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신체적 생명력
우리나라의 조직 문화와 공기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다소 갑갑하거나 무거울 때가 많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무엇보다도 우리가 일하는 공간이자 일터, 그런 기본 터가 척박하다는 사실을 내포하는 것일 거다. 온갖 양적인 평가 기준과 스펙들로 인해서 대한민국 껍데기와 갑옷들이 더욱 단단하고 두텁게 느껴진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더 숨이 차서 산소호흡기가 더 절실하게 되고, 괜한 피로감이 상승되기 쉬운 일상에 내던져 버려진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평소 일상의 기본적인 호흡이 편치 못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기본 텃밭 자체가 그저 일상의 호흡을 하기에도 척박한 환경인데, 다른 요인들까지 더 겹쳐져서 호흡이 더 힘들어지거나 갑갑한 공기의 밀도가 더욱 상승하게 된다면 어찌해야 할까? 이미 설상가상의 비상사태로 진입한 상황인 것이므로 이런 사실을 먼저 인지부터 해야 하는 게 급선무일 테고, 그에 따른 여러 작은 방안들이라도 모색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안전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래 박스처럼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제일 대표적으로 많이 발생하는 경우들이 아닌가 싶다.
크게 시간상의 문제와 공간상의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들인데, 먼저 시간적인 측면은 다음과 같은 경우다.
우리의 기본적인 일터 공기부터가 그다지 가볍지 못하고 갑갑할 때가 많은데, 나에게 주어진 업무 분량 또한 너무 심하게 많은 경우가 해당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매일 낮이고 밤이고 일에 시달려야 하고, 이런 야근으로도 충분치 않아서 주중뿐만 아니라 주말까지 출근하느라 거의 항상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을 때가 많을 것이다. 만약 사무실 공기가 한국 직장의 평균적 수준보다 훨씬 더 좋아서 엄청 산뜻하고 활기가 넘친다면, 그래도 이런 경우에는 업무 공간 분위기의 힘으로 어느 정도는 버틸 만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실제로 소속 팀의 분위기가 꽤 좋다면 평소보다 오히려 성과를 더욱 끌어올릴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도 되어주므로, 많은 업무량이 오히려 그런 시너지 효과 덕분에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거의 모든 일상이 직장에 묶여있는 경우에는, 이렇게 공간적인 환경의 장점과 개선을 통해서라도 어느 정도 그런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이 있기도 하다.
다만 아무리 좋은 공간일지라도 개인적인 시간 여유가 전혀 없는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된다면, 결국에는 에너지 소모가 심해져서 체력이 거의 바닥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번 작동되면 전혀 쉬지 않고 달리는 기계의 부속품 같은 나사와 다를 바 없는 상태이므로, 인간이 기계가 아닌 이상 체력 고갈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식물에 비유한다면 마치, 나무가 뿌리내리고 있는 땅이나 토지가 위험한 상태라고 할 수도 있다. 사람의 생명 같은 뿌리가 바로 닿는 토지는, 나무의 생명과 직결되는 부분이니깐 말이다.
아무리 나무 주변의 공기가 매우 좋을지라도 오래 동안 가뭄에 시달리거나 건강하지 못한 토지 상태에서는, 나무가 직접 섭취할 수분이나 영양분이 부족하게 되므로 더 이상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진흙 밭이나 자갈길에서는 나무가 살기 힘든 것과 같다. 그래서 회사 일이 아무리 바쁠지라도, 아주 작은 개인적 시간이라도 짬을 내어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다. 이런 시간적인 문제를 오래 방치하게 되면, 결국 신체적인 생명력에 이상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된다. 더구나 사무실 공기 또한 별로라면 몸과 마음의 생명력이 둘 다 소진될 확률이 더욱 높아지므로 주의가 더 필요한 상태가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너무나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온 역사와 문화 때문인지, 업무량 자체가 꽤 많은 경우들이 흔한 편이다. 주어진 업무의 총 분량 자체가 과다할 때는 중간에 쉴 수 있는 여유나 브레이크 타임이라도 좀 가능한 분위기라면 좋을 텐데, 그런 게 쉽지 않은 문화가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것 같다. 같은 시간일지라도 훨씬 더 초집중해서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할지라도, 혹은 우수한 능력과 스킬로 보다 짧은 시간에 매우 효과적인 결과물을 내고 있는 사람이 있어도, 그런 실질적인 과정이나 효율성이 훨씬 더 좋은 상태라는 것은 별로 개의치 않을 때도 종종 있어 보인다. 다들 그저 겉으로 보이는 외적인 모습만 더 중시하느라 무조건 ‘열근’만 외쳐대는 경우도 꽤 있어 보인다.
