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개인 문화 고찰
썬크루즈 공원 산책을 마치고 정문 쪽으로 걸어 나왔더니 어느새 어두컴컴해져 있는 공기를 확 느낄 수 있었다. 낮에 걸어올라 왔던 그 언덕길을 저녁에 걸어내려 가기에는 좀 스산할 수 있는데, 예전에는 정동진역까지 먼 거리인 줄 알고 대기 중이던 택시를 친구와 함께 타고 나왔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멀지는 않아서 택시를 부르는 게 쉽지가 않고, 늦은 시간에는 근처에도 없기 때문에 바람 쐴 겸 걸어 내려오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결국 나는 그날 밤공기의 향기를 물씬 느끼며 어둠 속을 헤치면서 축지법을 쓰듯이 스스스슥 빠르게 내려왔다. 중간중간에 보이던 등불들이 구원자의 손길처럼 비춰주던 불빛들과 반갑게 인사하면서. 크크.
그 언덕길을 신속하게 통과하여 내려왔더니 좀 더 환한 평지 길이 나타났고 음식점들도 몇 개 보였다. 여기는 대체로 식당들의 저녁 식사 마감 시간이 빠른 편이다. 그래서 한 손에는 내가 좋아하는 인절미 카스텔라를 고이 포장하여 가져가고 있지만, 저녁 대용으로는 조금 부실할까 봐 식사도 더 포장해 갈까 말까 고민하면서 걷고 있었다. 썬크루즈에 오면 꼭 사게 되는 것이 나의 취향 저격인 이 인절미 빵인데, 고소하면서 달달한 게 너무 맛있고 은근히 배불러서 예전에도 식사 대용으로 충분하긴 했었다. 그럼 괜히 저녁 식사 고민을 한 건가 싶어서, 저녁밥은 사지 않기로 다시 곧 마음을 정했다. 더구나 오늘은 늦은 점심으로 식당 밥을 포장해서 먹지 않았는가. 한 끼는 빵으로 먹어도 괜찮지. 맛난 간식들 몇 개만 더 추가한다면 말이야.
그러고 보니 아까 낮에 점심밥을 샀던 그 식당 아주머니도 그렇고, 어젯밤에 힘겨운 몸으로 잠깐 들렀던 편의점의 아주머니도 그렇고, 나를 배려해서 자세한 건 캐묻지 않으신 거겠지만 내 여행에 관심을 보이시면서 소소한 것들을 알려주고 무언가 더 챙겨주시고는 했다. 어쩌면 그렇게 다들 옆집 이웃처럼 친근하게 푸근하시던지 우연의 일치 치고는 신기했다. 그날 썬크루즈에서 다가오셨던 ‘사진 아주머니’까지 모두 연달아 계속 좋은 분만 마주쳤으니 말이다.
아니 뭐, 아주머니들뿐이랴. 버스 기사 어르신과 트럭 청년 젊은이까지 다들 너무 좋지 않았던가. 트럭 청년은 나중에 여기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 날 때쯤 본 거였지만, 비슷한 장소에서 또 그런 호의적인 사람을 마주쳤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긴 했다.
역시 세상 사람들은 나에게 우호적일 때가 참 많아. 지난날들을 돌이켜봐도 여행 첫째 날이나 여행 초기 하루 이틀은 특히 더, 좋은 사람들을 우연히 많이 마주치게 되는 느낌이거든. 이번 여행도 초반에 거의 하루 반 동안 선량한 사람들을 우수수 몰아서 만나게 된 것처럼 말이지. 내가 여행 첫날인 걸 알았나? 그럴 리가. 어쩌면, 여행 초반에는 어딘가 모르게 티가 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 스스로가 나의 설렘에 살짝 취해서 들떠있는 그런 분위기 말이다.
그런 거 보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여행 초반에 친절한 사람들이 끌려오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아마도 여행자 티가 났나 보다. 그 이후로는 며칠쯤 지나면 거리의 외국인이 나에게 길을 물어봐서 당황할 정도였으니, 오히려 반대로 내가 현지인처럼 편해 보였던 것 같았는데 말이지. 국내든 해외든 초반에는 뭔가 그렇게 은근히 속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게 있나 보다.
나도 모르게, 방금 피어오른 듯한 그런 설렘과 심쿵이 몽글몽글 바깥으로 새어 나왔던 건 아닐까. 오죽하면 뒷모습으로도 그걸 알아챘을까. 내 뒤에서 다가왔던 그 사진 아주머니 말이다. 여기 와서 처음으로 높은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그 순간, 설레던 그 감정이 뒤에서도 막 느껴진 게 아니었을까? 혹시 설렘이 아니라, 무기력한 나른함에서 우러나오는 애처로움이 느껴졌던 건 아니었겠지? 오, 그건 아니었기를. 플리즈.
