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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 Apr 01. 2024

#5_장렬히 전사한 화분_(feat. 생명력)

feat. 정신적 생명력


앞서 캐나다의 환경적 요인과 공간 상황들을 잠시 들여다보았더니, 뭔가 우리나라의 업무 공간들 특성이 좀 더 분명하게 돋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는 업무 공간의 공기 자체가 갑갑한 밀도를 지니고 있는 편이라서 그리 맑고 산뜻한 느낌이 아닌 경우들이 많다. 별다른 큰 문제가 없는 보통의 사무실도 이런 상태의 분위기와 공기를 지니고 있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우리가 사무실에 있는 한, 거의 항상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에 둘러싸인 듯한 기운 속에서 지내고 있는 것 아닐까? 우리가 일하는 공간의 평균적인 삶이 바로, 미세먼지 가득한 공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일상과 다름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런 커다란 사건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나라 시민들이 미세먼지가 높은 날에는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이 지극히 평범한 나날이 되어버린 것처럼, 대한민국 직장인들도 그런 공기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자신만의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는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일상들 또한 그저 평균적인 사무실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미세 먼지 현상



이렇게 한국 직장이라면 갑옷과 페르소나와 껍데기들까지 모두 한데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일상 공기가 미세먼지로 가득 찬 듯이 갑갑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런 미세먼지만으로도 충분치가 않은 건지 더욱 위험하고 무거운 공기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불순물들까지 더 생겨나기도 한다. 이때는 갑옷들 사이로 온기가 전혀 통하지 않거나 오염 물질이 떠다니는 검은 공기 같은 느낌이라서 탁한 분위기에 가깝다. 모든 팀원들이 격무에 시달리느라 공기가 매우 거친 상태일 수도 있고, 서로 간의 팀워크(teamwork)가 좋지 못하거나 경쟁이 과도해서 전체적으로 날이 서있는 분위기일 수도 있고, 빌런(villain)들이 포진되어 있어서 스트레스 기운이 항상 진동하고 있는 공간일 수도 있다. 즉, 공간상의 문제들이 더 발생한 상황인 것이다. 


생명력의 2가지 요인



이런 경우는, 주어진 업무량이 많아서 생기는 시간상 문제처럼 나 하나만 걸려있는 차원이 아니다. 같은 공간의 모든 팀원들이 공통으로 겪고 있는 문제이므로,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쉽게 개선되는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 팀원 모두의 인식 개선이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공기’의 문제라서, 개인적인 노력의 영향이 미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뭐,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 급이거나 존재감이 어마어마한 팀원이라면, 개인적으로도 팀의 공기를 꽤 바꿀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보통은 쉽지 않은 게 일반적이다. 초기 설정되어 있던 기본적인 디폴트(default) 공기 자체가 ‘갑갑함’ 일 때가 많은데, 그보다 더 괴로운 공기 상태라는 것은 그만큼 매우 치열하거나 무거운 분위기라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공장의 자동화 시스템과 매우 닮아 보인다. 단지 기계 하나의 부속품인 나사의 경우는 더 좋은 성능으로 교체하고 싶을 때 잠시 그 기계만 작동을 멈추고 조치를 취할 수도 있지만, 공장 자동화 시스템의 일부분인 경우에는 잠시 청소하기 위해 멈추는 것조차도 공장 전체의 가동을 중지시켜야 하는 것과 같다. 전체 부서나 어떤 팀의 공기는 나 혼자만의 마음이나 의지만으로는 쉽지 않은 것이다. 다 같이 동작 그만이라도 해서 전체 새로 고침 해야지만 간신히 개선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간상의 문제가 발생하면 일상의 공기가 악화된 것이므로, 숨 막히는 증상은 더 심해질 테고 마음이 편치 못하여 ‘정신적 생명력’에 악영향을 끼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공간에 자신을 너무 오래 동안 방치하게 되면 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되는 것이므로, 심리적인 건강 상태와 ‘정신적 소울(soul)의 생명력’ 자체에 위기가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절실한 심정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런 공간에서 떨어져 있는 자신만의 시공간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퇴근 후에 혹은 주말이라도 꼭 다른 공기로 자신의 소울(soul)을 환기시켜서 정화해줘야 한다. 짧은 산책이든 여행이든, 명상이든 영화 감상이든, 어떤 식으로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조차도 절대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그때는 정말 나만의 ‘1인 비대위’가 나서야 하는 비상사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매연이 가득한 공기가 있는 곳에서 온종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심하면 사시사철, 연중 내내 말이다. 공간상 문제 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시간적 측면을 통해서라도 이런 상황을 해소해야 한다. 그런데 시간상 문제까지 존재해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양쪽 다 만만치 않게 벗어날 수 없는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어떨까? 


