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단계]_나의 첫 번째 Self 여행_(기차역)
이야... 예상은 좀 했지만, 역시나 안개의 흔적이 드리워진 정동진역은 더욱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뭐랄까, 원래의 정동진역도 그곳 특유의 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는 편인데, 마치 그 원본 그림에 붓 터치 효과를 살짝 입혀서 훨씬 더 그 기차역만의 시그니처 분위기가 흘러나오고 있는 느낌이었다.
(오.. 진짜 시그니처 커피 이름으로 괜찮은데?^^)
이것은 어쩌면 운이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행운의 순간이 아닐까? 어제 봤던 밤바다처럼 안개가 너무 자욱해서 앞으로 이동해야지만 간신히 볼 수 있는 몇 발자국 앞의 공간들을, 걸어 나가면서 겨우 이어 붙이고 확장해야 하는 그런 짙은 안개는 아니었다. 덕분에 정동진역만의 고풍스러운 느낌에 안개까지 적당히 더해져서 더욱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나의 여행길을 가로막는 ‘장애 요소’처럼 느껴졌던 안개가, 지금은 여행을 더욱 특별하게 감상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분위기 메이커’처럼 보이는구나. 역시 이런 시선의 차이는 단지 종이 한 장 차이처럼 간단한 시도의 변화 같지만, 그게 의외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큰 차이를 가져올 때가 있다. 그러고 보니 정동진을 좋아해서 지금까지 종종 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안개가 드리워진 모습을 본적은 거의 없던 것 같다.
여기 이곳에 처음 왔을 때의 기억이 참, 생생한 듯하면서도... 막상 기억하려고 하면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지 또, 구체적으로는 떠오르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때 너무 좋았다는 거다. 그때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아주 세세한 과정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도, 큼직한 장면 몇 개 위주로는 기억이 나는데 그 순간의 느낌만큼은 아주 생생하게 남아있는 듯하다.
‘어떤 사건’에 대한 기억이라기보다는,
‘어떤 느낌’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그냥 너무 좋았다는 것... 그 자체다.
뭔가, 흔치 않은 느낌이었다는 것...
그 순간순간이 매우 소중하게 느껴졌다는 것...
그런 느낌에 대한 기억은 참 아직도 생생하다.
너무 좋았던 그 느낌 때문인지 여유 나면 조만간 꼭 다시 혼자서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사는 게 뭐가 그리 바쁜지, 그 이후로 혼자 다시 돌아온 게 거의 8년 만인 것 같다. 그때부터는 신기하게도 매년 한 번씩 3년 연속으로 찾아오고 있다. 마치, 그동안 오지 못했던 한이라도 풀어내듯이 말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겠다던 그 약속을 더 굳게 지키려는 듯이 말이다.
그 혼자만의 약속이 벌써 거의 10년 전의 일이네. 지금은 연속 3년 차에 해당하는 정동진 방문객으로 있지만 말이다. 말이 3년이지... 작년 이맘때쯤 봄에 왔었고 그 직전의 겨울에 왔었으니깐, 실질적으로는 1년 반 정도의 기간에 세 번이나 이곳 정동진에 왔던 거네. 뭐가 그리 좋았던 거니...? 아니, 뭐가 그리 힘들었던 거니...?라고 물어봐야 하는 걸까?
그 십 년 전에 처음으로 혼자 떠나왔던 그때도... 그 이후로 오랜만에 찾아왔던 연속 3년 차의 기간에도... 그리고 이렇게 장기간을 묵고 있는 이번에도... 나는 여기 정동진에서 안개를 봤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만큼 여기서 안개 풍경은 쉽게 볼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내가 안개 낀 날만 유독 피해서 왔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지. 아무튼, 안개가 피어오른 정동진의 전경을 보고 있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그만큼 귀한 장면을 보고 있는 나는 어쩌면 행운아인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동굴 생활 하느라 수고했다고 격려라도 해주는 듯이, 이렇게 ‘안개 세리머니’까지 해주다니. 그래서 더 운치가 느껴지는 이 분위기가 참 좋다.
