는 일은 NoSQL, NewSQL, 빅 데이터 등 새로운 데이터베이스를 평가하고, 표준화하고 자동화하는 일을 하고 있다. 


회사내 다른 부서에서 새로운 데이터베이스나 기존 데이터베이스에 새로운 기능을 사용하고자 하면 우선 우리 부서에게 연락한다.  데이터베이스 회사와 사용을 원하는 부서와 회의를 하며 테스트 케이스를 만들고 서버를 구축한다. 테스트 항목에 맞춰 시험을 하게 된다. 동시에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여러 가지 표준화 문서를 만들게 된다. 이 표준화 문서는 앞으로  회사 내에서 그 데이터 베이스를 사용하는 기준이 된다. 표준화 문서는 데이터베이스 설계, 설치, 구성뿐만 아니라 보안, 모니터링, 경보 그리고 장애 발생 시 대처 등 다각적인 면이 포함되고 실제 운영시 참고 문서가 된다. 이것이 끝나면 자동화 작업이 들어가고 회사 내 클라우드와 통합시킨다. 


이렇게 때문에 항상 새로운 기술을 빠른 시간에 습득하여 전문가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어렴움이 있다.  그렇지만 일을 지루하지 않고 다양한 데이터베이스,  다양한 기술들을 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시애틀 IT 종사자 모임인 창발 개발자 그룹에서 NoSQL에 관한 발표를 하고 있는 필자


미국으로 오게 된 계기는?


대학에 입학 후 선교단체에 가입에서 활동해 왔다. 항상 선교사로 외국에 나가고자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회사내 정치로 우리 팀의 입지가 위태하게 됐고  휴대폰 개발자로서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1년 반정도 있다가 회사를 그만 두게됐다. 그리고 바로 캐나다 이민 신청을 했다. 이민 신청후 영어도 배우고 직장을 얻고자 혼자 캐나다로 향했다. 영주권 빠르게 진행이 되어 약 6개월 만에 이민 비자를 받고 가족들이 캐나다로 합류했다. 


영주권이 없기 때문에 직장을 잡을 수 도 없었고 한국에서 가져간 돈도 몇 달 만에 바닥이 나 한국에 있는 부모님께 생활비를 지원받아야 했다.  빠르게 진행되던 영주권은 내가 영주권이 나오기전에 먼저 왔다는 이유로 소속이 늦어 졌다. 늦어도 1년안에 영주권 획득할 것이라 기대했는데 진전이 없었다. 생활비는 없고 취업도 할수 없고 영주권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정말 피 말리는 하루 하루 였다. 


방문 비자가 만료되어 비자 연장을 하려 미국 시애틀로 나왔다 캐나다 재입국 하는데 1년간 캐나다 입국 거부 판정을 받았다. 이유는 내가 캐나다에 불법체류 했다는 것이었다. 6개월 전에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 미국에 왔었는데 실수로 캐나다로 들어가며 이민국에서 입국 도장을 찍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자 갱신이 되지 않은채 나도 모르게 6개월 동안 불법체류 했던 것이었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가족들은 다 캐나다에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할수 없이 다시 시애틀 지인의 집으로 돌아 갔고 선교사로 파송 받았던 한국의 본 교회에 전화했다. LA에 있는 교회 다른 지부로 일단 가서 상황을 보자는 조언을 받았다. LA에 있는 교회로 갔다. 다음날 교회의 한 선교사가 매니저로 있는 회사에 가서 면접을 봤다. 영어도 부족하고 프로그래밍 실력도 부족한데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취업이 됐다. 그 당시 그 회사는 몇 달 전에 화교계인 분이 CTO로 왔는데 이 분이 자기가 편한 Microsoft 계열 개발자들을 뽑기 위해 Java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을 해고해서 많은 포지션인 오픈된 상태였다. 그리고 지인 매니저의 추천에 한참 부족하지만 뽑아 주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미국에서 취업은 말도 안 되게 쉽게 되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속담을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이를 통해 배운 것은 인적 네트워크 형성의 중요성이었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선교 기관은 100여 국에 자비량 선교사를 파송했다. 전 세계 웬 만한 주요 도시들 필자가 속한 선교 기관의 선교사들이 있다는 얘기다.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 시애틀왔을때도 도움을 받았다. LA에서 직장을 잡고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자비량 선교사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움을 받기 위해 남을 돕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 말씀처럼 남(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돕다 보면 내가 어려울때 심지어 모르는 곳으로 부터 도움이 오는 것을 많이 체험하였다.   


미국 취업까지 어떤 준비를 어느 기간 동안 했나?