휴, 과연 계속 숨을 쉴 수는 있을까? 그 공기를 전혀 벗어날 수가 없는데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런 경우들이 어쩌다 가끔 마주치게 되는 상황이 아니라 의외로 매우 빈번하게 자주 접하게 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꽤 높은 상관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상 문제와 공간상 문제의 변수 간에 서로 연관성이 높아서 같이 함께 증대하는 인연법이 있을지도 모를걸. .... 여기 이 나라에서 말이다.






만약, 화분 하나를 런던 스모그 현장으로 직접 가져간다고 상상해 보자. 그 화분의 나무는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까? 제대로 된 산소 공급이 가능할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시들어버릴 것이다. 아니, 아예 생명력을 잃어버릴 것이다. 마치 나의 예전 회사에서 부서 변동이 생겼을 때, 같이 이동했었던 내 자리의 화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말라비틀어져서 죽어버렸던 것처럼 말이다. 아마 그때 내 화분도 그 새로운 팀의 공기 변화를 감지했었나 보다. 뭔가, 지독한 독가스를 마셔버린 것 같았다.      


더 신기했던 것은, 그 이전 팀에서는 아무리 상태가 좋지 않아도 아주 오랜만에 물을 주면 다시 또 겨우겨우 살아나는 질긴 생명력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때 나 또한 과도한 업무 분량으로 인해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몸은 너무 힘들었지만, 매번 힘든 순간마다 근근이 잘 버텨내던 시기였다. 소속 팀 내부의 공기도 서로 비슷한 직급끼리 모여 있어서 수평적 분위기로 괜찮은 편이었고, 맡은 업무 분량이 과다하기는 했지만 보람과 의미를 느끼면서 나름의 재미도 조금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 화분의 생명력은 그때의 나를 닮은 것처럼 보였다.      


다 죽어가다가도 어쩌다 물 한 모금 마시면 구원투수 같은 생명수라도 받아 마신 듯 다시 살아나고는 했던 그 대단한 생명력이, 마치 다 쓰러져가다가도 갑자기 오뚝이처럼 벌떡 다시 정신 차리게 되던 나를 닮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종일 격무에 시달리던 하루를 마칠 때면 특히, 그 화분 짝꿍도 나랑 같이 달린 것처럼 느껴져서 더욱 애잔해 보였던 건지 퇴근할 때 격려 인사를 해주고는 했다. 바로 옆에 놓아두던 '미생' 종이컵에 쓰여 있던 그 문구의 심정을 담은 마음으로 말이다. 


"오늘 하루도, 진하게 보냈다." (미생, 未生)



나는 그때 어떤 생명수 한 방울을 매번 마셨던 걸까. 문득 궁금해진다. 아, 아니. 지금 돌이켜보니, 뭔지 알 거 같기도 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쯤 되니깐 알 거 같다. 그 생명수가 뭐였는지 왠지 알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그 이후, 새로운 팀으로 변경되었을 때 거의 바로 죽어버린 그 화분 또한 나 자신과 닮아보였던 건 왜일까. 공간 이동을 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때도 비실비실해 보여서 오랜만에 평소보다 물을 훨씬 더 많이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왜 그 아이가 살아나는 기운이 전혀 보이지 않고 꿈쩍도 하지 않던지,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물을 퍼 와서 폭포수처럼 들이부었다. 쏟아부었다. 제발 좀 살아나길 바라는 심정으로. 왠지 네가 살아야지 나도 살 거 같다는 심정으로. 근데 참 야속하게도 끝까지 살아나지 못하더라는. 정말 인정하기 싫었지만 나중에야 받아들였다. 



‘네가 먼저 갔구나... 뭔가, 느낌이 싸하네...
내가 야근할 때마다 항상 네가 옆에 묵묵히 있어줘서 은근히 힘이 됐었는데,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너조차도 사라졌구나. 이제 나는 무엇을 보면서 힘을 얻어야 할까. 
지금껏 내 야근의 원동력은 너였나 봐. 그게 지금 이제야 절실하게 깨달아지는 것 같아.

네가 말없이 옆에서 그저 나를 지켜보기만 했는데도, 
그것만으로도 나한테는 엄청나게 큰 힘이 되었었나 봐.
우리가 같이 살아있다는 그 상태 말이야. 그런 연결감. 
힘든 야근의 밤공기를 같이 마셔주고 있는 너의 작은 숨결. 그 생명력. 그 유대감.

그게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꽤 큰 거였네. 
알게 모르게 네가 굉장히 크게 위안이 되어 줬나 봐. 
너의 빈자리를 보니깐 뭔가 공허한 느낌이야. 이젠 나 혼자 버터야 하는구나. 
그동안 의지가 되어줬던 너 없이 말이야. 나 혼자 이 험난한 밤공기를 버텨야 해.ㅠ’   



그렇게 그 작은 화분 친구를 먼저 보내고, 나는 얼마 안 있다가 병원 진료 후 입원을 했다. 

