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좋은 벗은 나이와 무관
아이고, 저렇게 다들 해맑게 좋아하시는데 기왕 깎아주는 거...그거 뭐. 그리 큰 돈 드는 것도 아닐 텐데, 그냥 통 크게...한 5살 정도 왕창 깎아드리지 그랬어. 법이 못 됐구나. 짠돌이구만. 겨우 한 두 살만 깎아주는 건 뭐람. 하긴 그래도 저리들 좋아하시는 것 봐라. 안 그래도 우리 나라가 나이에 민감한 편인데 외국보다 더 많은 나이들을 가지고 살았으니, 이제야 좀 그 한이 풀리시나 보다. 큭...
이렇게 아주 찰진 일상의 한 장면을 보고 있자하니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구나.’ 싶은 마음이 올라오면서 은은하게 풍겨지는 사람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거기다가 삶의 교훈도 두 가지 정도를 얻은 것 같았다.
(교훈_1) 역시 사람은 누구나, 나이에 목숨 거는 게 똑같구나.
동네 꼬마 아이든 간에, 내 앞에 계신 이 사장님들처럼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든 간에, 나처럼 어정쩡한 나이의 구간에 있는 사람이든 간에, 여자든 남자든 간에, 우리 모두 다 하나같이 자신의 나이와 젊음을 중요시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구나. 그래서 세월이 흘러갈수록 붙잡을 수 없는 나이 앞에서 다들 무력해지고 절망감을 느끼고는 하는 거겠지. 그런데 한국은 오랫동안 유교 사상이 배경인 만큼 수직적인 관계와 문화가 더 짙게 깔려있으니, 나이에 대한 민감도가 더욱 높은 나라라서 이런 증상들이 유독 더 심한 것 같다.
(교훈_2) 남자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애’라고 하셨던, 그 많은 ‘현자’들의 말씀이 맞았구나.
어쩌면 나이 배틀하시는 모습들이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아이들처럼 순수하게 진중하실 수가 있는지, 이 어르신들 덕분에 오늘 좀 많이 즐겁게 웃을 수 있어서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만 결국 같이 유치해져 버렸다는 사실을 차마 숨길 수가 없을 것 같다. 그 분들의 열정적인 전투 현장을 가만히 듣다 보니깐 나도 똑같이 애처럼 장난기가 발동했던 것이다. 이때다 싶어서, 나의 젊음을 바로 받아먹었거든. 참네, 그것도 나름 젊음이라고. 흑흑.
“두 분이 이 동네에서 제일 젊다고요? 어머! 그럼 내가 여기로 이사 오면 일등이겠네요?
제가 가장 젊은 거겠네요? 오, 자동 회춘되겠네! 와, 당장 내일부터 이사 와야겠다! ^^;”
이런 내 반응 때문인지 갑자기 두 분이 내 나이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분위기로 급반전되기 시작했다. 원래 좀 궁금하셨던 건지 차마 나한테 먼저 물어보지 못하고 있던 찰나에 내가 먼저 그 화제를 꺼내버리게 된 것이다. 아, 그 순간 아차 싶었다. 괜히 나도 장난을 시작했나 싶은 작은 후회와 함께 어떤 깨달음이 퍼뜩 올라왔기 때문이다.
요새는 예전의 젊음이 점점 소실되어 가고 있는 만큼, 어디 여행을 가더라도 내 나이를 굳이 먼저 밝히지 않는다. 아니, 누가 물어봐도 그저 장난 식으로 넘어가고 확실하게 밝히지는 않는 게 언제부터인가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래야지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더 친근해지기 쉽고 서로 간에 괜히 느낄 수 있는 부담감이 확실히 줄어드는 것 같아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나이에 민감한 분위기와 문화 속에서는 그런 효과가 꽤 크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그래서 정확한 나이 얘기는 굳이 언급하지 않은 채 ‘조금 많아요. 시크릿(secret)! 비밀.’라든가, 좀 더 어린 청춘들을 마주치게 되면 ‘나도 엊그제는 그대들과 비슷했는데 그 시기가 이제 막? 지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음!’라는 식의 농담만 슬쩍 던져두면 서로의 나이 차이가 얼마가 나든 간에 그때부터는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서 교류도 훨씬 더 수월해지고 그만큼 친밀감도 상승하는 것을 느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굳이 불필요한 정보들로 인해서 괜한 어색함과 부담감을 서로에게 자동으로 발생시키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경험들을 자주 하게 될수록 더욱 그런 생각이 들게 된다.
