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와의 인연_제주 월정리

나만의 힐링 장소

by Spring

그때그때 그냥 시간과 상황이 되는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살짝 느껴지는 게 있다. 그동안의 나의 여행길을 중간 시점에서 잠시 뒤돌아보면 말이다. 내가 여행을 하거나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하면서 즐기는 편이기는 하지만 심리적, 시간적, 자금적 여유가 많았던 편은 아니었고, 그렇게 마니아적인 특성이 있는 사람은 아닌지라 여행이나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다. 뭔가 많이 알아서 좋아하는 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어쩌다가 마주친 그 순간의 장면, 그 순간의 느낌, 그 순간의 오감 등의 이런 총체적인 감각이나 느낌의 기억이 나의 영혼이나 몸에 좋게 남는다면 ‘아.. 좋았던 여행이었다’ 라거나, 그게 아니면 ‘그저 그런 평범한 느낌의 여행이었네’ 정도로 구분만 될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은근히 무심한 나 조차도 여행을 하다 보면, 무언가 나와의 작은 인연이 느껴지는 장소가 있다.


그곳이 바로. 제주도의 작은 해변 ‘월정리’이다.




나는 다른 또래에 비해서 제주도를 굉장히 늦게 방문한 편이다. 제주도 안 가본 사람은 간첩? 취급당할 정도로, 꽤나 흔하게 자주 가는 여행지 중 하나가 바로 제주도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20대 초중반까지는 그저 주변 친구들이랑 노는 게 좋았고 제주도는 해외도 아닌데 마음만 먹으면 그냥 아무 때나 쉽게 갈 수 있는 거 아닐까 싶어서, 어쩌다 보니 제주 여행을 굳이 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20대 중후반 시점부터는 학업이냐 취업이냐 진학이냐 등으로 인하여 갑자기 너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30대가 되어서야 제주도에 첫 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그만 제주도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물론 국내 여행지 중에서 유독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꽤 화려한 곳들도 제주도에 많지만, 굉장히 평온한 로컬 지역들도 함께 있어서 여행 컨셉을 어디로 맞추느냐에 따라 같은 제주 여행이라도 매번 다른 느낌을 느낄 수도 있기에, 그런 나만의 여행 시공간을 느낄 수 있는 점도 참 좋았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는 제주 여행은 시끌벅적하게 먹고 보고 즐길 거리가 많아서 정말 다 같이 어울리기에 좋은 분위기의 여행을 할 수 있었기에 좋았고,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때는 그러한 목적답게 차분하게 푹 눌러있으면서 주변 길이나 해변가를 산책하거나, 그림 같은 바닷가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창밖을 볼 수 있는 ‘카페 스테이’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오늘처럼 이렇게 혼자서 제주 여행을 하거나(지금 이 글을 제주에서 쓰고 있다^^) 혹은 친한 지인과 함께 소규모로 제주 여행을 했던 경우에는, 다른 해변들보다도 작고 조용한 월정리를 더 찾았던 것 같다. 처음에는 분명히 내가 먼저 계획을 하고 왔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제주도에 대해서 전혀 몰랐을 테니깐 말이다. 누군가에게 이끌려서 월정리를 처음 가봤던 것 같은데, 아마도 그때 이후로 제주도에 가게 되면 월정리가 매우 멀지 않은 경우에는 종종 들렀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제주에 올 때마다 어렴풋이 기억을 스치는 게 있었다. 내가 어떤 변화가 있을 때마다, 즉, 어떤 분기점? 변곡점? 터닝포인트? 같은 지점에서 내 인생의 방향이 살짝 혹은 크게 달라질 때마다, 그 전후 시점으로 제주도의 월정리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문득 불현듯 떠올랐다. 정말 신기하게도 말이다.


월정리.jpg



나의 30대는 주로 직장인의 삶이 많아서 그랬는지. 돌아보면 뭐랄까...

어딘가 입사하거나 퇴사하는 시점 혹은 다른 활동의 시작 시점 전후로, 마치 ‘준비 땅’ 신호로 인해 자석처럼 그곳으로 끌려온 사람 같았다. 처음에는 내가 각오하고 갔던 게 아니었던 만큼 분명 처음에는 우연이었으리라. 하지만 그 이후로는 꼭 월정리가 나른 은근히 불러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 이제는 앞으로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삶을 살게 될 거야. 어서 와.
어서 내게로 와.. 그 삶이 얼마나 꽃길일지, 힘겨운 지옥 길일지는 나도 잘은 모르겠어.
하지만 그 전의 모든 안 좋은 기억들을 모두 다, 나에게로 와서 털어내고.. 비워내고.. 내려놓고.
그렇게 앞으로 다가오게 될 너의 새로운 삶을 다시 한번 기대해 봐도 좋을 거야. 토닥토닥...”


