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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 Oct 27. 2024

# 진정한 행복의 힘_(feat. 자기 사랑)

feat. HappySad  감정 고찰

너무 분주하거나 고된 일상의 연속이라면 자신의 마음은커녕 몸도 돌볼 틈이 없을 정도로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없을 때가 많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스트레스나 부정적인 감정들이 쌓이게 마련이다. 평소에 이런 것들을 자주 풀어주면서 관리를 해주면 좋겠지만, 바쁜 삶에 치여서 혹은 그냥 참는 게 습관이 되어서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보통은 휴가 때 혹은 특정 시간을 내서 큰마음 먹고 한꺼번에 그런 자신에게 보상을 해주기도 한다. 지금껏 고생한 나 자신을 챙겨주면서 나중에 한 번씩 중간 중간에 그렇게 풀어줄 수 있기라도 하면 그나마 정말 다행이기는 하다. 그런데 어쩌면, HappySad의 증상은 바로 여기서 터지는 게 아닐까.      


자신한테 쌓여가던 감정적 찌꺼기나 마음의 스트레스를 평소에 조금씩 풀어주는 시도와 관리를 꾸준히 했었다면, 그동안 쌓여있는 마음의 피로와 부정적인 감정의 덩어리가 크지 않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어떤 행복을 마주해도 스펀지처럼 그 행복의 크기만큼 거의 그대로 흡수되는 게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분주한 삶 속에서는 그런 일상의 작은 행복들을 자꾸만 뒷전으로 하다가 나중에 아무리 커다란 행복이라도 한꺼번에 몰아서 시도를 하게 되면, 실컷 즐겁다가도 예상치 못한 HappySad 같은 증상이 불쑥 발현되는 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럴 때 보면, 행복 섭취 또한 음식물 섭취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맛있는 음식들을 한 번에 왕창 다 먹어버리려고 하다가 급체를 해버려서 오바이트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오랫동안 쫄쫄 굶주리다가 바로 눈앞에 맛있는 게 너무 많이 보여서 정신을 못 차리고 이것저것 마구 먹어대다가 결국에는 그리 급하게 먹은 것들을 도로 뱉어버리게 되는 거지.      


행복이라는 감정도 어찌 보면 이런 현상이랑 비슷한 것 아닐까. 일상 자체가 과로와 피로에 찌들어 있어서 평소에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거의 섭취하고 있지 못했다면, 행복을 먹고 소화시키는 일종의 ‘행복 위(stomach)’라는 마음의 내장 기관 크기가 자동으로 줄어들은 상태일지도 모르잖아. 만약에 우리 마음속에 감정을 처리하는 여러 내장 기관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행복을 전담하는 행복주머니 같은 ‘행복 위’가 있을 것 같거든. 그냥 직관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슬픔을 느끼고 처리하는 마음의 공간과 행복을 느끼고 처리하는 마음의 공간은 서로 다를 것 같지 않아? 아니면, 같은 공간일지라도 행복만 전담하는 부위가 따로 있다던가 말이지. 그니깐 행복이란 감정을 받아들이고 느끼면서 내보내는 그런 마음의 공간은, 행복을 먹고 소화시키는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는 거니깐 ‘행복 위(stomach)’라고 불릴만한 그 자격이 충분할 것 같다는 거야.





그런데 꾸준히 조금씩이라도 먹어줘야 하는 행복을 평소에는 거의 섭취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화려한 뷔페에서 맛있어 보이는 행복들을 걸신들린 듯이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어버리면, 그 작아진 크기의 행복 위가 소화를 다 시키지 못하고 급체를 해버릴 수도 있는 거지. 행복을 허겁지겁 먹을 때는 그저 너무 좋기만 했는데, 이미 용량이 작아진 행복 위 안으로 갑자기 과도한 행복이 쳐들어오니깐 그걸 다 감당을 못해서 난리가 나고 뒤집어지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이미 먹은 행복들 중 조금은 다시 뱉어내버리게 되는 거야. 슬픔이나 서러움이라는 감정으로 말이야. 즉, 처음에 섭취했던 그 많은 행복을 100프로 모두 다 소화시키지를 못하고 행복 중 일부는 슬픔 같은 부정적 감정으로 다시 내보내는 것이 바로 ‘HappySad' 증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평소에 꾸준히 행복을 잘 섭취해줬다면 위의 크기가 쪼그라들지 않아서, 갑자기 여러 종류의 많은 양의 행복이 들어와도 아주 즐겁게 잘 소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어떤 행복감도 아주 충만하게 100프로 만끽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평소에는 거의 섭취를 못하던 행복을 한꺼번에 처리하려다 보니깐 작아진 위가 놀래서 급체하는 바람에, 슬픔이나 서러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찌꺼기가 다시 내뱉어지는 그런 증상의 느낌이 바로 'HappySad’ 아니었을까. 


