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Animal Healing
정동진 바다는 작아도 자신만의 특별한 매력이 있어서 너무 좋아하지만, 그런 바닷가를 제외하면 마을 주변에는 의외로 관광지가 많지 않은 편이다. 해변가 옆에 있는 아주 작은 모래시계 공원과 언덕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면 볼 수 있는 썬크루즈 조각 공원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런데 대중교통이나 개인 차량을 조금만 이용하면 쉽게 닿을 수 있는 몇몇 주요 관광지들이 근처에 있기 때문에, 바다뿐만 아니라 다른 구경거리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관광지들 중 하나인 곳이 바로 ‘하슬라 아트월드’라고 할 수 있다.
하슬라 아트월드 건물 외부 자체부터가 ‘종합 예술 공간’이라는 그것의 정체성답게 알록달록한 색상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사각형과 X자형 혹은 대각선 등의 여러 도형들이 혼재되어 있는 기하학적인 모습이었다. 진짜 말 그대로 종합적인 예술 감각으로 꾸며놓은 것처럼 보였다. 왠지 그 건물 안의 내부 모습 또한 저렇게 각양각색의 매력을 풍기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조금은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입구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미리 온라인으로 예매한 입장권을 보여준 후에 한걸음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내 눈은 바로 휘둥그레졌고 동시에 마음속에서는 조용한 탄성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우와. 입구부터 아주 거대한 규모로 꽤나 화려한 장식품들이 곳곳에 멋지게 늘어져 있었다. 그냥 첫눈에 봐도 딱. 매우 감각적인 느낌의 색채와 모양들로 이루어진 분위기였다. 입장하자마자 기분이 좋아져서 뭔가 벌써부터 내 마음이 구름 위에 붕 떠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반쯤 상기된 기분으로 안내 방향에 따라 이동하는 와중에 현대 미술관 구역으로 이어지는 곳에서 이런 문구가 보였다.
하슬라 아트월드는 외부 정보에 의존하는 예술 감상법을 거부하고
최소한의 정보로 자율적 감상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다각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예술이라는 권위에 위축되거나 소극적인 관람이 아닌
자유롭게 작품과 자연을 감상해 보세요.
솔직히 나는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아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감상하는 것 자체는 은근히 참 좋아하는 편이다. 어떨 때는 예술 관련 지식이 별로 없는 게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아무런 배경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감상하게 되는 그 순간에 느낄 수 있는 감정적인 자유로움은, 마치 내가 원래는 엄청난 식견을 가진 거장의 예술가였는데 그런 분야의 전문 지식에서 벗어나 나만의 감성과 시선으로 무언가를 날것 자체로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해방감처럼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목이 마를 때 차가운 음료수를 마시면 느껴지는, 그런 일종의 시원한 청량감 같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마냥 아이처럼 즐겁고 신나서 혼자만의 기분에 푹 빠질 수 있는 그런 느낌과도 닮은 듯하다. 뭐랄까. 나만의 마음속 시공간에서 지금의 내 나이를 잊은 채로,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마구 뛰어놀아도 되는 어른이 느끼는 해방감이랄까. 그래서 그런지 저 문구에 담겨있는, 하슬라 아트월드의 감상 취지가 나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외부 정보에 의존하지 않고 최소한의 정보로 자율적 감상을 유도하고자 하는 의도와 취지에서, 내면에 존재하는 나의 어린 아이 같은 청량한 자유로움을 존중해주고 싶어 하는 어른의 넓은 마음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거든.
요렇게 기분이 또 한 템포 살짝 더 좋아져서 미술관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따라 한걸음씩 천천히 이동을 했다. 그런 이동 경로 중에도 주변 벽이나 작은 공간을 활용하여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것들이 많아서 내 눈이 즐거워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얼핏 보기에는 유리 구두 같지 않았지만 분홍빛을 띄는 구두가 내 눈에 확 들어왔다. 그런데 저 구두는 유리 구두도 아닌데, 지금 나한테는 왠지 ‘신데렐라 구두’처럼 보이는 이유가 뭘까.
현대 미술관으로 들어서는 길목 근처에서 거의 처음부터 이런 구두를 마주치게 되니깐, 마치 내가 동화 속 신데렐라가 되어서 저런 핑크빛을 발산하는 유리 구두를 신고 그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차려 입고는 화려한 무도회장으로 입장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였을까. 지금 나는 막상 편안한 운동화를 신고 있고 아주 프리한 옷차림이다. 그런데 들어오는 입구부터 예술적인 분위기와 감각을 확 느끼게 해주는 하슬라 아트월드의 본격적인 감상이 시작되고 있는 이 지점에서, 저런 여성스러운 구두가 보이니깐 신데렐라의 모습이 연상되면서 나도 모르게 그런 감정 이입을 하고 있던 것이다. 매일 건조한 일상이 반복되는 분주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오색찬란하게 아름다운 시공간으로 이동하게 되니깐, 평소에는 미친 듯이 열심히 사느라 공기 중의 먼지에 뒤범벅이 되어버린 ‘재투성이 일꾼’처럼 살다가 갑자기 예술적인 궁궐로 입장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 아닐까.