캐나다에 있을 때 하드웨어 엔지니어로는 취업을 하기 힘들다는 판단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공부하게 됐다. MS SQL 7.0 공부하여 MS SQL 자격증을 획득했다. 이 당시 특히 MS SQL서버는 초창기 때문에 전문가도 별로 없었다. 또 MS SQL를 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컴퓨터 공학 배경이 없더라도 충분히 IT쪽에 취업 가능하겠다는 판단 하에 자격증을 준비하며 틈틈히 집에서 실무를 읽혔다. 이런 노력으로 컴퓨터를 전공하지 않았지만 데이터베이스 엔지니어로 미국에 정착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좋아하고 취업이 가능한 분야를 택하여 꾸준히 준비하는 것이다. 현재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수요가 많다. 데이터 과학자 수요도 많다. 데이터베이스 자체 기술은 점점 수요가 줄어드는 느낌이다. 데이터베이스를 하더라도 관계형은 기본이고 비 관계형 데이터베이스에 대해 알아야 하고, 한 두개의 컴퓨터 언어를 알고 프로그래밍을 해야 한다. 클라우드 데이터베이스들도 눈여겨 봐야 한다. 4차 혁명으로 대변되는 급변하는 기술들로 말미암아 앞으로 5년이나 10년 뒤 직업 구도를 예상하기 힘든 건 사실이지만 반면 많은 것들이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비슷한 선상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본인에게 맞는 기술을 시기적절하게 선택하여 노력한다면 취업이 예상외로 쉬울 수도 있다.  


취업 후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힘들었던 부분은 의사소통이었다. 성격이 소극적인 편인데 언어 문제도 있었기 때문에 회의나 공식 석상에서 필자 의견을 분명하게 전달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특히 미국 문화. "If you don't ask, you don't get" 인식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미국에서는 자기 것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 회사에 바로 입사해서 영주권을 스폰서 해달라고 할 때까지 약 일 년을 기다렸다. 적절한 시기를 놓쳐 영주권 받는데 까지 약 8년 걸렸다. 그리고 3년이 지나 어렵게 임금 인상 요청을 했다. 임금 인상이나 진급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내가 현재 직급과 임금에 만족하는 줄 알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또한, 회사 내 예산이 있기 때문에 임금 인상도 그 예산안에서 할당하게 된다. 업무 성과가 비슷하다면 당연히 말 많은 사람에게 더 가게 마련이다. 당당하게 내 성과를 말하고 성과 만큼 요구하는 것을 당연하다.  


고산 등반이라는 쉽지 않은 취미를 가지고 있는데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고,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나?


캐나다에서 영주권 문제로 고생하고 다행히 미국에 와서 친구의 도움으로 쉽게 취업하여 이민 생활의 큰 벽을 하나 넘었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선교 활동, 외국에서의 첫 직장 생활, 그리고 어린아이들, 할 일이 많았고 시간은 없었다. 이렇게 정신 없이 약 5년을 지내니 몸이 말이 아니었다. 언어 문제, 문화 차이,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만성 피로에 시달렸고, 시간만 되면 졸기 일쑤 였다. 집중력도 떨어졌고 일 능률도 오르지 않았다. 한 번은 최고 기술 책임자(CTO)와 미팅 중 졸다가 해고 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근처 산에 간 적이 있다. 높지 않은 산이었는데 죽을 만큼 힘들었다. 그러나 기분은 괜찮았다. 이걸 계기로 조금씩 산에 다니기 시작했다. 몸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고 머리도 상쾌해졌고 일 능률이 올랐다. 운동을 통해 체력과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주 토요일은 산에 가고 있다. 문제는 시간이 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충분한 운동이 될 수 있도록 점점 어려운 고산 산행을 하게 됐다. 이렇게 캘리포니아에 있는 웬만한 산들은 다 등반한 것 같다.


영주권을 받고 산이 많은 워싱턴 주 시애틀로 이사했다. 워싱턴 주에는 레이니어산이 있다. 이 산은 4, 392미터 높이로 워싱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위싱턴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매일 이 산을 바라 본다고 보면 된다. 미국 본토에서 가장 넓은 빙하를 자랑하고 여름에도 스키를 탈 정도로 연중 빙하와 눈으로 덮여있다. 시애틀로 와서 먼저 이 산 정상을 오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 산 정상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빙하를 여행할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 가파른 얼음에서 미끄러졌을 때 멈추는 법, 빙하 뜸에 빠졌을 때 빠져 나오는 법, 동료가 빠졌을 때 구하는 법. 


