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_너 자신의 모습이 너한테는 보이니?!
요 며칠 안개가 너무 자욱하다. 드디어 정동진 주변 산책 좀 해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그동안 여기서 푹 쉬었으니 드디어 이제 슬슬 주변 여행 좀 해보려고 마음먹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날씨가 받쳐주지를 않네.
이런.. 어휴. 근데 가만 보자.. 여기 정동진에 온 지가 언제였지? 순간적으로, 언제 왔었는지 잠시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꽤나 오래된 것 같았다. 사는 게 바쁘다 보면 이런 행운도 참 쉽지 않은 편인데, 여기 와서 그동안 나는 숙소 앞의 바다와 카페만 왔다 갔다 하면서 진짜 휴식만 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혼자 오는 여행은 주로 쉬는 게 목적인지라 후회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장기간의 시간은 너무 귀한 만큼 그저 휴식만 하고 가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단 며칠이라도 주변 여행을 조용히 하면서 바람을 쐬고 싶었다.
그것도 오늘 하루만 그런 게 아니라 벌써 삼사일 정도 되어간다. 이 작은 마을 정동진을 살짝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 안개’ 정도가 아니라, 며칠 눌러 있으려고 방문한 ‘여행자의 자태’ 같아 보이네. 내가 푹 쉬려고 여기에 마음먹고 온 것처럼 말이지. 적정 수준의 충분한 휴식 차원을 넘어서서 거의 동굴 속에서 수양을 하듯이, 나도 안개 너처럼 한 곳에서만 너무 오랫동안 고운 자태를 유지했던 건가? 나는 원래 그렇게 한 곳에서만 얌전히 곱게 있는 스타일이 아닌데, 내가 봐도 참 용하다는 생각이 드네. 진짜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그래서 셀프 연마하며 버텼던 나에게 수고했다고 위로해 주러, 이렇게 안개 너가 그윽하게 다가온 거니? 마치 그동안 동굴 안에서 마늘만 먹으면서 버티던 곰이, 드디어 인간으로 승화하는 그 순간을 축복해 주러 온 것처럼? 가만, 이거 단군 신화 스토리 아닌가?
근데 나는 그동안 여기서 마늘이 아니라, 순두부만 먹으면서 버텼는데? 여기는 거의 순두부가 장악을 하고 있어서 말이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어서 그런 거니깐, 그렇게 장하게 봐주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무슨 진짜로 마늘 순두부만 먹으면서 버틴 것도 아니고?^^
암튼 고마워 안개야. 갑자기 여행을 시작하려는데 안개 너가 들이닥쳐서 처음에는 조금 속상했는데, 가만 보니깐 너도 은근히 나를 닮은 것 같아서 위안이 조금 되는 것 같네. 내가 예전에 보던 안개들은 그날 하루만 쓱 나타나거나 길어야 하루 이틀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만 봤던 기억이 나는데, 이번처럼 안개를 며칠 연속으로 길게 보는 건 거의 처음인 것 같아.
혹시 너도 지금의 나처럼 긴 휴식이 필요할 정도로 지쳐있었니?
그래서 이렇게 한 곳에 좀 오래 머물고 있는 거야? 그러면 더 있다 가렴...
너의 그 지쳐있는 고단함이 증발되어 날아갈 때까지 좀 더 쉬었다 가렴.
나도 여기서 그렇게 쉬어봤는데 꽤 괜찮아. 은근 많이 회복된 거 같아. 안개야 너도 좀 더 쉬어가.
나도 여기서 이렇게 뭉개면서 잘 쉬어 놓고서는, 괜히 너 때문에 파란 하늘과 바다가 보이지 않아서 여행하기 쉽지 않을까 봐 원망할 뻔했네.
그러고 보니깐, 너랑 또 닮아 보이는 게 있다.
안개 너랑... 안개 너한테 완전히 둘러싸여 있어서 거의 보이지 않는 저 바다...
너희들이랑 내가 또 닮은 게 하나 더 있네. 지금의 내 모습이랑 왜 이렇게 비슷해 보이지?
그거 위로해 주러 왔구나? 그래도 걱정 말라고?