과식하면 급체할 때 자동 배설되는 음식 찌꺼기처럼 말이다. 평소에 자주 풀어주지 못했던 부정적인 감정 찌꺼기가 안 그래도 작아진 크기의 위 속에 쌓여있는데, 새롭게 들어오는 행복까지 모두 다 흡수해서 소화시키려면 그 전에 쌓여있던 감정 찌꺼기가 떠밀려서 외부로 배출될 수밖에 없을 것 같거든. 분명히 너무나 행복한데 어디선가 모르게 슬픔이라는 감정이 새어나온 것처럼 말이야. 모든 행복을 한꺼번에 감당하다가 제대로 다 소화시키지 못하는 바람에, 슬픔으로 다시 토해내면서 감정 찌꺼기들한테 방해받고 있던 순간이었을 거다. 

    



그렇다면 나에게 행복이라는 감정이 찾아왔을 때, 온전하게 그 행복감만 있는 그대로 가득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찌 해야 하는 걸까. 무엇보다도, 나도 모르게 어디서 또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르는 HappySad 같은 오묘한 감정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런 Sad 같은 감정들이 쌓이지 않도록 평소에 나의 스트레스와 감정 관리를 하면서 마음 청소를 해줘야 한다. 갑갑함이나 무력감, 불안감과 좌절감 같은 여러 부정적인 감정들이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오랫동안 차곡차곡 쌓이기만 하다보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뭔가 울분의 감정 덩어리들이 묵혀서 어딘가에 박혀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좋지 못한 감정들과 마음의 피로가 생길 때면, 가능한 그때그때 조금씩이라도 풀어주는 습관이나 행위를 의식적으로라도 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의 해소를 분주한 삶에 치여서 거의 스킵하거나 혹은 알아챘으면서도 아닌 것처럼 애써 그런 심리 상태를 부인하거나 또는 무의식중으로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긴 했는데 실제로는 괜찮은 것처럼 착각하게 되어서, 아무런 시도나 노력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지나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별다른 조치 없이 이런 생활이 계속 누적되다 보면 결국에는, 나중에 저렇게 진짜 행복이 찾아왔을 때 엉뚱한 다른 감정들이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바람에 오로지 그 행복만을 실컷 느끼기만 해도 부족한 그런 소중한 순간이 온전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억울한 심정까지 올라올지도 모른다. 내가 이런 행복을 만끽하려고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겨우 이 정도의 행복감을 충만하게 느끼는 것조차도, 왜 이상한 감정에 방해받아야 하는 건가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평소에 행복을 느낄 여유가 많지 않으면, 아이러니하게도 딱 하나 좋은 점이 있기는 하다. 여러 가지 여유가 많아서 일상에서 매일 밥 먹듯이 행복을 자주 느낄 수 있는 사람들보다는, 순간순간의 작은 행복일지라도 매우 소중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항상 행복이 가득해서 옆에 굴러다니고 있는 행복을 발로 차고 다녀도 넘쳐나는 게 행복인 사람들은, 저런 작은 순간의 행복감은 너무 흔해서 귀한 줄도 모를 수 있거든. 마치 넘쳐나는 돈이 방바닥을 굴러다녀서 발로 차고 다니면, 그저 갖고 노는 장난감처럼 느껴져서 돈이 별로 귀한 줄도 모르는 꼬마 아이 같지 않을까. 지폐 돈을 봐도 그저 휴지조각처럼 가지고 노는 갓난아이들의 무지한 해맑음처럼 말이야.