이렇게 어디를 가든 거리에는 좋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포진되어 있을 때가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커다랗고 넓은 세상의 울타리 안에 있는 작은 존재인 나 하나한테, 불특정 다수의 세상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따스하게 친근하고 세심한 배려와 챙김까지 선사해 주는 걸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아무리 세상이 예전과는 다르게 점점 변질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막상 진짜 세상에 나와 보면 ‘그래도 아직까지는 살만한 세상이구나. 역시 아직은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이구나.’라는 것을 실제로 체감할 수가 있다.
그런데 왜 평소의 일상에서는 이런 것들을 느끼는 게 쉽지 않았을까? 여행처럼 새로운 곳으로 떠나온 것이 아니니깐 평범한 일상은 그리 설레고 기쁜 감정이 상대적으로는 많지 않을 수도 있으니 당연한 걸까? 그렇지 뭐, 그럴 수도 있지. 매일 반복적으로 살게 되는 평소의 삶과 그런 일상을 탈출해서 새롭게 떠나온 여행의 순간은 차이가 있는 게 당연할 테니깐. 하지만 내가 지금 여행 와서 무슨 신나는 놀이기구를 타거나 흥미로운 체험 활동을 하면서 놀았던가.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았잖아. 어제 밤늦게 도착해서 편의점 갔었고, 일어나서 식당 밥 사 왔고, 공원 산책하러 가는 길에 낯선 사람들을 몇몇 마주친 것뿐이었는걸. 즉, 평상시와 별반 다를 게 없었던 활동들에서 만났던 사람들이라서, 우리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삶의 순간들일뿐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평소의 일상과는 사뭇 다른 느낌들이었을까. 물론 여행자한테 베풀어주던 선의라서 조금 다를 수는 있지만, 그 차이의 갭(gap) 격차가 좀 많이 날 때가 있다는 거다. 그저 기분 상의 탓일까? 그렇다고만 하기에는 뭔가 좀 아닌 것 같은 게, 여행 중에 그런 상황들을 우연히 마주치게 될 때면 갑자기 사람 사는 느낌이 들면서 시원하게 숨이 쉬어지는 기분까지 들 때도 있거든.
평소 일상이 굉장히 숨 막힐 듯이 갑갑할수록 여행 중에 평범한 상황을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색다른 기분이 유독 더 느껴졌던 것 같다. 평온하고 온화한 감정의 상태랄까? 마치 평소에는 인공호흡기로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것을 떼어내어 갑갑함이 사라지고 나 스스로도 자연 산소로 숨을 쉴 수 있게 되면서 편안함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만큼 평상시 일상이 얼마나 답답했길래, 자연 풍경은 물론 사람들과의 이런 접촉만으로도 마음이 평화롭게 느껴지면서 숨통이 트이는 기분까지 들었던 걸까. 분주하기만 했던 일상에서는 이런 내 모습을 감지를 잘 못하고 있다가, 여행을 오게 되면 그동안 쌓여있던 나의 심신 상태를 그제야 역(逆)으로 깨닫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가 종종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은 굳이 여행을 오지 않아도 일상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집 근처나 근교에 있는 공원 산책을 해도 되는 것이고, 죽마고우 같은 친한 친구를 만나면 속을 터놓을 수 있어서 오히려 더 시원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학창 시절까지는 그래도 이런 평범한 일상을 어느 정도 조금은 누릴 수 있었기에 그런 시간들의 소중함을 잘 몰랐었다. 하지만 나중에 점점 직장 생활이 바빠지게 되면 그게 얼마나 꿈같은 일상이었는지 뼈저리게 느끼면서 아련한 추억처럼 슬프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특히, 나의 평소 일상이 거의 전부 직장에 묶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기일 때면 그런 증상이 더욱 두드러졌던 것 같다.