그러니깐 업무의 중간 과정이나 질적 효과보다는 양적 결과나 보여주는 리액션(reaction)과 겉으로 드러나는 성실근면에만 과할 정도로 몰두하는 경향도 꽤 있어 보인다. 그래서 어떨 때는 진짜로 묵묵히 성실한 사람들보다 저런 연기파? 배우들이 뭔가 더 빛나 보이게 되는 역설적인 장면들을 마주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난 하나의 풍경화를 지그시 감상하듯이 씁쓸하게 마음의 미소를 몰래 짓기도 한다.
‘음, 명장면이야. 연기 대상 감을 주어도 되겠어. 사내 연말 시상식 같은 건 안 하려나? 베스트 쇼맨십(showmanship) 상! 최고인 걸? 브라보!’
성적과 근태 위주로 돌아가는 학교가 아니라 실제 성과가 필요한 일을 하는 공간이라면, 아무래도 일의 결과에 더 좋은 영향을 가져올 수 있는 업무 방식을 자신에게 더 맞게 조금이라도 조정하는 게 훨씬 더 좋을 텐데. 회사도 직원도 둘 다 모두에게 좋을 텐데. 개인 성향에 따라서 더 효율적이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업무 스타일이나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니깐. 그런데 우리나라는 유독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경향들이 높아서, 자신한테는 비효율적일지라도 전체가 다 같이 ‘보여주기’ 식처럼 똑같은 것을 따라가는 경우들이 많아 보여서 좀 안타까운 심정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에너지만 따로 모아서 다른 생산적인 일에 쓰게 된다면 정말 전체적으로 업그레이드될 것 같은데 말이다. 아주 여러 가지 면에서.
얼마 전에 우연히 어떤 댓글을 봤는데, 캐나다에서 햄버거 가게 알바를 했던 경험을 좋은 기억으로 가지고 있던 사람이 남긴 것이었다. 2시간을 일하면 10~20분 정도를 꼭 쉬게 했다고 한다. 그래야지 다른 동료들도 마음 편히 그리 쉴 수 있다고 하면서, 주어진 브레이크 타임을 마치 기본 권리이자 의무처럼 꼭 쉬게 했다고 한다. 그러면 중간에 에너지가 재충전돼서 다시 일하게 될 때는 분명히 시간당 에너지가 더 높게 솟아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방식을 서로 납득도 못하고 더 좋게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조차도 보이지가 않는 걸까. 좀 신기하다. 단순 알바조차도 그런데, 더 정교하고 고차원적인 회사 일은 분명히 그런 효과가 더욱 좋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이것뿐만이 아니다. 업무 시간뿐만 아니라 업무 공간 또한 뭔가 좀 더 숨통이 트이는 측면들이 있는 것 같다.
몇 년 전에 나도 캐나다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대형 은행 직원 중에 한국인이 한 명 있어서 도움을 몇 번 받았었다. 그러면서 가벼운 대화도 몇 마디 사적으로 나눴었는데, 그때 갑자기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그 직원 분은 20세 전후쯤 캐나다로 이민을 왔고 그때 이후로 계속 십 년 정도 은행 일을 하게 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럼, 여기서 일 하는 건 어떠세요? 좋은가요? 한국인이라서 뭐, 더 불편한 점이 있거나 그러진 않으세요? 한국처럼 너무 힘들거나 그러지는 않고요?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의외의 내용까지 더 추가한 답변이 돌아왔다.
제가 일을 오래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한국인이라서 뭐 특별히 더 안 좋거나 그런 건 별로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영어 때문에 서툴렀는데 지금은 괜찮고요. 팀장님 하고도 친구처럼 편하게 일하는 분위기라서 좋아요. 한국 친구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하더라고요.
원래 동양보다는 서양 국가들이 좀 더 그런 문화와 분위기라는 것은 책으로 익히 배워서 알고 있었지만, 직접 산증인한테서 이렇게 바로 눈앞에서 들으니깐 나도 모르게 일종의 부러움 같은 것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 그렇구나. 우리나라처럼 수직적 조직 문화가 과한 곳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쉽지 않은데. 설령 아무리 분위기가 별로인 공간이 있다고 해도, 적어도 갑갑하게 무거운 공기는 아니겠네. 숨통은 트이겠구나. 참, 좋은 동네인 걸. 여기 이곳.
그때 갑자기 캐나다의 다른 점들까지 연결이 되면서 더 이해가 되는 부분들이 생겼다.