안개 너처럼 뿌옇게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동굴 수양 기간을 거쳤으니깐, 이제는 나도 동굴 속의 곰이 아니라 진짜 사람처럼 살 수 있을 거라고 응원해 주러 왔어? 오... 뭐야. ‘단군 신화’를 진짜로 ‘단군 실화’로 만들어 주려고? 마음만으로도 고맙네.
실은 나는 곰이 싫지는 않은데, 솔직히 곰의 우직함과 견고함도 좋은데 말이야.
솔직히 곰보다는 인간이 더 살기 좋은 게 맞잖아. 더구나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야 제 맛이거든.
여기서는 동굴 속 곰처럼 웅크리면서 잘 쉬었으니깐, 이제는 밖의 세상에서 좀 더 인간처럼 생기 나게 살 수 있게 해 줘. 곰은 그렇게 막 생기 있는 거 같지는 않아. 겨울잠만 많이 자고 뭔가 한 곳에서만 진짜로 수양하듯이 있는 거 같잖아. 쉴 때는 그게 좋은데, 살 때는 좀 더 사는 거답게 살아야 좋은 거지. 나는 이제 여기 평화로운 정동진을 조금 여행하다가 며칠 후면 떠나는 만큼, 그때부터는 동굴 속 수양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더 인간답게 잘 살 수 있도록 그렇게 힘이 날 수 있게 해 줘! 알았지?
아. 맞다. 아까 내가 왜. 너랑 내가 비슷해 보인다고 했는지 알아?
지금 갑자기 너한테 문득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지금 너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있니?
너는 지금 너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니?
너는 너의 정체성을 알고 있니?
안개 너뿐만 아니라,
안개 너한테 둘러싸여서 거의 보이지 않는 바다한테는 더 물어보고 싶어.
너희들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자신의 불투명한 그런 모습이 갑갑하지 않니?
항상 뭔가 가슴속에 돌덩이가 콱 막혀 있어서 답답한 느낌이 들지는 않고?
아니면, 그 단계는 지났는데 뭔가 하늘의 흐린 구름다리 위에 어정쩡하게 걸쳐있는 느낌은 아니고?
아주 개운한 기분으로 잘 살고 있니? 아니지?
내가 너희들 기분을 너무 잘 알아. 아이고, 정말 도사 나섰어.
너가 지쳐서 여기 정동진에 그렇게 뭉개고 있는 거 보니깐, 너도 좀 그런 거 같은데 내가 위로 하나 해줄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어. 나도 그 답은 모르거든. 그런데 너처럼 그런 똑같은 심정을 느끼는 생명체가 여기 하나 더 있다는 걸 알면, 너도 조금은 더 위안받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나 또한 그렇거든. 하루 이틀이 아니야. 꽤나 오래됐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항상 열심히 살았던 거 같기는 해. 어차피 계속 안개 속이라면, 괜히 그리 열심히 살아서 오히려 배신감이 들 정도로 말이야.
그래도 이렇게 잘만 살아왔다는 거야. 그래도 말이지. 잘 살다가도 말이지...
어느 날 문득문득 너무나 야속해질 때가 있어. 나는 왜. 나 자신의 모습조차도 하나 제대로 못 보고, 볼 수 없는가... 나에게는 왜 나 자신의 모습 하나조차도 오픈되어 있지 않은가... 내가 나의 주인 아니던가?? 그런데 말이야. 지금 너희들 모습을 보니깐, 나랑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네.
끝없이 저 멀리 망망대해로 아주 멋있게 흘러가고 있는데, 그렇게 안개한테 둘러싸여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너의 모습이 보이기는 하니?? 호수처럼 고이면 안 되는 게 숙명인지라, 그렇게 끝없이 언제나 흘러가야만 하는 것이 너의 숙명인지라, 그렇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아주 멋지게 파도치면서 거대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너는 항상 흘러가고 있지만...
그렇게 안개에 둘러싸인 바다 너는 정작 갑갑하니 않으니? 너가 흘러가고는 있지만 도저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보이지가 않잖아. 차라리 호수로 태어났더라면 흘러가지 않아도 되니깐, 너의 방향성을 모르더라도 그렇게 괴롭지가 않았을지도 모를 텐데 말이야.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면,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되니깐 얼마나 속 편해. 고찰할 필요도 없고.
굉장히 분위기 있고 신비스러워서, 미지의 세상처럼 두려움 반 설렘 반처럼 그렇게 보이는 거 알고 있니? 바다가 아주 멋들어지게 웅장해 보여서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주는 것처럼, 너의 겉모습이 되게 몽환적이고 신비스러운 건 알고 있니?