주변에 악(惡)이 넘쳐나면 당연해야 하는 선(善)이 매우 빛나 보이는 것처럼, 행복을 느끼는 게 일상처럼 당연하지 못하고 그럴 여유가 많지 않으면 찰나의 작은 행복도 매우 빛나게 느껴지는 법이다. 아, 그래서 내가 작은 행복도 잘 느낄 수 있던 건가? 자전거나 야경 장면 하나에 행복 가득? 외로워도 슬퍼도 언제나 울지 않는 광인 같은 캔디처럼, 내가 원래부터 타고난 긍정파라서 그런 게 아니었구나. 아, 뭔가 이것도 좀 웃프네. 아니 진정으로 웃픈 사람이네. 행복을 잘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원동력은 어쩌면 반대로 그 이면에 가려진 고통이나 슬픔이 원인이 될 수도 있다니. 슬픔 같은 어두운 감정을 많이 겪어봐서 작은 행복의 순간도 소중한 만큼 더 잘 웃을 수 있는 그런 ‘웃픈 사람’은, 캔디의 ‘선천적인’ 긍정 파워와는 또 다르겠구나. 어쩌면 내면에서 ‘후천적인’ 긍정 파워가 자라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슬퍼봤기에 행복하게 잘 웃는, 그런 ‘웃픈 사람’의 행복 바이러스처럼 말이다.      




이렇게 찰나의 작은 행복을 아무리 잘 느낄지라도 이와 동시에 ‘HappySad’처럼 부정적인 감정까지 잘 느껴지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물론 행복을 자주 느낄 틈이 없을지라도 그만큼 스트레스 해소나 감정 관리를 잘 하는 사람이라면 Happy가 적어도 Sad도 잘 쌓이지 않아서 적은 만큼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 엄청난 격무에 시달리느라 Happy는 적고 Sad는 반대로 쌓이면서 커진다면, 행복을 잘 느끼는 사람일지라도 그만큼 그 귀한 행복이 또 다른 부정적 감정들에 의해서 잘 침범될 수도 있는 것이다. 보통은, Happy가 적은 경우에는 이런 반비례 관계가 더 일반적일 것이다. 자기를 돌볼 틈도 없다면 감정 관리까지 틈틈이 해주는 건 더욱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후천적 긍정 파워까지 장착해서 행복을 잘 느낄 수 있는 사람일지라도, 결국은 평소에 자신의 마음을 돌보면서 감정 관리를 잘 해줘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화분의 나무가 생생하게 살도록 해주려면 꾸준히 물을 주면서 관리해야 하듯이 말이다. 이때 물은 나무에게 수분 연료를 공급하는 ‘생명력의 도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행복감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만끽할 수 있으려면, 화분에 주는 물처럼 꾸준히 감정 돌봄을 해줄 수 있는 행복 도구가 있어야 한다. 즉, 감정 관리나 마음 청소를 해줄 수 있는 ‘행복 도구’나 ‘힐링 수단’이 필요하다. 일종의 ‘정신적 생명력의 도구’처럼 말이다. 누구나 자신의 마음 상태가 태양 빛 아래처럼 언제나 밝을 수만은 없다. 가끔씩 나의 마음이 어둠 속이나 자욱한 안개 속에서 헤맬 때도 있지 않은가. 그럴 때일수록 그 어둠과 혼란을 거둬내고 앞길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우리만의 등불이 필요하다. 마지막 전시관에서 봤던 저 사진 속의 수많은 화려한 등불까지는 아닐지라도,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절망하거나 지쳐있을 때 한줄기 빛을 비춰서 한걸음이라도 나아갈 수 있도록 마음의 기운을 북돋아주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힐링 도구인 ‘나만의 작은 등불’은 나의 삶에서 정말 필요한 자산이다.       



마음의 행복과 평온을 위한 ‘나만의 힐링 등불’은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생각보다 매우 큰 역할을 한다. 나만의 힐링 등불이라는 게 꼭, 엄청나게 대단한 것들일 필요도 없다. 물론 아주 가끔씩 어쩌다가 시도하는 힐링이나 행복의 순간이라면, 커다란 활동이나 장기간 여행처럼 대규모의 형태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에 꾸준한 마음 관리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 하는 작은 일상의 행복이나 힐링 활동이라면, 그저 동네 한 바퀴 산책이 될 수도 있고 조조할인으로 보는 한 편의 영화가 될 수도 있으며 도심 속 교회나 사찰에 들러 신성한 기운을 받으면서 기도 한번 올리는 시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간에 내가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거야말로 나만의 ‘힐링 등불’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감정 자체가 바로, 나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힐링이 되어줄 테니깐 말이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는 그 사람 자체가 우리에게 행복이 되어주므로, 우리 인생길의 ‘힐링 등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새는 함께 하는 사람 대신에 ‘사랑하는 동물’도 많이 키우는 만큼, 그런 반려 동물들 또한 우리의 ‘힐링 등불’이 되어줄 수도 있다. 반드시 꼭 이런 생명체들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생명체 아닌 것들 중에서도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힐링 대상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어떤 취미 생활이나 여행 같은 활동 자체가 즐거움과 평온을 주는 힐링일 수도 있고, 특정한 시공간이나 풍경들도 우리의 힐링 등불이 되어줄 수 있었다. 즉, 아주 소소하고 작은 것들일지라도 우리의 행복 도구이자 힐링이 되어주는 게 가능하다. 코스모스 같은 꽃 한 송이에서 무언의 응원과 위로를 받는 듯한 평온함을 느낄 수도 있고, 온종일 바쁜 일정에 시달려서 무거운 몸으로 잠들기 전에 좋아하는 그림 한 장을 보면서 위안을 받을 수도 있을 테니깐.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코스모스를 갑자기 봄이나 겨울에 보고 싶으면 어떡하지? 가을에만 실제로 생화 꽃을 볼 수 있을 텐데? 만약에 가장 사랑하는 명화의 실제 원본을 벽화처럼 내 방에 걸어둔 채로 매일 밤마다 바라보면서 잠들기 전에 힐링하고 싶으면 어쩌지? 그 원본 그림은 어딘가 유명 미술관에 걸려있을 텐데? 