그런데 이런 안개들이 차츰 걷혀서 사라진다고 해도, 원래의 오리지널 정동진역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고유한 분위기가 있다. 겉으로만 얼핏 볼 때는 평범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은근히 느껴지는 정동진역만의 특별한 정취가 있다. 그래서 그런가 여기는 어째, 오면 올수록 보면 볼수록 더 좋아지는지 모르겠다. 참, 신기한 녀석이다. 보통은 자주 볼수록 식상해지는 편인데 말이지. 그래서 한번 갔던 곳은 나중에 한참 있다가 다시 오거나, 굳이 다시 오지 않고 또 다른 새로운 곳으로 가려고 하는 게, 보통의 현상이자 보통의 사람들이 많이 취하는 방식 아니던가? 나 또한 그런 편이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는 연속 3년을 와도 질리지가 않는다. 아니, 일 년 반 동안 연달아 와도 말이다. 더구나 아주 가까운 주변 반경에는 거의 바다만 있을 뿐인지라, 다른 볼거리를 위해서는 좀 더 이동을 해야 한다. 그만큼 여기 이 동네 자체는 참 조촐하게 소박한 편인데도 자꾸 오게 된다는 거다. 뭐가 그리 좋아서 여기를 또 오게 되었던 걸까?
그중 하나는 단연코... 나는 바로, 정동진의 이 역사(기차역)라고 생각한다. 물론 바다도 너무 좋아한다. 그런데 어떤 바다에서 특히 더 느껴지는 그곳만의 운치가 있다면, 나는 이 정동진역에서도 그런 자연의 운치 비슷한 것을 느낀다는 거다. 보통은 자연 풍경이 함께 하는 특정한 장소에서나 운치가 느껴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이렇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작은 기차역 건물이나 기찻길에서도 그런 고고한 운치가 느껴지는 것이 은근 신기했다.
물론 기찻길은 그 주변의 자연에 조금 영향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그냥 기차역과 기찻길 자체만의 분위기와 정취가 있다. 뭐라고 말로 표현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그들만의 형체와 아우라 자체에서 묘하게 은은한 매력이 풍겨져 나오는데, 그것들이 전체적으로 함께 어우러져서 정동진역만의 특별한 운치를 뿜어내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런데 오늘처럼 안개나 이슬비 같은 것이 동반되거나, 조금 어둑어둑해져서 노을이 반쯤 접어드는 순간에는 더욱더 그런 느낌이 완전 최고조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진으로는 안개가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런 분위기를 사진들을 통해서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나는 개인적으로 이 기찻길 풍경을 너무 좋아한다. 어딘가 모르게, 영화에 한 번쯤 나올법한 그런 우수에 찬 듯한 그윽한 분위기가 있다.
저 신호등 몇 개가 주변 나무와 하늘을 배경으로 곧게 서있는 기찻길 모습 자체만으로도 예스러운 빈티지 분위기가 우러나와서, 뭔가 사연 있는 세월로 거슬러 올라간 듯한 과거의 시간을 나타내주는 아련한 사랑 얘기의 배경에 참 잘 어울릴 것 같은 그 감성에 취할 수도 있다. 바로 옆의 바다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는, 잔잔한 배경 음악처럼 아주 좋은 음향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한 분위기 하는 기차역 주변에는 이와 어울리는 조각상들과 감상하기 좋은 시 몇 편이 곳곳에 있다. 기차역에서 내리면 바다가 바로 보이는데, 그 바다와 기차역 사이에 몇 개의 조각상들이 반갑게 맞이해주고 있다. 그 조각상들 중에는 시가 새겨져 있는 비석들도 있고 정동진에 대한 설명 문구도 우리를 같이 반겨준다. 기차역에서 내리는 순간 ‘아, 여기가 정동진이구나. 드디어 정동진에 왔구나’라는 것을 잔잔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특색 있는 조각상들과 시 문구들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늘어서 있다.