그게 진짜 우연의 일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씩 회상을 하면 참 은근히 쓴웃음이 나온다. 부서 이동을 하자마자 무슨 복선처럼 나의 화분이 먼저 자신의 생명력을 잃었고, 그 뒤를 따라서 나 또한 건강을 잃어버리고 일상을 더 이상 지속하기가 힘들게 되었으니깐 말이다. 여러 가지로 힘들게 지냈던 병가 이후에 다시 업무 공간으로 복귀를 하기는 했지만, 그때부터는 아주 작은 기상 자체도 너무 힘들어지는 나날들이 들쑥날쑥 튀어나오기 시작했고 신체적 리듬이 이상하게 자꾸 깨지면서 예측 불가한 상황들이 갑자기 발생하고는 했다. 나조차도 당황할 정도로 말이다. 


예전 팀에서부터 몸이 힘든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고, 병원 검사 결과로 치료가 필요한 상태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쌓여있던 업무 덕분에 그 시기를 애써 유보하면서 엄청난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부서 변동 이후에는 실제로 작은 빈혈부터 수시로 발생하더니 다른 신체적인 이상 현상들까지 나타나면서 한번 망가지기 시작하니깐, 퇴원 후 커다란 증상은 회복이 되었어도 자잘한 이상 증상들이 불시에 튀어나오는 현상은 그 해에 계속 발생하였다. 한번 무너진 몸의 후유증 상태가 연달아 발생한 것이었을까. 아니면그 공간의 공기에 계속 노출되어야 해서 다시 또 생명력에 이상 신호가 발생한 것이었을까




나도 아직까지는 정답을 모르겠다.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후자의 원인도 절대로 작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해로운 공기에 잠식되는 것은 위험하다. 질식사는 언제 죽는지 그 타이밍을 모르기 때문에, 그게 예상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무서운 것 아닐까. 그래서 공기로 인한 위험이 꽤 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절대 작은 위험이 아니라는 의미다. 수분이나 영양분이 없는 상태는 마치 내가 먹을 식량이 당장 눈앞에 없는 것처럼, 식물이 말라 있거나 시들은 상태라서 눈에 바로 보이기라도 한다. 그래서 그 위험을 미리 감지라도 할 수 있지만, 제대로 된 공기가 아닌 상태는 평소에 인지하는 것도 쉽지 않고 나중에 늦게 알게 되어도 잘 빠져나오는 게 쉽지가 않다. 나 혼자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공기니깐 말이다. 그만큼 매일매일 자신의 생명력이 죽어가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는 질식사에 노출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그때, 나의 작은 화분이 생명을 잃었던 그 순간을 잘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나 보다. 처음에는 분명 죽은 것처럼 보이지가 않았거든. 가끔씩 주었던 물이 많이 있었으니깐 말이다설마 공기 때문에 죽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과연 진짜로 공기 때문이었을까. 뭐든 간에, 그만큼 공기는 꽤 소중한 요인이다. 평소에는 그저 내 옆에 항상 있는 나의 화분 친구로만 느꼈을 뿐 그리 자주 신경 쓴 것도 아니었는데, 그 순간 멍 때리던 만큼이나 이상하게 나중에는 먹먹한 감정이 올라왔다. 뒤늦게 깨닫게 된 슬픔이라서 더 그랬던 걸까. 소리 없는 조용한 사무침처럼. 아니면, 그저 나를 닮아 보여서 그랬던 걸까.       






언젠가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의 마지막 대사 부분을 보았다. ‘박동훈’이라는 아저씨가, 사회 초년생이었던 예전 직장 후배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장면이었다. 나중에 보려고 아껴둔 드라마였는데 마지막 대사를 먼저 보게 된 그 순간 너무 짠한 마음이 올라왔다. 뭔가 아는 아저씨 같았거든...이 세계를 말이야. 내가 살던 세상. 우리가 사는 세상.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네~! ^^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뭔가 비슷한 장면이 왜 또 떠오르는 걸까. 사람의 향기를 느끼고 그 가치를 볼 줄 알았던 ‘나의 아저씨, 반 고흐’가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 같은 장면 말이다.


   

그대여, 편안함에 이르렀나...?

아니요. 아직...ㅠㅠ

    


우리는 언제쯤 드라마 속 ‘지안’이처럼 저렇게... 

‘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쯤 드라마 속 ‘지안(至安)’이의 이름처럼 저렇게... 

‘편안함에 이를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우리 모두가 저렇게...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저렇게... 

‘편안함에 이를 수 있는 세상’이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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