평소에는 계모와 언니들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하면서 모든 일을 혼자 떠맡아서 하느라 재투성이었던 신데렐라가 드디어 그런 일상에서 해방되어 그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뿜어내면서 화려한 궁궐 안으로 들어가듯이 말이다. 황금 마차에서 내리는 그녀의 발에는 저렇게 보석 같은 분홍빛 유리 구두가 신겨져 있지 않을까. 오늘은 드디어 그런 먼지투성이 일상에서 벗어나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모습으로 가장 멋진 곳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어 있겠지. 왜냐하면 이 유리 구두를 신고 있으면 오늘 밤 12시까지는 이 궁전에서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살 수 있을 테니깐 말이다. 나중에는 아예 그 유리 구두의 진짜 주인공이 되어서 시간제한 없이 평생을 그 곳에서 행복하게 살게 되지만, 그 결말을 모르고 있던 신데렐라는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했을까.
우리도 어딘가로 멀리 여행을 가게 되면 언제 또 다시 쉽게 찾아올 수 있을까 싶어서 그 순간이 매우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정말 좋았던 여행지는 다시 찾게 되는 것 같다. 정동진 또한 그래서 내가 평생 함께 할 좋은 곳으로 마음에 품었던 거였을까. 아마 나도 처음에 이 곳에 왔을 때 첫 느낌이, 마음의 유리 구두를 신은 것 같은 기분이었나 보다. 평소에 가득 쌓였던 내 마음 속 먼지투성이를 동진이가 모두 훌훌 털어주면서, 일상 속 재투성이었던 내 마음을 그 순간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데렐라처럼 만들어줬으니 말이다. 넘실거리던 파도의 물결처럼 동진이랑 마음의 춤이라도 추고 있던 걸까. 음악 선율 같았던 바닷소리를 배경으로 동진이와 쏘울의 춤을 추던 그 순간들이, 나한테는 꽤나 위로가 되어주고 행복했던 거겠지. 너무나 갑갑하고 힘들었던 일상에서 나를 구조해준 ‘신데렐라의 왕자님’처럼 말이야.
‘나도 지금 이 입장권을 가지고 있는 이상, 여기 이곳처럼 아름다운 곳을 오늘 하루만큼은 일상에서 벗어나 실컷 감상할 수 있는 거잖아! 신데렐라가 저렇게 예쁜 구두를 신고 있는 이상, 일상을 탈출하여 가장 아름다운 궁전 안에서 가장 멋진 왕자님과 실컷 춤을 출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야! 입장권 너가 바로, 오늘의 내 유리 구두로구나! 그렇다면 이런 산뜻한 기분으로 감상 시작 고고. 오예.’
이런 동화 속 상상 기법 또한, 하슬라 아트월드의 감상 취지에 맞는 일종의 자유로운 감상법이 아닐까?!^^
하슬라 아트월드의 내부는 크게 하슬라 미술관과 피노키오 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대미술관은 제 1관에서 제 3관까지 구분되어 있고, 피노키오 박물관은 공간이 매우 커서 볼거리들이 구석구석 꽤나 많은 편이다. 중간에 레스토랑과 카페도 있고 내부 관람이 다 끝나면 외부로 나오는 길로 이어지면서 커다란 야외 조각공원도 볼 수가 있다. 발걸음 닿는 대로 이동하다보면 순차적으로 자연스럽게 관람이 가능하다. 그렇게 우선 현대 미술관 제 1관부터 들어가게 되면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오는데, 어딘가 모르게 포근한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스르륵 녹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모든 것이 무장 해제되어 버린 듯한 그런 소프트한 아이스크림처럼 말이지.
여러 예술 작품들과 조각상 같은 것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슬라 아트월드의 감상 취지에 맞게 설명이 많지 않은 만큼 무슨 의미인지는 정확히 잘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바라보는 그 순간의 느낌만으로도 뭔가 충만해지는 기분이었다. 보통은 작품 하나마다 작품명과 작가 이름만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두 가지 정보만 명시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내 눈에 띄는 오묘한 작품이 있었다. 특히 두 개의 작품을 연달아 보니깐 문득 갑자기 떠오르는 오묘한 생각도 스쳐지나갔다.
‘신기루’라는 작품이 나에게는 오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 한 대가 보였지만, 그 피아노는 정작 하얀색 그물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차마 아무도 그 피아노 뚜껑을 열어볼 엄두도 낼 수 없어 보이는 작품이었다. 그 피아노는 분명 제 기능을 하게 된다면 아주 아름다운 선율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을 텐데, 뭔가 하얀색 거미줄에 묶여서 꼼짝달싹 못하는 상태처럼 보였다. 그저 예쁜 피아노의 겉모습만 눈에 환영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접근할 수가 없는 피아노라서 실체 없는 신기루와 같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던 걸까.