이럴 경우에는, 아까 첫 번째 전시관의 코스모스처럼 여러 기술의 도움을 받은 ‘미디어 아트’의 효과를 대체재나 보완재로 활용하는 것도 꽤나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짜 생화 꽃은 아닐지라도, 봄, 여름, 겨울에 그 코스모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못 견딜 것 같다면 어쩌겠는가. 하필이면 한파가 불어 닥치는 어떤 겨울 날씨에 유독 절망감을 느꼈던 날이라서, 가을이라도 늦게 피는 굳센 코스모스를 봐야지만 기운이 날 것 같다면 말이다. 이럴 때는 저렇게 미디어 기술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환하게 피어있는 코스모스 불빛을 보면서 그 순간을 살아가는 힘을 내고 다시 기운 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아주 좋은 ‘힐링 등불’이 되어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실제 명화 원본은 너무 고가라서 구입할 여유도 없고 단 하나만 존재해서 내 방으로 가져올 수 없다면, 이럴 때는 나만의 핸드폰 공간에 온라인 그림이라도 저장해두고 매일 밤마다 바라보면서 대리 만족과 대리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힐링 등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가장 만족할 수 있는 힐링 등불을 항상 천연의 자연산이나 원본의 아이템으로 들고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등불이 없으면 성냥이나 촛불로 대체할 수 있듯이 가장 최애 힐링 도구를 항상 옆에 지니고 있을 수 없다면, 이렇게 여러 기술이나 방법과 도구들을 통해서 나의 행복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나만의 ‘힐링 등불’들로 다양하게 구성할 수가 있다.     





이렇게 ‘힐링 등불’은 한치 앞도 모르는 내 삶에서, 어떤 순간이든 단 한줄기 빛이라도 비춰줄 수만 있다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등불 역할을 해주는 것들이다. 내 인생의 항로가 어느 날 갑자기 망망대해 위에서 길을 잃고 어둠 속에 갇혀버린다면 어떨까. 그 새까만 어둠 속의 바다 한복판에 둥둥 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두렵고 불안한데, 설상가상으로 짙은 안개까지 사방팔방으로 깔려있어서 도저히 어디로 항해를 해야 할지 감도 못 잡고 있다면 과연 우리는 그런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꼭 커다란 관점의 인생 항로에서만 그럴까. 막상 내가 현재 처한 현실 속에서 지금 서있는 나의 시공간이 그런 상황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럴 때 과연, 한 발자국이라도 선뜻 자신 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런 어둠의 짙은 안개 속에서는 앞길의 방향이 보이기는커녕 단 한 발자국도 함부로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막막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우리에게 작은 등불이나 성냥 하나라도 주어진다면, 그야말로 우리 삶의 구세주 같은 구원의 불빛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작은 불빛 하나가 바로 우리의 행복 도구이자 힐링 수단에 해당하는 ‘힐링 등불’이 되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불빛을 비추는 순간 나를 둘러싼 어둠이 걷히고 주변의 공간이 환하게 보이면서, 내 앞길 방향으로 한걸음씩 내딛을 수 있게 되고 드디어 숨통이 트이면서 숨을 쉴 수 있을 테니깐 말이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꿈쩍도 할 수가 없고 절망감 가득하게 무력한 상태였는데, 그런 어둠 속에서도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을 낼 수 있도록 해주는 빛이다. 아주 작은 불빛이라서 얼핏 보기에는 보잘 것 없어보여도 현재 내 마음이 깜깜한 칠흑 속에서 헤매다 못해 지쳐있는 상태라면, 아무리 작고 약소한 불빛이라도 매우 밝은 시공간으로 비춰주기 때문에 엄청난 구원의 손길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추운 겨울 안개 속에 갇혀 있는 애처로운 하루살이에게 주어진 등불의 빛과 같다고나 할까. 항상 온갖 여유가 넘쳐나서 매순간 모든 종류의 행복을 듬뿍 만끽하면서 살고 있는 그런 최고의 인생만을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면, 한번쯤은 누구나 저런 고된 심정을 느껴보지 않았을까 싶다. 태생적 환경과 타고난 조건이 너무 특급이라서 굳이 인생의 어려운 시기나 경험을 많이 겪어보지 않은 무난한 사람들도 분명 있을 수 있겠지만, 그들도 한번쯤은 무언가 좌절이나 절망의 심정을 느껴본 적은 있을 것이다. 인생사가 자신의 마음대로만 흘러가지 않을 때도 은근히 많을 테니깐. 그런데 엄청난 환경적인 조건과 부유함을 타고나지 않은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오죽 더 그런 어두운 심정을 많이 느껴봤겠는가. 인생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저렇게 차가운 겨울 속의 안개에 휩싸여서 절망하거나 갑갑한 순간들을 마주했을 테니 말이다.      


