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단계]_나의 첫 번째 Self 여행_(밤카페)
최초의 ‘셀프 여행’으로 밤기차를 타고 정동진에 내리자마자 밤바다를 혼자서 보던 그 순간에는, 정말 뭔가에 홀린 듯이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느라 처음에는 주변의 어둠으로 인한 두려움도 거의 못 느꼈던 거 같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도 점차 흩어지고 갑자기 조용해진 주변을 돌아보게 된 순간, 어두컴컴한 새벽 공기와 함께 이성을 되찾으면서 ‘내가 이곳에 아예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을 퍼뜩 깨달았다.
즉 주변에 뭐가 있는지, 이 동네 길은 어떠한지, 전혀 한 번도 직접 둘러본 적이 없었던 데다가 해돋이 시간도 아직 더 많이 기다려야 했다. 아마도 기차가 그곳에 도착했던 시간이 새벽 3~4시 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눈앞에 바로 보이는 바다 쪽은 분명 바닷길일 테니, 그 반대 방향으로 뒤를 돌아서 육지 쪽으로 기찻길 하나를 건너가 보았다.
혹시나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의 공터가 나타날까 봐 잠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극도로 조마조마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이 시커먼 어둠 속에서 일출 시간까지 거의 두세 시간을, 혹시라도 귀신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공포감으로 극기 훈련처럼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버텨야만 했기 때문이다. 아, 그러면 괜히 난생처음 나 홀로 오는 여행지를 하필이면 새벽 밤중으로 잡았던 나 자신을 엄청나게 자책했겠지.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이냐면서 말이다. 그냥 고생도 아니고 오밤중의 쌩고생 추억을 만들 뻔했으니깐 말이지.
친구랑 같이 왔을 때처럼 주변의 천막이나 불빛이 보였던 기억이 많지는 않은 걸 보면, 그때는 혼자라서 거의 동선의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더구나 무슨 블로그나 지도 같은 사전 정보도 거의 찾아보지 않은 상태였던 것 같다. 아마 출발 전까지 고민하다가 갑자기 무작정 가서 그랬던 건지. 셀프 여행은 처음인지라 그냥 별다른 생각 없이 무방비 상태로 떠나기만 했던 건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때 그 시절에는 그런 블로그 활성화 시절이 아니었나? 내가 그렇게 구석기시대에 살았던 건 아닐 텐데 왜 굳이 그런 무방비 상태로 갔던 건진 모르겠다. 근데 다행히도 주변 정보를 찾기 전에 무언가 보이는 것 같았다.
너무나 다행히도 기찻길 그 건너편으로 조금 걸어가자, 바로 눈에 들어오던 희망의 불빛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붉은빛으로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분명 인공적인 빨간 불이었는데, 마치 그 어둠 속으로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한 태양의 불빛처럼 말이다. 그 직전까지 아주 잠깐이었지만 밀도는 꽤나 높았던 그 불안감과 두려움을, 순식간에 싹 날려주는 구원의 불빛이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더욱 그렇게 느낀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주 정열적으로 붉게 타오르던 그 카페의 지붕 불빛은, 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떠있는 ‘빨간 스트로베리문(Strawberry Moon)’처럼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외관적으로 너무 예뻐서 내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총총걸음으로 그 카페 앞에 도착하여, 약간의 호기심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밤하늘을 전부 독차지하던 이글이글 불타는 불빛의 외관 모습과는 달리, 안에는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들로 가득했고 평온함 그 자체였다. 전체 2층으로 구성된 내부는 통나무 같은 나무 재질로 되어 있었고 의자는 푹신푹신한 쿠션이 있는 넓은 소파 형태들이었다. 현대식의 브랜드 커피숍 분위기라기보다는, 곳곳에 아날로그적 감성이 물씬 풍기는 아늑한 분위기의 카페였다.
