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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 Mar 18. 2024

#2_집단 갑옷의 향기_(feat. 조직 문화)

feat. 조직 문화 고찰

어떤 갑옷을 입고 있는 한 사람과, 또 다른 갑옷을 입고 있는 한 사람 사이에는 과연 무엇이 존재할 수 있을까? 정말 딱딱한 강철 갑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과연 무엇이 존재할 수나 있기는 할까? 어떤 공기 한 톨이라도 존재할 수가 있을까? 물질이나 에너지 등이 전달될 수 있는 공기의 흐름 자체가 완전 차단되어 끊어져 있는 상태일 텐데? 그 무쇠 강철 갑옷 바로 앞에서 그런 공기 흐름의 경로가 길을 잃고 무력하게 튕겨져 나가지 않을까? 이렇게 되면 더욱 심각한 것은 바로 그저 개인적으로 숨 쉴 공기만 통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 숨 쉴 수 있는 ‘사람의 공기’가 통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공기’가 끼어들 틈이 아예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사람 공기. 사람 냄새. 사람 향기.’ 



당장 나 하나도 공기가 부족하면 숨을 쉴 수가 없듯이, 사람 사이의 공기가 부족하면 서로의 숨결이 존재할 수 없어서 숨 막힐 듯이 갑갑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사람 간의 공기가 없으면 호흡 불가로 사람 냄새도 감지할 수가 없어서, 서로 간에 연결될 수 있는 관계성의 생명력이 부재중인 것과 같다. 공기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살아갈 수 없듯이, 서로 간의 어떤 관계가 살아날 수가 없다. 그 어떤 유대감이나 친밀감 같은 긍정적인 감정의 연결 고리선도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통할 수 있는 인간적인 전류가 어떻게 흐를 수가 있겠는가. 우리 모두 각자 두텁고 단단한 갑옷 같은 전류 차단용 옷을 입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사람 간의 온도 자체가 올라갈 수 없는 것이다. 인간적인 온기가 싹 빠지게 되는 것이다.

     

집단 갑옷



서로 껍데기 같은 갑옷으로 무장하지 않았다면 존재했을 ‘사람 냄새’는 아마도, 반 고흐가 그토록 애타게 갈구하면서 그림에 담고 싶어 했던 그런 ‘사람 냄새’와 비슷하지 않을까? 아무리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일지라도 실제 모습보다 더 가엾게 왜곡하지도 않았고 더 멋지게 미화하지도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던 고흐의 시선에서도 사람의 향기가 느껴졌으니 말이다. 태생적 요인이나 환경적 조건 같은 외적인 요소들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을 그 자체로서 소중한 존재로 여기고 가치 있게 바라보는 고흐였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 사람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고흐는 상대방이 누구든 간에 외적 조건이나 편견의 껍데기를 씌우지 않은 채 그저 하나의 귀중한 생명체로써 그 모습 그대로를 바라보고자 하지 않았는가. 우리 사회에서도 평가 점수의 번호판 껍데기를 씌우지 않은 채 사람 자체로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가 있다면, 반 고흐의 이런 인간적인 시선이 녹아있는 사람 냄새를 은은하게 풍기고 있는 관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고흐처럼 이렇게 우리 모두 일상에서 주변의 타인들에게는 평가 수치의 껍데기를 씌우지 않고, 나 자신에게도 스펙 무기로 무장된 갑옷을 스스로 입히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치, 타인을 바라보는 색안경 같은 선글라스를 벗어버리고 나의 방패용 갑옷을 풀어버리는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제거되면서 무언가 한 꺼풀 벗겨낸 듯이 한결 개운해지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서로서로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직장에서 내 본연의 모습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타인들을 향한 시선 또한 상대방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서로 간의 갑옷이 마법처럼 풀리듯 사람의 공기가 통하게 되고 사람 냄새가 나면서 온기가 흐르는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평소의 일상이 훨씬 더 숨통 트이는 삶의 공간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직장의 업무 공간에서는 고흐의 이런 사람 냄새를 느끼는 게 힘든 경우가 꽤 많은 것 같다. 어쩌면 매우 흔하게 디폴트(default)로 자리 잡혀있는 기본적인 분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디 직장 사무실뿐이랴. 죽마고우나 절친한 친구처럼 지극히 사적인 사이가 아닌 경우라면, 대부분의 공적인 사이나 업무적인 관계들로 모인 공간들은 성과와 경쟁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서로 갑옷을 입고 무장하고 있는 경우들이 너무 많다. 즉, 사회생활을 하는 공간이라면 어디서나 쉽게 보거나 느낄 수 있는 장면과 상황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 냄새가 거의 없는 공간이라고 해서 반드시 꼭, 인심이 매우 야박하거나 인성이 못된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살벌한 분위기를 의미하는 것까지는 아니다. 엄청나게 극심한 성과 위주라서 치열한 경쟁이 넘쳐나는 부서의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설령 그런 과도한 분위기가 아닐지라도 일반적인 한국 조직의 사무실이라면 진짜 사람 냄새의 향기는 쉽지 않을 때가 많은 편이다.      




