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_(3) 사회적 가면에서 탈출하기
내 방에서 목격한 인형극의 ‘여우 안대’는 일종의 개인적인 실제 감정이나 행동들이 가려질 수 있는 탈이나 가면의 역할이었다.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기 위해서 사용될 때가 많을 뿐,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거나 속이려고 쓰는 가면이 아니므로, 이러한 ‘여우 안대 탈’이 사회적으로는 꼭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다. 단지, 중간중간에 가끔씩 탈을 벗고서 숨을 쉬어줘야 하는데 그 탈을 너무 오랫동안 쓰고 있으면, 나중에는 진짜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로 갑갑해질 수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을 위해서는 가능한 자주 그 가면을 벗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다.
평소에 여유 시간이 많을 때는 편한 친구들을 만나거나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그만큼 더 자주 여우 안대 탈을 벗을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분주한 삶에 치일 때는 그럴 수가 없어서, 개인용 탈을 쓰고 벗는 것이 선택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계속 감정적인 가면을 쓴 채로 살아갈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적인 가면의 수준을 넘어서서, 어떤 사회적인 역할이나 직업적인 성격 때문에 더 어쩔 수 없이 더 의무감으로 자주 써야만 하는 가면이 있다. 이런 ‘사회적 가면’이야말로 ‘페르소나’라고 불리는 것이 적절하지 않나 싶다. (‘페르소나’란,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한다.)
물론 나의 작은 ‘여우 안대’ 또한 페르소나의 일종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떤 역할에 따른 가면이라기보다는 나의 실질적인 감정이나 좋지 않은 면을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사용하는 개인적인 수단을 의미했던 것이지만, ‘페르소나’는 일반적으로 어떤 그룹이나 사회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따라서, 적절하게 본래의 자아를 변형시켜야 할 때 자주 사용되는 듯하다.
특히 최근에는 젊은 세대들의 특성 중 하나이자 현시대의 트렌드로서, 이 ‘페르소나’라는 용어가 종종 사용되어 왔다. 더구나 이들은 주어진 어떤 역할들에 의해서 나타내야 하는 페르소나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만의 개성과 주체성으로 각종 SNS 및 모임 활동을 통하여 여러 가지의 페르소나를 적극적으로 선택하여 활용하는 세대로서 긍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런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페르소나의 유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한창 유행하던 ‘본캐’와 ‘부캐’ 캐릭터 놀이일 것이다. 다양한 캐릭터를 살리고 다재다능한 재능들을 표출함으로써 자신들의 카멜레온 같은 성향과 잠재력을 더 발휘할 수 있게 해 주므로, 이러한 ‘페르소나 현상?’은 개인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발전 측면에서도 꽤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페르소나’ 현상을 과연 이렇게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생각보다 많은 현상들이 그렇듯이, 페르소나 또한 ‘동전의 양면성’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매우 긍정적인 면들이 많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캐릭터만으로는 안정감 있게 살기가 힘들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페르소나를 가지고 싶어서 그런 삶을 선택하는 것이라면 매우 좋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게 맞겠지만, 반대로 내가 원치 않아도 많은 페르소나를 동시에 가져야지만 간신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라면 이는 일종의 ‘시대적 슬픔’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예전처럼 직장이나 직업 자체의 수명이 길지가 않고 안정적이지 않다. 수많은 단기 계약직도 판을 치는 마당이라서 직장이나 업무가 변동될 때마다 매번 다른 페르소나를 써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같은 직장 내의 같은 직책에서도 다른 페르소나를 써야 할 때가 많다. 회사 내부에서의 역할이나 위치가 외부에서의 역할과 크게 다를 때도 많고, 일관성 있는 업무만 전문적으로 하는 것보다는 수시로 변동되는 업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시대이다. 그때마다 각기 다른 페르소나를 뒤집어써야 하는 것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버린 세상 같기도 하다.
이는 곧, 종종 자신의 ‘정체성 혼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와 같은 초자연적이고도 근원적인 의문점에 휩싸여서 내부적인 카오스와 소용돌이치는 자아를 종종 마주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즉, 살기 위해서 버둥거리느라 어쩔 수 없는 생존 전략이나 수단으로써 페르소나를 써야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성세대들은 요즘의 이런 세대들을 신기해하고 흥미로운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저 그들만의 재미있고 개성적인 트렌드로서, 주관 있는 젊은이들의 성향으로만 간주하는 것 같다. 나도 이제는 젊은 세대라고 할 수 없는 애매한 세대로 들어섰지만, 그런 시선들이 한편으로는 너무 속 편해 보여서 그 괴리감으로부터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가슴 한쪽을 살짝 시리게 만들 때가 있다. 그건 과연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이러한 ‘시대적인 슬픈 가면’인 페르소나 또한 우리가 셀프 여행을 통해서 진짜로 벗어버려야만 하는 가면 아닐까? 여우 안대 탈처럼, ‘페르소나’가 이렇게 또 하나 추가가 된다. 진정한 자아로 복귀하기 위해서 잠시 동안이라도 제거해야 하는 것 말이다. 내가 만약에 혹시라도 자전적인 소설을? 쓰게 된다면, 이런 페르소나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엄청 쏟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들은 은근히 웃픈 스토리들이라서 ‘슬픈 코미디’들의 잔치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서 굳이 일일이 밝히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분명한 것 하나는, 웃픈 코미디 장면들을 찍어대느라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써야만 했던 나로서는, 그만큼 셀프 여행의 효과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어떠한 페르소나도 뒤집어쓰지 않은 상태, 그럴 필요도 없는 상태에서, 나의 본연의 진짜 자아로 회귀한 느낌이었다.
물론 여러 페르소나 속에서 나의 다양한 역량을 표출하는 직장인으로서의 자아도 나에게는 소중했지만, 셀프 여행 중에서 만나는 나의 진정한 자아로 돌아간 느낌은 또 다른 충만함을 내게 안겨주었다. 페르소나 속의 자아도 셀프 여행 중의 자아도 모두 다 우리에게 중요하다. 하지만 평소에 너무 페르소나 안에서만 갇혀서 살다 보면 진정한 나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셀프 여행 등을 통하여 나의 진짜 자아로 돌아가는 그 순간의 느낌을 잊지 않고 종종 챙겨주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