음료를 주문하고 이층으로 올라가 보니 높은 천장의 삼각 지붕부터 아래의 일층까지 한눈에 전체가 훤하게 내려다 보여서 더욱 멋스러운 하나의 공간처럼 보였고, 창문은 시원스러운 통유리라서 낮에는 전망이 더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층의 여러 나무 테이블들 중에서도 조용해 보이는 살짝 외진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자리에 내 몸을 내팽개치듯 털썩 푹 눌러앉는 순간 소파 쿠션의 부드러운 푹신함이, 마치 나의 보금자리처럼 느껴지던 것은 그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그때까지 쌓여있던 온몸의 피곤함과 긴장감이 한 번에 스르륵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거기다가 흘러나오는 음악도 대중가요가 아니라 올드 팝송 같은 느낌의 멜로디가 잔잔하게 울려 퍼지고 있어서,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너무나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워낙 늦은 밤 시간이라서 더 분위기 있게 느껴진 것도 있었겠지만, 그런 기본적인 세팅 자체가 서로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전체적으로 아주 따스하게 포근한 느낌이 우러나오고 있었다. 거기다 그 카페만의 더욱 돋보이던 특성들이 몇 개 더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북 카페(Book Cafe)'처럼 내부 여기저기에 좋은 책들이 잔뜩 꽂혀 있던 모습이다. 그리고 직접 쓸 수 있는 방명록도 있었고, 예전의 방명록까지 모두 소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읽을거리와 쓸거리까지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환경들까지 더해져서, 더욱 그 카페만의 특유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내 자리 근처에도 책들이 많이 꽂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제목이나 표지 디자인이 끌리는 것들을 몇 개 집어 들었다. 주로 여행객들이 오는 카페라서 그런지 마음 관련 에세이나 감성적인 시집들이 더 많이 보였던 것 같다. 특히, 은은한 조명 불빛 아래에서 좋은 문구들의 책을 읽어서 그런가, 그 조명빨? 덕분에 더욱 풍성해지는 감성에 취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분명히 알코올 흡수를 한 것은 아니었는데 술에 취한 것보다 오히려 더 취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은, 정말로 그 조명빨에 취해서 더욱 몽환적인 느낌이 들었던 걸까? 기차에서 마신 맥주 한 캔이 갑자기 역으로 그제야 취기가 뒤늦게 올라왔던 걸까? 방명록을 몇 자 적으면서 오랜만에 마주하던 나의 진짜 감정이 애잔해서 더 취한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걸까? 그 정답은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뭔가에 취한 것처럼 오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확실했다. 그 카페의 분위기에 취했든 간에, 나의 내면의 진짜 모습을 아주 오랜만에 마주하게 되어서 그 감격에 취했든 간에, 그 조명이 너무 아련해서 슬픈 감성에 취했든 간에, 알코올 한 방울의 도움 없이도 그렇게 나 스스로의 감정만으로도 듬뿍 취할 수 있었던 나 자신이 신기했다.
아, 어쩌면 조금이라도 무언가 읽고 쓰면서 나 자신의 본연의 감정을 직접 마주하고 챙겨주게 되니깐, 그렇게 나도 모르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낀 건지도 모르겠구나. 뚜껑이 꽉 막혀있던 어떤 감정적인 분출구가 살짝 열리는 기분이 들었고, 그렇게 조금이나마 어딘가 쌓여서 묵혀있던 나의 소중한 감정이 조금은 해소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고체 덩어리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음 덩어리의 감정이 사르르 녹아서 액체로 되어버리고, 그중 또 일부는 기체로 증발되어 날아가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고 해야 하나. 진작 내보내서 없애야 했던 그런 찌꺼기 같은 묵은 고체가, 그제야 자연스러운 정화 과정을 거쳐서 감정적인 승화를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저 조금 읽고 조금 썼을 뿐인데 말이다. 아주 평화로운 분위기로 인해 나의 내면 여행에 깊이 빠져서 심취할 수 있었던 그런 장소였으니깐 가능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무슨 책을 읽었는지 거의 생각이 나지 않지만, 딱 하나의 단어는 기억에 남는 게 있다.