회사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보통, 자신이 맡은 직책과 직급에 따라서 이에 걸맞은 페르소나를 쓰고 일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자신만의 포지션 직위와 역할이 있으므로 서로 간의 상하 관계와 책임에 따른 사회적 가면의 페르소나를 쓰면서 생활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상이며, 꽤 유능한 모습을 보일 때면 그 페르소나가 프로페셔널(professional)하게 더욱 멋져 보이는 긍정적인 기능을 하기도 한다. 공적인 관계가 주를 이루는 이런 업무 공간에서는 거의 항상 페르소나를 쓰게 되지만, 동료들과 점점 가까워지게 될수록 업무 외적인 시공간에서는 사적인 관계로서 원래 모습을 더 드러내게 될 수도 있다. 이때는 서로의 페르소나를 잠시 벗을 때도 있어서 더 편하게 숨이 쉬어지고 한결 가뿐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문제는 이럴 때조차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게 있다. 사회적 역할의 페르소나도 아니요, 보호용 방패막이 갑옷도 아니요, 그건 바로 타인이 나에게 단단하게 씌워버린 소라 껍데기다.      


나 스스로는 잠시라도 오픈 마인드로 페르소나와 갑옷을 아무리 내려놓고자 해도, 껍데기만큼은 내가 직접 씌운 게 아니라서 상대방이 풀어주지 않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사회’라는 울타리 안으로 진입해 버렸다면, 사적으로 더 가까운 관계가 형성된다고 할지라도 그 껍데기 자체를 내가 직접 벗겨낼 수는 없다. 그만큼 일할 때는 두 개의 가면을 이중으로 덮어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더욱 갑갑한 상태인데, 마지막 껍데기만은 내 의지로 벗어날 수조차 없다니! 물론 아무리 회사 동료라고 해도 친밀도와 신뢰도가 더 깊어지게 되면 그런 껍데기조차도 서로 씌우지 않게 되어 자동으로 벗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 있을 만큼 서로 함께하는 시간과 추억을 많이 쌓을 정도로 대한민국의 직장인들이 그리 여유가 많은 편이 아닐 거다. 결국, 보통의 경우에는 서로 그렇게 적당한 껍데기를 쓴 채로 지낼 수밖에.



하루 일과 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직장이라는 곳이, 아무리 업무 시스템과 환경이 잘 정비되어 있고 소속 팀까지 화기애애할지라도 그리고 내가 아무리 갑옷을 풀고 무장해제를 할지라도, 상대방이 손수 만들어준 소라 껍데기는 항상 달려 있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뭔가 그 존재를 알 수 없는 갑갑함이 내재되어 밑바탕에 깔려있던 걸까. 저렇게 상황이 가장 좋은 경우를 가정할 때조차도 껍데기만큼은 내가 직접 제거할 수가 없는 거니깐, 보이지 않는 일종의 산소 호흡기를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있는 기분을 은연중에 늘 느끼고 있던 것 같다.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으면 숨이 차니깐, 그런 보조 기구의 기능을 도움 받는 느낌 아니었을까. 그러니깐 여행길에서도 인공호흡기를 떼어낸 것처럼 기분 좋은 개운함이 느껴지는 건 당연했겠구나.       





물론, 어느 사회나 조직이든 일하기 위해 모인 공간이라면 이런 느낌이 일반적인 분위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할 때는 어느 정도의 공식적인 형식을 갖추고 기본적인 긴장감이 다소 느껴져야지 업무 집중도가 높아져서 더 좋은 실적도 나올 수 있으니깐 말이다. 맞다. 나도 동의하는 부분이기는 하다. 그런데 그저 단지 업무 공간의 공통 특성으로만 치부해도 된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복잡 미묘한 측면들이 혼재되어 보이는 느낌이다. 


우리나라 껍데기만의 한국적 고유성이라고 해야 할까나.      


세계 각지 어느 나라든 간에, 타인들이 나에게 씌운 껍데기들은 어디든지 역시나 비슷하게 존재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자의대로 타인을 평가하고 바라보는 것은 자유이므로, 어찌 보면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테니 말이다. 


다만 우리나라 껍데기만큼 단단하고 두텁게 특수 제작된 것처럼 보이는 게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다른 국가에 비해서 한국만의 특수성이 겸비되어 있는 딱딱한 껍데기라서 그런지 더욱 숨이 차기도 해서 산소 호흡기가 더 자주 필요할 때도 있다. 엄청 두껍고 투박한 재질로 구성된 껍데기들인데 그 안으로 숨을 쉴 수 있는 공기 자체의 유입이 가능하기는 할까? 더구나 그 두께를 줄일 의지도 없고 기존의 재질 이외에 다른 재료를 더 추가하거나 변형시키고자 하는 그런 유연성도 없어 보이는 껍데기처럼 보인다.      