아주 살짝 동안이었던? (자칭 아니었음. 오해는 금물.) 예전에는 그 효과가 더 크기도 했다. 비슷한 연령대의 친구처럼 보일 수 있어서 서로 편해지기가 더 쉬웠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서로 눈치 챌 수 있는 세월 앞에서 그 효과도 점차 줄어들고 있겠지만, 그래도 나이를 밝히지 않는 효과가 더 크다는 걸 실감할 때가 많다. 결국 서로 간의 거리감이 꼭 겉모습의 외형이나 실질 나이 탓만도 아닌 것 같다. 우리 스스로가 미리 쌓아 버리는 마음의 벽 설정이 더 큰 문제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번 정동진 여행에서도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절대로 내 나이를 밝히지 않으려는 굳은 심지로? 여기 도착했다. 원래의 내 스타일대로 말이지. 큭.
그런데 저 분들의 눈이 갑자기 말똥말똥 해지셨다. 내 나이 얘기가 나오니깐 궁금해지기 시작하셨나 보다. 그저 아무 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었더니 엉뚱한 추정과 추측들을 하시면서, 너무나 감사한 예상 나이들을 마구 던지기 시작하셨다. 아, 장난기가 또 슬슬 다시 발동하고 있었다.
‘오, 이런. 내가 그 나이라고? 30대? 하하하. 뭐시라?! 30대 중반?! 그 마음 진심이신가요? 영원히 그 마음 변치 않으시길 바랍니다. 큭. 아무리 영업 중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거 너무 덕담이 과하신데? 아, 기왕 장난 시작한 거 진짜 본격적으로 한 번 더 해볼까? 내 나이로 ‘스무 고개’ 놀이를 한 번 해보고 싶네. 크크.’
오랜만에 시작된 동심 놀이를 진짜로 스무 고개 게임을 통해서 더욱 발전시켜볼까 하는 장난기가 또 저렇게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그런 마음을 다시 바로 접어버리고 말았다. 만약에 무언가 내기를 걸고 더욱 진지하게 스무 고개를 하게 된다면, 왠지 그 게임이 거의 바로 허무하게 끝나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름 추적 60분의 다큐멘터리 수준으로 ‘스무 고개’의 게임 현장을 찍고 싶은 나의 소박한? 소망과는 달리, 어쩌면 60분은커녕 추적 30초 만에 진짜 나이의 정체가 완전히 곧바로 밝혀질 것 같은 그런 슬픈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냥 혼자 애잔한 미소를 잔잔히 머금은 채 한마디 여운만 남겨두었다.
“저는 여행 끝날 때까지 죽어도 제 나이를 밝히지 않을 거예요. 큭. 죄송해요. ^^”
지금 이 순간 나는 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이상적인? 마을의 앨리스^^’라고나 할까? 내가 가장 젊어질 수 있는 마법의 동네 같아서 말이다. 마치 정동진역 기차에서 내리면, 조끼를 입고 회중시계를 보면서 늦었다고 허둥지둥 뛰어가는 하얀 토끼 한 마리를 마주칠 것만 같다. 그리고는 여기 방금 도착했다는 나에게 이런 환영 멘트를 날려주지 않을까?
“어서와. 가장 젊은 청년이 60세인 마을은 처음이지??^^;” <If 한 명 제외>
“당신이 가장 젊은 청춘이 될 수 있는, ‘마법의 도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역시 정동진은 매직이다. 너는 나에게 언제나 알게 모르게 뭔가 신비한 기운을 주는구나. 이런...나만의 마법사 같구나! 어째 그리 또 나의 서러움을 미리 알아채고 요런 맞춤식으로 해결해주고 있는 거야. 내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 버린 그 고운 모래 알갱이들을 닮은 듯한...나의 고운 젊음의 시절을 다시 복원해주는 기분이네. 진짜 마법에 걸린 기분이야.