그 단어에 무슨 위로를 어떻게 받았던 것일까. 그 단어 하나만큼은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거 보면 말이다. 그때도 나의 방향과 정체성이 명확히 보이지 않아서, 그 달팽이한테 감정 이입을 했던 것일까? 역시나 난 그때도 매우 열심히 살고는 있었지만 나 자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나의 방향도 보이지 않아서 멈춰있는 듯한 그 갑갑한 심정 때문에, 저렇게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달팽이가 마치 내 모습을 닮아보였을지도 모른다. 저 달팽이도 얼핏 쳐다보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본인 스스로는 나름대로 엄청나게 열심히 달리고 있지 않은가.
‘근데 너는 방향을 알고서 움직이고 있는 거니? 나는 전혀 모른 채로 달리고만 있어서 그런지, 아무리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봐도 달팽이 너처럼 항상 정체되어 있는 기분이야. 달팽이 너도 열심히 기어가고 있는데, 항상 제 자리에 있는 것 같은 너 자신이 얼마나 스스로 답답할까? 나도 주어진 자리에서 그저 ‘제 자리 뛰기’만 죽도록 하고 있는 기분이거든. 어떤 투명 유리에 갇혀서 아무리 달려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는 것처럼 말이야. ‘투명 유리통’인 줄 진작 알았다면, 차라리 그렇게 달리지나 말걸 그랬나 봐. 어디로 달려 나가야 할지 그 방향이 보이지 않으니깐, 그냥 제 자리에서 뛸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도 그런 기분이니?’
암튼, 참 웃긴다. 십 년 전의 카페에서도 달팽이 너랑 그런 교감을 했을 줄이야. 며칠 전에 내가 안개랑 교감했던 것처럼 말이지. 아, 이제는 그런 종류의 교감은 그만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야. 그래도 달팽이와 안개, 너희들과 교감하거나 소통하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거나, 너희들 같은 연결 고리를 통해서라도 내 감정을 분출할 수 있는 정화의 과정은 참 소중한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그때의 밤(night) 카페 같은 장소들이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어. 근데 이제는 그런 밤 카페는 없어졌네. 밤기차가 사라진 덕분에 말이야. 그래도 이런 카페 같은 공간이 사라지지 않고 꼭 유지됐으면 좋겠다. 비록 밤에는 더 이상 운영하지 않더라도, ‘마음의 쉼터’ 같은 공간들이 낮에라도 여전히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첫 셀프 여행 때 갔었던 저 카페가 너무 좋았던 기억인지라, 이번 여행 때도 빨간 글자의 지붕이 있었던 그 똑같은 카페를 가보았다. 여전히 내부 공간은 포근하고 아늑했다. 방명록도 그대로였다. 다만 밤중에 방문했던 그때처럼 내부 인테리어 불빛들은 켜져 있지 않은 대낮이라서, 예전만큼 그 분위기가 한껏 우러나오지는 않았지만 통유리로 볼 수 있는 바다 전망은 더욱 멋져 보였다. 제일 아쉬웠던 점은, 이제는 더 이상 북카페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일층에 몇몇의 잡지와 기본 서적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때처럼 전체적으로 주변이 따스한 책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의 밤 카페를 떠올리면서 편안한 쿠션에 기대어 앉아, 통유리를 통해 보이는 커다란 바다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안개 친구까지 함께 하고 있네. ‘와, 그래도 역시나 너무 좋다. 지금의 이 모습도 참 좋구나...’ 예전의 밤 카페를 다시 볼 수 없어서 아쉬운 마음도 물론 있었지만 그런 마음은 잠시 묻어둔 채로, 현재의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는 여기 이 카페의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한 행복감과 만족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 동네 근처 카페를 가는 것도 좋아하지만, 이렇게 여행길에 들리는 카페는 또 다른 맛이 느껴진다. 물론 더 아름답거나 독특한 분위기가 더 느껴져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런 외적인 미의 차원을 떠나서 심리적인 측면에서도 더욱 크게 영향을 끼칠 때가 종종 있다.