우리에게 ‘힐링 등불’ 같은 행복을 위한 도구가 필요한 이유도, 우리의 삶 또한 저런 하루살이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여서가 아닐까. 자신의 앞날을 아주 희망차게 바라보며 빛나는 미래를 꿈꾸고 매우 확신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다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그저 맡겨진 소명처럼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당장 내일의 앞날조차도 예측을 할 수가 없어서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편치 못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안개 속에서는 바로 한발자국 앞의 공간조차도 불투명해서 방향을 잃고 배회할 수밖에 없는 하루살이의 삶처럼 말이다. 우리의 삶 또한 그런 ‘안개 속 하루살이’와 다를 바 없다고 해도, 그것을 과연 과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오늘 하루만 보면서 살아가는 하루살이의 삶. 우리도 그런 ‘하루살이 소시민’의 심정과 비슷할 때가 많을 것 같은데.     


불확실성이 점차 더 커지고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항상 열심히 살아가는 소시민일지라도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내재된 채로 살아가는 것 같다. 그만큼 마음의 평화와 안정이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점점 더 노출이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빠르게 변해가는 현대 사회일수록 아주 가까운 앞날의 예측도 불가능한 만큼, 일상적인 삶의 공기 또한 안개가 자욱한 곳을 거닐고 있는 듯한 느낌에 가깝지 않을까. 그러하니 우리 스스로가 아무리 다부지게 마음을 굳게 먹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매번 매 순간 무너지는 무른 마음을 어찌할 도리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평소 생활 자체가 이런 환경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니, 이로 인해서 우리 마음의 내구성 자체도 어쩌면 더욱 더 연약해지고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요즘 같은 시대에는 ‘힐링 등불’ 같은 자신만의 소중한 자산이자 무기이자 생존 수단이 없으면 점점 더 버티기 힘들어질 수밖에 없을 것만 같다.     



앞길을 잘 예측할 수 없는 안개 속이라서 뭔가 좀 갑갑한 마음일지언정 그 순간 용기를 내어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움직여보면, 방금까지만 해도 바로 앞의 뿌옇고 막막했던 공간이 아까와는 다르게 내 시야에 들어오면서 그 주변이 좀 더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안개 속 하루살이가 가냘픈 날갯짓 한번을 힘껏 할 때마다, 공간 이동을 하면서 바로 앞의 시야를 더 확장할 수 있듯이 말이다. 이때 한밤중 어둠속 안개라서 등불 같은 불빛까지 가지고 움직일 수 있다면 더욱 환하게 밝은 공간이 보일 것이다. 겨우 한 걸음 나아갔을 뿐인데, 그로 인해서 생기는 새로운 공간이 밝게 빛나는 만큼 눈에 보이는 시공간이 확장돼서 더욱 안심할 수가 있다. 더구나 한발자국 앞으로 전진까지 하지 않았는가. 물론 두 걸음 세 걸음 뒤의 공간은 어떤 상태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안개 속에서는 직접 걸어 나가보지 않으면 거의 바로 앞의 공간조차도 잘 보이지 않으니깐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만큼 위험할지도 모른다. 갑자기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미로처럼 어떤 공사판 현장으로 인해서 아예 막혀있는 길일 수도 있고, 발을 헛디디면 완전 저 아래로 추락할 수도 있는 아찔한 낭떠러지일 수도 있으며, 엄청 거대한 야수 한 마리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깐.      