그런데 말이지, 저렇게 안갯속에 둘러싸여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바다처럼 혹시 안개 너도 자신의 모습을 너조차도 볼 수가 없어서, 막상 너는 항상 답답한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니니? 안갯속의 바다는 자신의 모습뿐만 아니라 자기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방향도 보이지가 않을 거 아니야. 그렇게 사람들이 아무리 너희들을 아주 멋지고 좋게 봐주면 뭐 해... 너희들 스스로는 너희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는 존재들인데...ㅠ
안개라는 타고난 특성 때문에, 즉 자신의 온몸을 둘러대고 있어서 미스터리하게 멋져 보이는 안개 너 스스로의 모습 덕분에, 오히려 안개와 그 속에 있는 바다 너희들은 정작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가 없어. 그게 얼마나 슬픈 숙명인지 알고 있지? 내가 말이지, 나는 인간인데 말이지. 너희들 그 기분을 너무 잘 안단다. 정말 도사 나섰나. 큭. 아니. 인간 중에서도 나라는 인간만 그런 건가?
아니면 우리 인간들 중에서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그러는 편인데 다들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차서, 그런 내재된 슬픔을 인식조차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 자체가 숙명이라면, 진짜로 너무너무 슬플 것 같아. 그렇지?
근데 말이지... 안개 너는 혹시 모르지. 너는 그냥 타고난 게 안개일지라도, 너 자체는 너 자신의 모습을 볼 수도 있으려나? 만약 그런 거라면 부러울 듯하네. 그리고 안갯속 바다도 언젠가는 안개가 걷히면 자신의 모습을 볼 수도 있겠지? 그런데 만약 평생을 그렇게 ‘안갯속 바다’처럼 살아야 하는 게 숙명이라면 얼마나 서글플까? 그래서 나는, 너희들이라도 언젠가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존재가 됐으면 좋겠다.
안개 너가 차라리 다른 사람한테는 잘 보이지 않을지언정, 너 자신만큼은 너를 잘 바라볼 수 있어서 너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의미인지 잘 알 수 있게 된다면 좋겠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갯속의 바다 너도 항상 그렇게 안개한테 둘러싸이는 게 너의 고정된 평생의 삶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언젠가는 꼭 그 안개가 걷히고 바다답게 너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존재인지, 그렇게 너 자신의 방향과 의미를 너 스스로가 꼭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게 바로, 내가 지금 나 자신한테도 너무나 바라고 있는 소망 사항이거든. 나도 지금까지 항상 뭔가 분주하게 달려왔는데도, 안갯속 바다 너처럼 어디론가 계속 흘러가고는 있는데 도통 앞이 보이지가 않아서, 내가 영문도 모른 채 그냥 흘러가고... 또 흘러가고... 이렇게 살아온 삶의 연속이었던 것 같네.
그래서 나는 그렇게 가슴속이 어딘가 모르게 참 안개처럼 뿌옇게 느껴지고, 안갯속의 바다 공기처럼 공허하게 느껴질 때마다 나 혼자만의 여행을 한 번씩 가끔 시도해 본단다. 지금 이렇게 정동진에 와 있는 것처럼 말이지. 그냥 오로지 즐거움과 행복감만을 위한 그런 여행이라면 지인들이나 가족들과 함께 떠나왔겠지?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면 꼭 이렇게, 안개와 그 안의 바다 너처럼 내 모습이 유독 보이지 않을 때가 있어. 그럴 때면 은근히 너무 속상해. 나는 항상 열심히 바쁘게 살아온 것 같은데, 왜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 방향조차도 볼 수가 없고, 내가 누구인지 나에 대한 자아의 모습과 정체성을 떠올릴 수가 없는지.
그게 너무 가끔씩 꽤나 슬퍼질 때가 있어. 평소에는 그냥 분주하게 살다 보니깐 그런 게 가끔씩 느껴져도 깊이 생각할 겨를과 여유도 없어서 그저 답답한 심정이려니 하고 애써 가볍게 인식하고 있다가도, 갑자기 어느 순간에는 그렇게 누적되어 있던 것들이 내면 깊은 곳에서 한꺼번에 몰려오는 때가 가끔씩 있어.