그렇게 바다를 한번 슬쩍 바라봐준 후에 기차역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해 뜨는 시각이 표시되어 있는 포토존도 예쁘게 꾸며져 있는 게 보이고, 역사로 연결되는 작은 외부 복도에는 강릉문인협회의 시 몇 편과 정동진 관련 사진들이 양쪽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냥 쓱 지나치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나중에라도 한번 자세히 살펴보면 은근히 느낌 있는 사진들과 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기차가 전혀 지나가지 않는 상태에서도, 이런 기찻길 풍경 자체만으로 괜히 내 마음이 살짝 들뜨면서 평화로워지는 기분이 든다. 이러는 와중에 중간에 기차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그제 서야, ‘아, 여기가 풍경화 그림이 아니라, 기차역이었지.’ 하면서 또 다른 장면으로 의식이 옮겨가게 되는 느낌이다.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이야말로 정동진역을 그냥 장식용 관광 건물이 아닌 진짜 기차역으로서 더욱 ‘정동진역’ 답게 만들어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기차들을 보면 그 종류와 외형들도 여러 가지로 각양각색이라서, 기차역이나 근처 카페에서 여러 형태의 기차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일반 열차, 바다 열차, 산타 열차, 화물 열차 등등 참 다양한 기차들이 지나간다.
이런 정동진역을 더욱 살아있는 풍경화처럼 만들어주고 있는 주변의 나무들이 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이 멋진 소나무들이라는 사실과, 그중에서도 하나는 한때 완전 스타급이었다는 얘기를 얼핏 전해 들었다. 그동안은 무심히 지나치곤 해서 몰랐는데, 오늘은 좀 더 세심히 둘러보았더니 그 소나무가 어디 있는 건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모래시계 나무’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래시계’는 당시에(1995년) 정말 인기 절정이었던 드라마였지만, 너무 오래전이라서 내 기억에 남아있는 내용은 거의 없다.
다만 이 소나무의 존재에 대해서 알려주었던 동네 주민의 얘기로는, 그 드라마의 여주인공이었던 고현정이 경찰한테 붙잡혀 가는 장면에서 이 나무가 배경으로 등장하여 유명해졌다고 한다. 그 장면의 내용적 상황이 궁금해서 잠깐 찾아보니깐, 그녀가 경찰에게 쫓기던 상황에서 정동진으로 잠시 피신했던 기간에 그 소나무 근처에서 붙잡혀 가는 장면인 것 같았다. 갑자기 그 드라마 전체를 나중에 제대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전체 줄거리를 아직 자세히는 몰라도, 단지 여주인공이 숨기 위해서 왔었던 곳이 바로 여기 ‘정동진’이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 순간 짠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가끔은 복잡하고 분주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그 현실에 쫓기는 나 자신을 숨기고 싶어서 여기 정동진에 올 때가 있기 때문이다. 딱, 지금처럼 말이지. 그런데 그런 현실에 다시 붙잡혀가는 여주인공 뒤에서 저 소나무가 배경이 되었다고 하니깐, 왠지 저 나무는 그런 사람들의 뒷모습을 잘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묵묵히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현실에 붙잡혀서 다시 돌아가야만 하는 기차를 타고 떠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뒷모습도 보았을 테니 말이다. 그만큼 여기 정동진으로 떠나온 사람들의 심정을 잘 알고 보듬어주는 안식처가 되어주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나무가 위안이 되어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나 보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저 소나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동네 산책을 나선 이유도 컸기 때문이다. 저 나무 옆에 있으면 왠지 나도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중에 이 드라마 전체를 한번 봐야겠다. 그때는 또 어떤 다른 느낌으로, 이 소나무를 다시 바라볼 수 있을지 궁금해서 말이다. 지금의 나는 그저 다른 건 모르겠지만, 그 장면 줄거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이 소나무가 따스하게 든든해 보여서 살포시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