또한, 여름이라도 눈을 동반한 강풍이 불면 온도는 사정없이 영하로 내려간다. 여태까지 한 등산하고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혼자 등반할 수 없기에 같이 등반할 사람을 구해봤지만 빙하 등반 경험이 없는 나와 등반하겠다는 사람을 구했지 못했다. 그래서 상업등반에 백만 원이 넘든 돈을 주고 훈련 받고 정상 등반 시도를 했다. 그러나 6월 말인데 눈사태 위험으로 정상을 오르지 못했다. 포기할 수 없어 인터넷에 다시 동반자 구하는 포스트를 올렸다. 다행히 보스턴에 있는 젊은 친구가 같이 가자고 했다. 이렇게 한 달 후에 레이니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레이니어 정상 - 왼쪽이 필자

운동을 꾸준히 하기 위해 스스로, 동기를 주기 위해 다음 목표가 필요했다. 그래서 북미에서 제일 높은 데날리를 택했다. 이 산은 레이니어와는 또 다른 차원의 산이다. 높이(6, 144M)가 너 높을 뿐 아니라 훨씬 북쪽에 있기 때문에 추위도 장난이 아니다. 필자가 자정에 정상에 올랐을 때 온도가 영하 40도 정도 됐다. 콧물이 다 얼 었을 정도였다. 등반가 중에서는 에베레스트 정상보다 힘들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목표가 세워졌으니 일 년 전부터 준비했다. 인터넷으로 팀을 구성했다. 캘리포니아에서 3명, 콜로라도에서 1명, 그리고 워싱턴에서 나, 1명등 다섯 명이 한 팀이 됐다. 팀이 구성됐으니 이제 훈련에 들어갔다. 빙하 등반의 기술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고산, 극심한 날씨를 위한 장비 구매를 했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체력이었다. 체력을 기르기 위해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산을 뛰었다. 다행히 집 근처에 산이 있다. 평일에는 8Km 뛰었고 시간이 좀 있을 때는 20km까지 뛰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주에 두 번 이상 꾸준히 뛰었다. 그리고 매주 두 번 이상 암벽등반을 했다. 토요일에는 산에 가서 실제 훈련을 했다. 몸이 힘들고 귀찮을 때도 지금 훈련 여부에 따라  성공과 실패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명까지 살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훈련했다. 이런 훈련으로 데날리 정상에 본격적으로 빙하는 등반 시작한 지 2년 만에 오를 수 있었다. 


고산 등반을 하면 기획, 훈련, 인내, 극기, 겸손, 협동(Teamwork)등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무엇 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강과 체력을 얻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직하려는 사람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은?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미국에서 일을 하고 있는 여러 작가분들과 인터뷰를 하며 느낀 것 중의 하나는 "미국으로 이직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길이 많다." 였다. 필자가 미국에 왔을 때는 언제든지 H1-B 비자를 신청할 수 있었다. 그래서 9월에 미국에 왔는데 친구의 도움으로 바로 취직하고 H1-B 비자를 진행했다. 그러나 지금은 지원자가 많아 신청 접수 첫날부터 H1-B Quota를 쉽게 넘긴다. 즉 자격 조건이 충분하더라도 비자를 못 받을 확률이 30% 이상이 된다. 그래서 상당수의 회사의 H1-B 후원을 꺼리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미국으로 왔고 또 취직에 성공했고 또 열심히 커리어 개발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싶다는 뜻이 있다면 현실이 아무리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포기하지 말기를 당부하고 싶다. 포기하지 않고 여러 가지로 도전해 본다면 길이 열릴 것이다. 그렇다고 막연한 꿈만 가져서는 부족하다. 꿈을 가지고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영어를 물론이고 전공 실력으로 내공을 쌓고, 틈나는 대로 네트워킹에 힘쓰자. 외국인으로서 미국 기업에 취업하는데 여러 가지 불리한 점이 많음을 인지하고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포트폴리오를 꾸준히 준비하자. 많은 작가분들이 블로그나 웨비나, 책, 논문 등 여려가지 방법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있다. 필자도 틈만 있으면 배우고 경험한 것들을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서 나누고 있다. 이런 노력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된다.


 1) 자기가 배운 것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고 나중에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필자의 경우 거의 모든 종류의 NoSQL을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MongoDB를 한참 하고 있는데 Noe4j에 대한 문의가 들어올 때도 있고 Hadoop에서 작업해야 할 때도 있다. 예고 없이 질문하거나 요청이 들어 오면 상세한 기술적 문제들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미 그때그때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찾아서 참고할 수 있다.


   2) 웨비나를 하고, 블러그를 쓰고 세미나를 하면서 나 또한 배우는 것이 많다. 또한 남에게 알기 쉽게 설명할수 있으려면 내가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한다. 깊고 폭넓게 공부할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한다. 


  3)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홍보할 수 있다. 내 실력을 증명해 보일 좋은 기회다. 포트폴리오는 디자인 관련 분야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요즘은 소프트웨어 개발, 데이터베이스 쪽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필자가 운영하는 NoSQL Page

관련 자료

NoSQL Korea: https://www.facebook.com/nosqlkorea 

개인 사진 앨범: https://jsong.smugmug.com/ 

작가 인터뷰: https://tinyurl.com/ybmuupf2



본 글은 창발출판에서 준비중인 '우린 이렇게 왔다'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프로젝트 홈페이지를 참조하시거나, 페이스북 혹은 이메일로도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프로젝트에 더 관심이 있으신 분께서는 다음 링크에서 프로젝트를 후원하시고 저자들과의 웨비나 및 다양한 혜택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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