그럴 때는 지금 안개 너랑 그 속에 숨어있는 바다를 바라보는 기분이 든단다.
처음에는 그저 ‘앞이 안 보여서 답답하네...’ 이 정도의 심정이었다가도... 가만히 너희를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어딘가 모르게 잔잔한 슬픔이 쌓여서 올라오는 지금 이 심정을 닮아있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내가 너희들한테 위안이 될지 모르겠다고 한 거야. 너희들만 앞이 보이지 않아서 가슴이 답답한 게 아니라고. 나도 그래서 여기 왔는걸. 나도 지금은 너희들의 동지 같네.
그러면 그 답답한 가슴속이 조금은 뚫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면 그 공허한 가슴속이 조금은 채워지지 않을까 싶어서. 지금 안개 바다 너한테서 이렇게 위로받으면서 그 공허함을 조금은 달래고 채워가듯이 말이야.
그리고 그거 아니? 너희하고 비슷한 애가 또 있다. 국내라도 일부러 비행기를 타고 싶어서 제주로 갈 때가 있는데 그게 무슨 어린애들처럼 ‘와, 비행기다!’라면서 무조건 그걸 타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비행기를 타는 동안 그 창밖의 풍경에서 나는 또 너무 위로 아닌 위로를 받을 때가 있거든. 그래서 거의 항상 일부러 창가 쪽 자리를 잡는단다. 하늘 높이 올라가면서 비행을 할 때면 창밖에는 하얀 뭉게구름들이 넘실넘실 거리거든. 그 장면이 참 진짜로 하늘나라의 천국으로 올라온 것처럼 그 또한 신비하게 아름다운데, 너희들의 신비함과는 또 살짝 다른 느낌이야. 알지? 너희들은 회색빛의 몽환적인 신비로움이라면 그 비행기 창밖 구름 속 세상의 신비로움은 마치 공중을 떠다니는 신선이나 천사가 된 듯한 그런 화사한 신비로움이라고 할까?
그런데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분위기의 장면에서, 안개 바다 너한테서 느끼는 것과 아주 유사한 감정을 느낄 때가 많다! 신기하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내가 말이야, 나 홀로 여행을 갈 때는 유독 나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과 답답함, 카오스가 뒤섞여 있을 때, 그걸 어느 정도 해소하거나 정리하고 싶어서 떠날 때가 많다고 그랬지? 그래서 그런가, 그렇게 나 혼자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창밖을 바라볼 때면 말이야, 안갯속 바다 너가 위로가 되어주듯이 그 장면에서도 너무나 위안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 비행기도 너를 은근 많이 닮았어. 바다 너가 멋지게 망망대해를 흘러가듯이, 비행기도 아주 멋지게 하늘을 날고 있지. 그런데 구름이 뭉게뭉게 많은 하늘 속을 날고 있어서 그 앞이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야. 가끔 비행기한테도 물어보고 싶다니깐.
너는 그렇게 날고 있지만, 어디로 날아가고 있는지 보이니? 알고 있니?
그냥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 눈감고 한 방향으로만 쭉 날고 있는 건 아니고?
그렇게 나 홀로 여행을 떠나는 그 순간의 내 심정을 너무나 그대로 대변해서 보여주듯이, 높은 하늘을 열심히 멋지게 날고 있는 그 비행기처럼 나도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는데 저 구름들로 인해서 앞이 보이지 않는 그런 길을 걸어온 건가 싶을 때가 있어. 지금은 비록 저렇게 뭉게구름들로 가려져 있어서 내 앞의 방향이 전혀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이 멋진 비행기처럼 열심히 살고 있는 거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그렇게 스스로 위안을 하는 거지.
그러면서 언젠가는 저 많은 뭉게구름들도 다 걷히고 맑은 하늘만이 좍 펼쳐져서, 내가 어디로 날고 있는지 내 방향을 볼 수 있는 비행기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동시에 애써 가져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지거든. 비록 구름 속에 잔뜩 가려진 그 하늘 길이 현재의 내 앞에 놓여있는 길과 닮아있는 장면 같아서 순간적으로는 좀 슬프지만 그래도 위로를 받게 되고, 비록 앞이 보이지는 않아도 그렇게 멋들어지게 날고 있는 비행기처럼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더 멋지게 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동시에 희망도 가져보게 된단다.