실은 그때까지 나는 단기의 해외여행 이외에는, 외국에서 장기간 체류를 경험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항상 분주한 일상에 치여서 짧은 해외여행만 근근이 시도하고는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한 달 이상의 거주를 결심하게 되니깐, 막상 어떤 나라로 가야 할지 좀 막연했다. 그럴 여유가 생길 거라고는 예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랬던 건지, 평소에 굳이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던 것 같았다. 물론 놀러 가고 싶은 여행 희망 국가들은 좀 있었지만 ‘거주’ 국가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여행보다는 처음으로 ‘해외 거주’라는 것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단순 여행이야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겠지만, 그냥 일상의 삶처럼 머무르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던 것 같다. 아주 잠시라도 여행보다는 ‘일상’이라는 삶을 좀 더 느껴보고 싶었나 보다.
그런데 그때 마침 아주 우연히 어떤 영문 기사의 제목을 보았는데 ‘살기 좋은 도시 순위’였다.
여기서는 ‘나라’가 아니라 ‘도시’라는 사실이 중요했는데, 왜냐하면 그 덕분에 10위권 내에 들어가는 도시가 제일 많았던 나라가 바로 ‘캐나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 나는 여러 영어권 나라들 중에서도 미국보다는 캐나다에 호기심이 더 생겼던 것 같다. ‘아니 도대체 어떤 나라 길래 이렇게 자국의 도시들이 10위권 안에 많이 들어갈 수가 있지?’ 그래서 캐나다를 선택했다. 다만 문제는, 급하게 떠난 바람에 날씨를 미리 잘 파악하지 못하고 왔던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의 봄 날씨 시기까지 내내 오랜 겨울이었던 캐나다를 한동안 많이 만끽할 수 없었다는 것이 좀 안타까웠다. 그런데 교통이나 마트 등의 일상적인 삶은 날씨와 무관하게 매번 반복되는 나날들이라서, 오히려 여행보다는 일상에 더 집중하는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본의 아니게 나의 목표 설정에는 들어맞는 ‘행운 아닌 행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다소 놀라웠던 점이 바로, 의외로 한국보다 더 ‘불편한’ 나라였다는 점이다. 우선 날씨부터가 우리나라처럼 4계절이 온화하게 배분되어 있지 않았고, 봄 시즌까지 지속되는 겨울이 유독 길었다. 엄청 혹독한 날씨의 겨울이 오래 지속되었다. 내가 있던 곳이 토론토라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자연환경보다도 다른 환경적 측면에서 의외의 부분들이 보였다. 핸드폰 인터넷이 빵빵 터져서 어디서든 쉽게 접속할 수 있었던 한국과는 달리, 지하 전철이나 여러 다른 교통수단에서는 인터넷 접속 자체가 쉽지 않을 때가 꽤 많았다. 그리고 도서관 같은 공공시설이나 거리에도 집 없는 홈 리스(homeless) 사람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어서 분실 사태도 종종 발생하는 듯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편리함’과 ‘안전함’은 세계 톱(Top)처럼 보일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캐나다가 그렇게 살기 좋은 도시들로서 많은 랭킹을 차지할 수 있었던 걸까.
처음에는 솔직히 조금 의아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은행 직원의 말을 들었을 때 그 이유를 조금 알아챌 수가 있었고 예정된 교통수단이 주말에는 오래 동안 끊겨서 혼란을 가져오는 날들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 시민들의 반응을 보면서 더 알 것 같았다. 그들은 같이 일하는 동료를 과하게 경쟁하면서 경계 대상으로 봐야 할 필요성이 높지 않았기에 직급의 차이가 있어도 친구처럼 ‘프렌들리(friendly)’하게 지낼 수 있었으며, 치열하게 ‘빨리빨리’라는 다급한 일상이 아니라서 교통 대란이 일어나도 모두들 다 같이 느긋하게 기다리는 여유를 지닐 수 있던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우리의 피땀과 뼈를 깎아서 달성하고 있는 그런 몸의 ‘편리함(convenience)’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서로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마음의 ‘편안함(comfort)’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서로가 좀 더 숨 쉬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공기의 ‘편안함’이, 숨 쉬기 힘든 공기의 대가로서 얻게 된 ‘편리함’보다 훨씬 더 소중한 가치로 여겨진 것이 아닐까. 어쩌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인 사람들인, ‘인간’에게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깐 ‘살기 좋은 도시’에 그렇게 손꼽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제야 나의 의문점들이 다소 풀리기 시작하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