혼자 오게 되는 ‘셀프 여행’에서는 특히 더, 이런 ‘카페 스테이(Cafe Stay)' 시간이 그저 단순한 구경 차원을 훨씬 더 넘어서게 될 때가 많다. 내가 그때의 밤 카페에서 어떤 감정을 배출하고 정화하는 그런 과정을 느꼈던 것처럼, 여행 중에 만나는 카페에서 보내는 혼자만의 시간이나 창밖 오션뷰(Ocean View)를 보면서 바다와 동화되는 시간들은 그런 ‘감정적인 정화’의 시간이 되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료계 이슈 중 하나로 ‘간호법’에서 많이 들리던 ‘돌봄’ 말이다. 간호법의 개선 요구 사항들 중 하나가 바로, ‘돌봄 서비스’를 간호사들이 맡을 수 있게 해 달라는 내용인 것 같았다. 특히 고령화 시대에 빠르게 진입하고 있는 만큼, 부모들을 위한 돌봄을 간호사들이 할 수 있도록 ‘부모 돌봄 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 같다. 간호법에 대한 내용은 자세히 몰라도, 이제는 더욱 ‘돌봄’ 서비스의 수요가 높아질 것 같다는 예측은 아마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병원에 병상 수가 부족할 때가 많아서 응급환자도 다 수용하지 못할 때가 있는데, 그저 ‘돌봄’만을 위한 환자들까지 모두 다 장기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병원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런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인의 아버지가 큰 사고를 당했을 때 병원 치료 덕분에 큰 위기는 넘겼지만, 그 이후의 지속적인 관리와 진료가 필요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병원에 있을 수는 없어서 요양 병원이나 다른 기관으로 가야만 했다는 그런 얘기 말이다. 그만큼 이런 현상들이 앞으로는 고령화로 인해서 더욱 증가할 텐데 적절한 대책이 필요해 보이기는 한다. 그게 반드시 간호법을 통해서 하는 게 제일 최상의 방법인 건지, 또 다른 방법들도 있는 것인지는, 내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해결책이 필요할 것 같기는 하다.
이렇게 커다란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환자의 치료는 병원에서 담당하지만 ‘그 이후의 돌봄’ 같은 관리는 병원 밖에서 따로 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사전적인 돌봄’ 같은 관리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응급 상황으로서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할 정도로 중증이거나 병원까지 가서 치료해야 할 정도로 증상이 많이 진전된 것은 아닐지라도, 분명히 평소의 평균적인 상태와는 달라졌기 때문에 ‘돌봄 케어’가 필요한 단계인 사람들도 많을 수가 있다. 즉 이런 사람들은 ‘사후적 돌봄(After-Care)'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이와 반대로 일종의 ‘사전적 돌봄(Before-Care)’이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찌 보면 병원에 입원해야만 하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두터운 집단 층일 것이다. 지금 당장 막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긴급 상태’는 아니지만, 경미한 감기나 열감 정도의 ‘주의 상태’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럴 때는 뭐 입원까지 필요한 상태는 아니라서, 그저 약국에서 구입한 감기약을 먹고 집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혹은 병원에 한 번쯤 방문해서 처방약 잘 챙겨 먹고 푹 쉬게 되면 대다수는 많이들 회복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런 과정들이 몸이 아플 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마음의 감기’처럼 마음 또한 살짝 몸살이 날 때도 의외로 별반 다르지 않고 꽤나 비슷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감기 걸린 몸 상태처럼 경미한 열감이 있는 ‘감기 기운’ 정도로만 마음 상태가 울적하거나 답답한 경우라면, ‘카페 스테이’만 제대로 해도 ‘마음의 감기약’을 먹은 것처럼 회복이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당장은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럽거나 심리적 응급 처치가 필요한 것처럼 마음이 너무 아프게 느껴질지라도, 무조건 다른 방법들부터 무리하거나 도움을 받기 전에 우선은 이런 ‘카페 스테이(Cafe Stay)’ 같은 시간을 혼자 차분히 가져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병원에 가야만 할 정도로 중증까지는 아니라면, 이렇게 ‘사전적 자기 돌봄(Before Self-Care)’의 시간만으로도 회복되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이다. 감기 몸살 초기에는 푹 쉬고 난 후에 나아지는 것과 같다. 물론 이런 시간을 가진 후에도 마음이 절대 회복되지 않거나 더 심해진다면, 그때는 혼자서 감당하는 게 너무 힘든 것이므로 심리 상담이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더 좋겠지만 말이다.