이렇게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고 있는 직장이라는 공간에서도, 내 본연의 모습을 많이 잃지는 않으면서 유지할 수 있거나 아니면 직장 밖에서라도 나의 일상을 지킬 수 있는 작은 여유라도 있다면 그래도 숨 막히는 갑갑함이 그렇게 심하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는 게 쉽지 않을 때가 많다. 여러 가지 상황들을 마주하면서 그런 현실을 뒤늦게야 깨닫기도 하고, 더 큰 문제는 이런 사실들을 힘들게 깨닫고 나서도 그런 상황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 한국에서는 아주 일반적으로 흔하게 깔려있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문화라서 ‘모두가 그렇게 사니깐, 나도 그럴 수밖에 없으려니’ 하고 그런 삶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문화는 도대체 어떤 모습이길래, 나도 모르게 평소에 그런 갑갑함을 느끼고 있었던 걸까? 사회 구성원으로서 충실해야 하는 역할 때문에 써야 했던 사회적 가면의 페르소나 때문이었을까?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맡은 일을 하면서 나의 사회적 정체성과 역할에 어울리는 페르소나를 쓰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런 업무적인 가면만이 나를 갑갑하게 만들었을까? 일할 때는 그게 그렇게 싫었던 것도 아닌데? 더구나 자신의 적성과 재능에 맞는 직업적 페르소나를 쓰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꽤나 만족하고 있을지도 모를 텐데?
그런데 그런 공식적인 가면 또한 온종일 연중 내내 쉬지 않고 너무 오래 쓰고 있으면, 본연의 내 모습이 전혀 숨을 쉴 수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갑갑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아무리 대단하고 화려한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가면 자체를 쓰지 않은 원래의 내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은 꼭 같이 수반되어야 하는 게 제일 이상적인 삶일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사회적 역할에 충실했던 그런 ‘형식적인 가면’들보다도, 본질적으로는 나를 에워싸고 있던 ‘실질적인 껍데기’들이 더욱 갑갑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즉 겉으로 보이는 사회적 역할의 ‘가면’보다도, 보이지 않는 내재적 수치 평가의 ‘껍데기’가 더 숨이 막혔던 건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전광판이나 간판 같은 것 말이다. 차에 달리는 차량 번호판처럼 사람한테 달리는 번호판의 일종이라고나 할까. 눈에 보이지는 않는데 착시 효과처럼 마치 사람 머리 뒤에 그 번호판이 커다랗게 빛나고 있는 것 같은 후광 효과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런 건 가면이라기보다는 껍데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인 요구와 기대에 따라서 내가 스스로 나한테 부여하는 공적인 페르소나와 같은 사회적 가면과는 달리, 껍데기는 단지 타인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평가하여 그들만의 시선으로 나에게 씌우는 투명 껍질에 가까울 테니 말이다.
이런 분위기와 문화가 가득한 사회일수록, 온전한 내 모습 그대로 숨을 쉬기 위해 아무리 페르소나 가면을 집어던져봤자 또 다른 껍데기가 단단하게 씌워져 있어서 내 의지만으로는 절대 벗어날 수가 없다. 거의 항상 나의 숨통을 옥죄고 있는 사회의 공기에 눌리고 있는 상태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핼러윈데이처럼 험상궂은 가면은 아닐지라도, 설령 세상에서 최고로 가장 아름다운 가면일지라도, 그런 가면들을 벗고 본연의 내 모습으로 해방되어 있는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자아의 모습으로 숨을 쉴 수가 있다. 그런데 아무리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이 중요할지라도 그런 가면들을 항상 뒤집어써야만 하거나 혹은 가면들을 아무리 벗어던져도 소라 껍데기 속에 이중으로 갇혀 있어야만 한다면 이 얼마나 갑갑한 지경이겠는가! 소라 알맹이의 진짜 모습은 영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껍데기 안에서만 간신히 숨을 헐떡이면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비록 전체적으로는 각박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상태일지라도, 최소한 자신의 사적인 주변 사람들이나 환경만큼은 나의 선택과 노력 여하에 따라 전혀 각박하지 않게 나만의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동시에 미미하게라도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에 99%의 야박한 사람들과 1%의 선량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각박한 세상’이 하나 존재한다고 생각해보자. 이 중에서 전체 인원의 1%를 차지하고 있는 좋은 사람들 몇몇을 데려와서 어떤 그룹을 만든다고 하면, 그 작은 집단은 실제로 선량한 사람들로만 100% 구성되어 있는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만의 유토피아(utopia) 세상’을 만들어서 현실에 실존하는 상태로 유지하는 것도 가능하게 된다. 비록 변화의 확률은 매우 작을지라도 희망은 있는 상태인 것이다. 나만의 좋은 세상이 처음에는 작을지언정 조금씩 더 확장해갈 수만 있다면, 결국은 커다란 유토피아를 구축함으로서 세상 전체를 점점 더 이상적으로 정화시키는 것도 가능할 수가 있다. 작은 유토피아 씨앗이 커다란 나무로 발현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미 그런 공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조물주가 아닌 이상 매일 숨 쉬면서 살아가는 공기까지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현재의 공기 자체는 확률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눈에 보이지도 않은 채로 그저 우리 피부에 완전 착 밀착되어 큰 덩어리가 지그시 눌러대는 것들이라서,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실체 아니던가. 즉 변화의 확률도 거의 없고, 고로 희망도 거의 없는 상태인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냥 그렇게 현재의 공기 속에 묻혀서 살아가는 수밖에. 사회적으로 천지개벽 같은 엄청난 의식적인 대변혁이 오지 않는 한은 말이다. 혹은 지구에서 우주의 공기로 바꾸는 수준 정도로 삶의 터전이나 업무 환경이 확 전격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은 말이다. 현재의 공기가 너무 갑갑해서 숨쉬기 힘들 정도라면, 그런 공기나 습도와는 완전히 다른 시공간으로 가야지만 다시 제대로 살아날 수가 있을 것이다. 공기라는 아이는 매우 산뜻하면 공중으로 날아갈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너무 무거우면 압박감까지 느껴지면서 땅으로 꺼질 듯한 기분도 들게 하는 팔색조 같아서 여러 다양한 기운을 지니고 있는 오묘한 실체라고 할 수 있거든.