그렇게 월정리는 나에게 무언의 위로를 건네는 것 같은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월정리는 나에게 제주의 다른 화려한 바다와 해변들과는 느낌이 좀 다르다.



특히, 비가 조금 오는 날이면 그러한 월정리만의 독특한 운치가 더욱 돋보이는데,

약간 아련하고 고즈넉한 쓸쓸함이 살짝 우수에 차서 흩어져 있는 느낌의 아우라 같다고 해야 할까.


무언가를 놓아주고 흘려보내는 듯한 느낌으로부터 오는 그러한 공허함과..

그렇게 비어져 있는 자리에 밀물처럼 은근하고 조심스럽게 차오르는 설렘이..

묘하게 공존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 장소 자체만으로 나에게 엄청난 힐링이 되어주는 곳이 있다. 그런 여행지를 하나쯤은 잘 살펴보고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혹시라도 또 내가 힐링이 절실할 때가 있다면 그런 장소에 한번 다시 방문해보라. 그러면 진짜 그 순간에는 사람한테 받는 위로와는 또 다른 느낌이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저 그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뭔가 교감이 되는 듯한 커다란 울타리 같은 공간에서 내가 소소하게 위로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런 느낌을 가지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리라. 누군가 또한 나처럼 이런 비슷한 감정들을 느끼기 때문에 이곳을 방문할지도 모른다. 마침 이번 주는 내가 제주에 있었기 때문에 며칠 전에 월정리를 오랜만에 방문했는데, 이런 나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 같은 장면을 마주쳤다.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 같은 기분으로 말이다.


과거의 나는 거의 항상 비수기에 월정리를 갔었기 때문에 월정리만의 그런 특유의 분위기를 더욱 잘 느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사정상 어쩔 수 없이 성수기 근처에 갔었기에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은 편이라 바닷가 바로 앞에서 그 분위기를 느끼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좀 더 멀찌감치 떨어져서 감상하고 싶은 마음에 월정리의 많은 벤치 중 하나인 진한 갈색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조금 떨어져 있는 더 옅은 색의 벤치에는 어린아이 두 명과 그들의 엄마가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바다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조용한 느낌이 들어서 그 자리를 다시 쳐다보았더니, 대학생이나 직장인 초년생으로 보이는 여성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나와 매우 비슷한 자태로 비슷한 느낌을 풍기면서 말이다. 전혀 다른 느낌과 자태였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면서 오버랩되는 장면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그 시절의 내 모습이었다. 나도 저 아이처럼 좀 더 젊은 시절에, 지금처럼 월정리의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던 순간이 생각났다. 언제쯤이었는지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무언가 답답한 일이 있어서 털어내고 싶은 마음에 여기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 여자 아이도 비슷한 심정이라서 내가 혼자 앉아 있는 벤치 옆으로 와서 비슷한 동지감?으로, 조용히 앉아 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시간에 쫓기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한마디 말을 건네 보고 싶기도 했지만, 혼자만의 저 귀한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공존했다. 그리고 오늘 처음 보는 전혀 모르는 여자 아이였지만, 나는 그 순간 작은 바람이 하나 생겼다.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그 젊은 시절의 고통과 아픔을 나보다는 좀 더 성숙하게 잘 승화시켜서, 나중에 내 나이쯤 되었을 때는 지금 내가 앉아있는 그녀의 오른쪽 갈색 벤치로 또다시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말이다.


나도 항상 여기에 올 때마다 속으로 다짐하는 게 있다.

‘괴로워서 오는 것은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부터는 즐거운 마음으로 내 과거를 회상하기 위해서 와야지’라면서 힘들어서 오는 것은 이번으로 끝내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저 여자 아이처럼 나의 젊은 시절과 마찬가지로 나는 여기에 또 이렇게 그때와 너무 비슷한 마음으로 앉아있다. 제발. 부디. 앞으로는 세상이 더욱 좋아져서, 연갈색 의자의 그녀는 내 나이가 되었을 때는 나처럼 여기로 다시 오지 않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나도 마음으로는 항상 그랬듯이, 오늘 이곳을 졸업하려고 해. 안 좋은 마음으로 오는 것 말이야.


그런데 혹시 또 모르지. 나의 오른쪽에 또 다른 의자가 생겨서, 내가 더 나이 들어서는 더 진한 색 의자에 또 앉아 있을지도 말이야. 내가 추억 회상으로 오는 거라면 너무 좋겠지만, 부디 오늘 같은 심정으로 그 의자에 앉아 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아이야. 너도. 건투를 빈다. 앞으로 이 험한 세상 잘 살아 나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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