우리나라 껍데기는 왜 유독 단단하고 두텁게 느껴지는 걸까? 타인에게 씌우는 껍데기를 형성하는 기준들이 하나같이 너무 엇비슷해서 그런 것 아닐까. 각각의 껍데기를 만들기 위한 레시피(recipe)들이 거의 다 고정적으로 비슷해서 더욱 딱딱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저 투입하는 재료의 개수와 질량 같은 수치만 달라질 뿐이지, 다른 양념 소스를 섞어보거나 여러 조리법으로 확장하거나 변화하여 응용하고자 하는 유연성이 전혀 없는 레시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만큼 그들에게 어울리는 껍데기는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게 맞다. 특히나 색상(빨, 주, 노, 초...)이나 모양(네모, 세모, 원...)이나 질감(물컹물컹, 까끌까끌...) 같은 질적인 요소들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껍데기들은 거의 비슷한 재료들로만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고, 평가된 항목의 개수에 따라서 두께만 달라진 모양처럼 획일적으로 보이는 느낌이 든다. 마치 정해져 있는 공식에다가 두께 길이랑 재료 무게 같은 수치만 집어넣어서 어떤 틀에다가 찍어 만든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색상이나 모양도 엇비슷해 보이고 여러 수치 재료만 빡빡하게 집어넣었으니 재질도 말랑말랑해질 틈이 없어 보여서 정말 너무 단조로운 느낌으로, 그다지 멋있어 보이지도 않는 것 같다. 



자동차 번호판의 그 건조한 목록들처럼 말이다. 


그래도 자동차 번호판보다 사람 번호판은 ‘나이, 배경, 점수’ 같은 기초 항목 이외에도 훨씬 더 여러 가지 목록을 추가할 수는 있다. 그래서 더 좋아 보이나? 아니, 어쩌면 더 잔인한 걸 수도 있을걸. 그것들 또한 너무 뻔해 보이는 항목들인 경우가 많거든. ‘학력 및 경력? 자격증? 재산? 집안?(금수저/흙수저) 계약 상태?(정규직/계약직) 등등...’ 이렇게 한 줄 수치로 딱 나올 수 있는 양적인 목록들이 대부분일 거다. 



질적인 목록들을 중시하기는 할까? 아니, 중시는커녕 생각조차라도 할까? 


저 사람은 어떤 성향과 성격의 사람인지? (이런 것조차도 만약 평가 기준으로 들어간다면, 서술형 설명이 아니라 MBTI로 계산하여 판단할지도 모른다. 하긴 뭐, 그조차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뭐든지 수치화로 환산하는 특성들이 생각나서 갑자기 순간 피식했다. 아마 더 한 경우는, 각각의 MBTI 유형별로 할당 점수를 배분할지도 모름. 와, 서열화의 끝판이겠네.ㅋㅋ 너 성격은 몇 점 짜리야?ㅎㅎ)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취미와 특기는? 경력이 아니라 어떤 경험들을 해봤는지? 삶의 특별한 스토리는 없는지? 그런 자신만의 히스토리들로 인해서은은한 백합의 향기가 우러나오는 사람인지? 아니면, 아름답게 진한 장미의 향기를 강렬하게 내뿜는 사람인지? 이런 것들 말이다. 


아마 타인뿐만 아니라 나에 대해서도 저런 항목들은 자기소개서나 이력서에 형식적으로 쓸 때 말고는 잘 생각해보지 않는 내용들인 경우가 많을 거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회 구성원으로서 바라볼 때 저런 요인들을 많이 고려할 수 있겠는가. 수치 평가 답만 요하는 단답형 질문만이 아니라 이런 서술형 질문에 대한 응답들까지 다채롭게 포함하지 못하는 껍데기를 서로 씌우고 있으니 상대방의 매력이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 게 당연하고, 그저 갑옷처럼 딱딱하기만 한 소라 껍데기들 사이에서 어찌 고흐의 사람 냄새와 온기가 통할 수 있을까.



어쩌다가 이렇게 우리나라 껍데기는 유독 무미건조하게 천편일률적인 평가 기준들로만 구성된 딱딱한 껍질이 되었을까? 이런 현상들에 대한 배경을 잠시 생각해 보면 의외로 여러 가지 원인들이 유기적으로 꽤 많이 엮여 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대한민국(Korea)이라는 이 나라의 전체적인 사회 구조와 분위기만 한번 떠올려 봐도 생각보다 금방 연상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오늘 여행길의 사람들만 먼저 상기시켜 본다 해도, 그런 요인들과 더욱 대비되어 어렵지 않게 납득이 되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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