지금 현재 석탄가루가 수시로 날리고 있는 탄광촌에 살고 있는데, 갑자기 요술램프의 '지니'가 나타나서 나를 당장 태국 푸껫의 푸른 바다가 있는 곳으로 이동시켜 주는 요술을 부렸다고 생각해 보자. 얼마나 공기가 달라질지 상상이 가는가? 그저 먹고 자는 일상의 공간은 물론이요, 설령 일하는 업무 공간이라고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석탄가루 같은 유해물질이 사방팔방 날리고 있는 거리에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나의 시공간과, 푸껫의 푸른 바다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파라솔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며 노트북을 즐기고 있는 나의 시공간을 한번 동시에 상상해 보라. 오우, 말이 필요 없다. 상상만으로도 그 공기 변화의 숨결이 나에게 저절로 흡수되어 오는 듯한 이 느낌의 전율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 평소에 나의 본연의 모습인 그 소라 알맹이는, 항상 소라 껍데기 같은 딱딱한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숨 막히는 갑갑함이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던 걸까. 어쩐지 여행길에서 좋은 사람들을 우연히 마주칠 때면 평상시에 나를 꽁꽁 둘러싸고 있던 갑옷이 저절로 풀리면서, 넉넉하게 편안한 캐주얼 옷으로 바꿔 입은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윗목 끝까지 잠그고 있던 단추 하나가 풀린 느낌과도 닮았던 것 같고 말이다. 숨이 차서 답답하던 목이 풀어지니깐 그제야 호흡이 제대로 가능해진 기분이 들었던 것일까.
서로에게 번호판 껍데기를 씌우지 않은 자연인의 상태였으니, 어찌 보면 갑옷을 벗은 기분이 들었던 건 당연했던 건가 싶다. 상대를 경계하고 방어하기 위한 방패 역할을 해주던 갑옷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서로 간에 경쟁하거나 전쟁할 필요가 전혀 없어서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고 무장해제하여 평화 선언을 하겠다는 의미였을 테니 말이다. 서로가 해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와 같다. 그래서 그런지 망망대해의 바다를 바라보는 건 꽉 막혀있던 숨통이 한 번에 뻥 뚫리는 시원한 느낌이었다면, 여행길에서 선량한 사람을 마주치는 건 목까지 꽉 조이던 옷이 살짝 느슨해져서 긴장감이 풀리고 편안해진 느낌에 더 가까웠던 것 아닐까?
이런 느낌이 차라리 개인적인 측면에만 해당된다면, 일상의 갑옷에서 탈출하여 갑갑함을 해소시켜준 여행의 긍정적인 효과를 깨닫는 차원으로만 그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감정이 나 혼자만 느끼는 기분상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회나 공동체의 전체적인 측면이라면, 이것은 생각보다 차원이 다른 조직적인 현상을 불러올 수도 있다. 만약, 어떤 조직의 거의 모든 구성원들 또한 나처럼 일상에서 이런 감정들을 알게 모르게 비슷하게 느끼고 있는 상태라면 어떠할까? 개별 구성원 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갑옷으로 무장한 채 같은 공간에서 모두 함께 지낸다고 상상만 해봐도 그 현장의 느낌을 금방 알아챌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