다만 이런 ‘카페 스테이’ 같은 ‘사전적 자기 돌봄(Before Self-Care)’을 시도해보지 않는다면, 자신의 마음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무조건 온갖 미디어나 각양각색의 이론만 맹목적으로 추구하면서, 그런 내용이나 원리에만 자신을 끼워 맞추거나 자신의 상태를 미리 단정 짓는 것은 자칫하면 더 위험할 수가 있다. 내 삶에 도움이 되도록 참조할만한 조언으로서 바라보는 것은 좋지만, 뭐든지 매몰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럴 경우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인데도 엄격한 잣대에 따라서 자신을 스스로 비정상이거나 나약한 존재로서 아픈 사람으로만 취급할 수도 있다. (그렇게 치면, 우리 모두는 항상 아픈 사람이다! 어머, 그럼 우리 모두 청춘?^^ 아프니깐 청춘이라던데? 늙어도 아프다;;)
반대로 현재 꽤나 마음이 아프거나 과도한 스트레스가 쌓인 사람인데도 스스로 잘 인지를 못한 채 무조건 괜찮다고, 애써 마음을 다잡으면서 억누르고 참기만 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그렇게 치면, 우리 모두는 절대 아프지 않은 기계 로봇이다! 어머, 그럼 우리 모두 마징가 제트?^^ 지구를 구하겠네? 그대는 누가 구하나;;)
하지만 우리 인간은 모두, 완벽할 수도 없는 존재이고 한 가지 성향만 가진 사람은 더욱 없다. 다양한 특성들을 각기 다른 비율로 가지고 있을 뿐이다. 어떤 좋지 못한 성향들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각각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그 차이라서, 그런 성향들은 차츰 줄이기 위해서 노력할 수 있다면 그게 바람직한 것이다. 반대로 어떤 좋은 성향들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 또한, 항상 굳건하게 유지되는 게 쉽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그것들을 가능한 잃지 않도록 보존하려고 애쓰는 게 중요하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타고난 기본 성향 자체는 어느 정도 주어진 것이겠지만, 자신의 마음 상태는 고정적인 게 아니라 거의 항상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그만큼 더 자주 세심히 체크해줘야 할 필요성이 높은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직접 여러 종류의 ‘자기 돌봄(Self-Care)’ 시간을 사전에 미리 가져보면서 스스로 먼저 중심을 잡고 판단해 보는 게 제일 좋다. 그저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기분 변화이거나 감성이 잠깐 피어오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마음이 다쳤거나 아픈 상태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진짜로 그런 거라면, 어느 정도로 아픈 건지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냥 약하게 지나가는 ‘마음의 감기’ 초기 상태인지, 심하게 앓고 있는 ‘마음의 독감’인지 말이다. 어쩌면 그런 마음의 작은 감기 정도가 아니라, 더 크게 다쳐버린 마음의 부상인지도 모른다.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랑 살짝만 부딪혀도 생길 수 있는 스크래치 같은 ‘마음의 상처’ 자국이거나, 무언가에 오랫동안 혹은 순간적으로 세게 짓눌려서 생겨버린 ‘마음의 멍’ 일 수도 있는 것이다. 더 심하게는 어떤 사건이나 사람이 내 마음을 세차게 들이받아서 생겨버린 ‘마음의 교통사고’ 흔적으로 유리 파편 한 조각이 심장 어딘가에 깊이 박혀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마음의 감기나 부상, 사고로 인한 아픔이나 고통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뭔가 원래의 내 마음 상태와는 좀 다르다는 게 감지될 때가 있다. 너무 오래 동안 마음을 돌보지 못한 덕분에 그때그때 해소됐어야 하는 물컹물컹한 다양한 감정들이, 가슴속 어딘가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여서 딱딱한 고체 덩어리로 굳어있어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밤 카페에서 무언가 녹여서 기체로 승화시켰던 그 정체 모를 덩어리처럼 말이다. 혹시, 자칫하면 마음의 병으로 발전될 수 있었던 ‘마음 바이러스’가 내 가슴속에서 오랫동안 계속 둥둥 떠다니다가 침전되어 굳어진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