하지만 겨우 한 발자국일지라도 온 힘을 다해서 앞으로 나아가보면 최소한 한 걸음 정도는 더 넓어진 바로 앞의 그 공간은 또 다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살아낼 수가 있다.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작은 힘들을 조금씩 이어붙이면서 간신히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너무나 절망적이고 지쳐있는 상태에서는 처음 한 발자국조차 내딛는데도 엄청 힘이 들 수도 있다. 그래도 일단 처음에 그렇게 기운을 낼 수만 있다면 그 다음 걸음을 내딛을 때는 좀 더 수월하게 힘이 날 수도 있다. 첫 걸음으로 인해 용기와 경험이 늘어났을 테니깐. 더구나 이때 나만의 행복 도구인 ‘힐링 등불’ 같은 존재가 있다면 그 어둠의 여정을 훨씬 더 밝게 비춰줄 수 있기 때문에, 비록 안개처럼 불확실하고 답답한 시공간일지라도 내가 사랑하는 등불의 빛과 함께 매 순간의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오히려 기운차게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발걸음 하나. 


하루살이의 날갯짓 한번. 


어둠 속 불빛 한 조각.           



어둠의 안개 속에서 미세하게 꿈틀거리면서 움직였던 이런 행동들이 아주 사소해보여서 별거 아닌 것들 같지만 결국에는 절대로 작은 것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작은 발자국...작은 날갯짓...작은 불빛...이런 작은 몸짓들이나 작은 빛 한줄기 덕분에 우리는 오늘 하루를 또 한 번 다시 살아갈 힘을 낼 수 있고, 한 조각 불빛이 비추고 있는 이 작은 시공간만큼은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안심하면서 평온하게 살아갈 수가 있다. 그렇게 뿌연 안개 속에서는 비록 바로 앞의 자그마한 공간만 보일 뿐이지만, 막상 한 걸음이라도 더 걸어보면 그 앞의 공간이 그만큼 더 보이게 돼서 그 순간을 또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러면 이런 힘에 탄력을 받아서 다시 한 번 또 한 걸음을 더 내딛을 수 있는 새로운 힘들이 연달아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이동할 때마다 생기는 안개 속 누더기 공간을 한 땀 한 땀 박음질하면서 새롭게 확장하는 것처럼, 내 삶의 시공간도 생존형 바느질로 누덕누덕 간신히 이어붙이면서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인간 하루살이’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 자신 아닐까. 한치 앞의 삶도 모르기에 그저 주어진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고 있을 뿐인 그런 우리의 모습은, 마치 내일은 없기에 오늘 하루만큼은 장렬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그런 처절한 하루살이의 모습과 닮아 보이니깐 말이다. 오늘 하루만 살아갈 수 있다는 그 시간적 제한의 느낌 또한, 한밤중 안개 속에서 내가 서있는 이 작은 공간만 볼 수 있다는 그 공간적 제한의 느낌과도 어우러져서 ‘안개 속 하루살이’의 애잔함을 더욱 증폭시키는 듯하다.     



이렇게 작은 불빛과 같은 우리만의 행복 도구인 힐링 등불은 정말로 너무나 소중하다. 특히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삶이 깊은 어둠 속의 뿌연 안개 같은 미로 속으로 빠져버리게 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 빠져나오는 것이 매우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인생길에서 그런 미로의 안개 터널을 지나는 시기를 마주치게 될 때, 커다란 절망감으로 풀썩 쓰러진 채 앞이 보이지 않는 그런 막막한 심정으로 주저앉아서 나의 서글픈 운명과 그런 갑갑한 주변 환경 탓만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 그냥 그렇게 제자리에 멈춰선 채로 꼼짝없이 갇혀서는 무너지기만 해야 하는 걸까. 이럴 때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우리만의 힐링 등불이다. 우리 인생이 밝은 대낮에 있는 상태라면 행복을 줄 수 있는 도구가 되어줄 테고, 비록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빠져버린 상태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내가 한걸음 내딛을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 되어주는 도구가 되어줄 테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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