너무 고마워, 동진아. 이렇게 애써 위로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너는 그냥 그렇게 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레 위로가 되어주는구나.
센스 쟁이 동진이. 정말 너는 마법 같은 아이야.
언제나 나에게 힘이 되어주고...위안이 되어주는...포근한 보금자리 같아.
언제나 나를 회복시켜주는 ‘마법의 둥지’
자동으로 젊어지는 느낌을 불어넣어 주는 ‘마법의 동네, 정동진’
근데 여기서 문득 궁금해지는 게 하나 있다. 저 마법의 동네가 지금은 비록 한적한 지방만의 현실이겠지만, 언젠가는 큰 대도시 또한 저런 장면을 마주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을까? 현재의 ‘저출산 현상’이 계속 이대로 더 오래 지속된다면 나중에는 지금의 거대한 대도시들도 모두 저런 ‘마법의 도시’로 변해버리는 거 아니야? 으악. 그러면 그때는 여기 저기 많은 지역이 저런 마법에 걸려서 ‘마법의 동네’로 변신하게 되는 증상이 아주 흔한 사회 현상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거의 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이런 희소성의 가치도 점점 없어지겠네? 어휴, 그런 미래는 상상하기도 싫은 걸. 우선 현재는 여기 마법의 동네부터 얼른 만끽해야지.
여기 정동진에 도착해서 요 며칠 그윽하게 풍기는 인간의 향기에 나도 모르게 취해있던 걸까. 온 몸을 휘감고 있는 어떤 따스한 공기의 기운이 은은하게 마음속까지 퍼지면서 내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특히 오늘은 사람 냄새가 심하게 많이 나는구나. 그런 사람의 향기가 가득했던 하루를 마치고 숙소로 들어와서 마음 편히 스르륵 잠이 들어버린 것 같았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이란 말인가...지금 이 순간, 너무나 평온해서 내 심장까지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오늘 하루가 이리도 평화롭고 달콤할 수가 있다니. 이불 속 온기까지 너무 포근하다. 이 전기장판의 영향 덕분인가...따스해진 나의 마음 상태의 온도 덕분인가...무엇 때문인지 명확치는 않지만 그게 뭐 중요하랴.
근데 꼭 굳이, 여기까지 와야지만 가능했던 걸까. 갑자기 달콤 씁쓸한 맛이 동시에 느껴지는 이 기분은 무엇일까. 너무 행복하고 좋아서 그런 걸까. 평소의 내 고단함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순간 잠시 울적해질 뻔 한 걸까. ‘단짠’처럼 달달함과 짠 내 나는 맛이 동시에 섞인 듯한 묘한 맛이, 기분의 혀끝에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의 피로감 속으로 스며들어서 모두 녹아드는 기분이다. 마치 ‘달달한 멜랑꼴리(melancholy)’의 마음 사탕을 먹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런 오묘한 기운 속으로 마법처럼 빠져 들어가면서 나는 그날 매우 기분 좋게 잠이 들어버렸다. 문득 떠오르는 노래 하나를 머릿속에 연상시키면서 말이지.
현재의 무미건조한 외로움을 잠시 지우기 위해.
과거의 소중한 그리움을 다시 만나기 위해.
멀리 멀리 어디든 떠나자는 그 노래.
하루하루 내가 무얼 하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거진 엇비슷한 의식주로 나는 만족하더군
은근히 자라난 나의 손톱을 보니 난 뭔가 달라져가고
여위어가는 너의 모습을 보니 너도 뭔가 으음
꿈을 꾸고 사랑하고 즐거웠던 수많은 날들이
항상 아득하게 기억에 남아 멍한 웃음을 짓게 하네
그래 멀리 떠나자 외로움을 지워보자
그래 멀리 떠나자 그리움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