큭. 어때? 안개야. 바다야. 너희들도 좀 위로가 되는 거 같니?
언젠가는 너희들도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방향을 제대로 볼 수 있기를 바래. 그렇게 되면 너희들 자신이 스스로를 느끼는 그 의미와 정체성도 찾을 수 있게 될 거야. 비록 지금은 나도 그런 상태가 아니지만 이렇게 나 혼자 떠나온 여행에서 너희들한테 그 답답한 속내를 털어내고, 가슴속에 박혀있던 돌덩이를 떼어내듯이 그렇게 다시 살아나고 있잖아. 그런 갑갑함이 조금 털어지면 나의 존재와 의미를 잘 몰라서 혼란스러웠거나 공허했던 가슴 속도, 여행 중에서 만나는 자연이나 힐링들을 통해서 또다시 조금은 채워질 수가 있어.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분명 너무 흐릿했던 내 정체성과 나라는 사람에 대한 모습과 의미가 다시 조금은 더 모양새가 잡히는 기분이 들거든. 뭔가 살짝 더 충전이 되는 거지. 정체성 충전. 어쩌면 말이야 정체성이 아예 없던 게 아니라, 우리가 분주한 삶에 치여서 그나마 조금은 알고 있던 정체성마저도 배터리가 거의 소진되어서 깜박거리는 위기에 있었던 건지도 모르거든.
차라리 그런 거면 이런 셀프 여행 충전 등을 통해서 다시 살려내면 되는 거야. 비록 아주 작은 정체성이었을지라도 아예 잃는 것보다는 낫거든. 만약 진짜로 이미 잃어버린 거라면 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하는 수고가 필요해서 더 많이 힘들 수는 있어. 그래도 우리는 그런 정체성과 자아 의미 충전들로 인해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고.
아무튼, 안개야 미안해. 안갯속 바다야 미안해. 만약 너희도 이런 내 심정과 비슷하다면 아마 여기 이곳 정동진에 와서 푹 쉬는 동안에, 보이지 않는 너희 자신의 모습과 정체성을 찾고 싶었는지도 모를 텐데. 내가 괜한 투정을 부릴 뻔했구나. 내가 그동안의 동굴 생활을 벗어나서 빨리 여행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너희들의 가슴속에 감춰져 있는 진짜 고민과 아픔과 슬픔을 알아주지 못할 뻔했네. 그냥 여기 온 김에, 계속 더 푹 쉬고 가렴. 뭉게구름을 닮은 안개답게 그냥 뭉개고 있어! 너희의 고통과 괴로움을 느껴본 나로서는, 대환영이야.
기왕 이렇게 너희들이 놀러 온 김에 나도 어디 멀리 갈 생각은 하지 말고, 우선 이 근처의 가장 가까운 곳부터 둘러봐야겠다. 그거 알아? 여기 정동진역이 꽤나 분위기 있는 거? 그런데 안개 너까지 찾아왔으니, 그 분위기가 엄청 더 느낌 있을 것 같은데? 나 오늘은, 거기부터 슬슬 걸어봐야겠어. 로컬 동네 마실 산책이야말로, 정말 특색 있고 의미 있는 여행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지. 이제 그 얘기부터 슬슬 들려줄 건데, 혹시 안개랑 바다 너희들도 궁금하면 한번 따라와 봐! 고고씽. ^^
-마종기-
내가 채워주지 못한 것을
당신은 어디서 구해 빈터를 채우는가
내가 덮어주지 못한 곳을
당신은 어떻게 탄탄히 메워
떨리는 오한을 이겨내는가
헤매며 한정 없이 찾고 있는 것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 곳에 있기에
당신은 돌아눕고 돌아눕고 하는가
어느 날쯤 불안한 당신 속에 들어가
늪 깊이 숨은 것을 찾아 주고 싶다.
밤새 조용히 신음하는 어깨여,
시고 매운 세월이 얼마나 길었으면
약 바르지 못한 온몸의 피멍을
이불만 덮은 채로 참아 내는가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 새벽 침상,
아무리 인연의 끈이 질기다 해도
어차피 서로를 다 채워줄 수는 없는 것
아는지, 빈 가슴 감춘 채 멀리 떠나며
수십 년의 밤을 불러 꿈꾸는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