하얀색 밧줄로 묶여 있는 저 피아노를 구조하여 풀어준다면 그 아름다운 연주 소리를 들을 수는 있는 걸까. 막상 힘들게 풀어줘도, 오래 묶여 있었기에 녹슨 손발이 저려서 꼼짝도 못하고 제 기능도 못하는 건 아니겠지? 긴급구조를 위해 저 하얀 그물을 풀어헤쳐서 없애버리면 주변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터지면서 사라지듯이, 저 피아노도 같이 사라져버리는 그런 환상에 불과한 신기루는 아닐까? 만약에 진짜로 그런 신기루 같은 피아노라면 아무리 신비로워 보일지라도 그저 허공에 존재하는 가짜 이미지일 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평범해 보일지라도 실제로 직접 연주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진짜 피아노가 훨씬 더 가치 있는 것 아닐까.
그런데 나는 왜 순간적으로, 저런 신기루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의 현실과도 별반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구성원 개개인 모두에게 어떤 진실과 정보가 평등하게 공유되거나 접근 가능한 공정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한 경우가 의외로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적인 정보와 사실만으로 형성되어 있는 ‘나만의 신기루 같은 현실’만 보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각자의 신기루처럼 정보가 평등하게 공유되지 못하는 ‘정보 비대칭성’은 우리 주변에서도 은근히 많이 발생하고 있는 현상일 것이다. 물론 사적 정보는 개인의 취향이나 선호에 따른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공적 정보까지 이런 현상이 만연하다면 바람직하지 못한 경우가 종종 발생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과연 어떤 기준점이 형평성이나 공정성을 위한 토대가 될 수 있을까. 처음에 주어지는 출발점부터가 서로 각자 상이하게 다른 정보 판에 있는 것이라면, 과연 누가 더 옳은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나 기준점을 어떻게 마련할 수가 있겠냐는 것이다. 더구나 저런 정보 비대칭성이 우리 삶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우연적인 과정이 아니라, 힘과 돈이 지배하는 우위 세력에 의해서 고의적이거나 악의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라면 더욱 심각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더구나 어떤 정보를 소유하고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에 따른 ‘정보 비대칭성’ 뿐만이 아니라, 동일 대상에 대한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거짓 정보나 올바른 사실이 아닌 경우에는 ‘정보 왜곡’ 현상까지도 많이 발생할 수가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한테 ‘정의의 여신’이 진짜로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기루’ 작품의 피아노 근처에 존재하던 저 조각품 같은 ‘정의의 여신’처럼 말이다.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고 한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올바른 심판에 대한 의지를 상징하는 것 같아서 멋져 보이기는 하지만, 저런 액션을 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올바른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눈과 혜안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즉 신기루 같은 오묘한 현실 속에서 올바름과 부당함을 판단하기 위해서 그 전에 더욱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에게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저런 신기루처럼 왜곡되어 있는 혼란한 세상을 먼저 제대로 바라보고 파악해줄 수 있는 그런 지혜와 계몽의 눈을 가진 ‘정의의 여신’이 아닐까.
갑자기 저 두 개의 작품을 보니깐, 왜 우리의 현실과 오묘하게 오버랩(overlap)되는 것처럼 보였을까. 그냥 뭔가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신비로워 보였지만 그 뒤에 바로 따라오는 쌉쌀함은 아마도, 나 또한 힘도 없고 돈도 없는 약자들 중 한명으로서 나만의 약소하게 작은 신기루 현실 속에서 그저 묵묵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 같아서 그런 무력감이 언뜻 스쳐지나가는 맛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장미 & 뒷모습
원래는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를 신고 입장한 기분처럼 마음이 말랑말랑 했었는데 신기루 같은 오묘한 작품 덕분에 잠시 사색으로 빠져버렸던 나를,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너무나 아름다운 ‘장미의 방’이 아주 환하게 다시 반겨주었다. 위의 왼쪽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방팔방이 탐스러운 장미꽃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 방에 있으면 나도 꼭 같은 꽃이 되어서 꽃밭에서 뒹구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내 눈을 홀려버리는 예쁜 꽃들로 장식된 공간들이 꽤나 많았다.
그리고 미술관답게 여러 유형의 크고 작은 그림 작품들 또한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위의 오른쪽 그림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모자가 달린 편안한 후드 티를 입은 한 여성이 뭔가 다급한 듯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급히 어딘가로 향하는 그 뒷모습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황급하게 떠나는 그 모습에서 평소에 분주하게 열심히 살았던 그녀가 짬을 내어 자신을 위한 시간을 스스로 만들어주는 자유로움이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인지 출장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분위기가 우러나오는 모습이었다. 그 유명한 광고 카피의 말이 저절로 떠오르듯이 말이다.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
어라?! 어딘가 모르게, 우리의 신데렐라한테도 어울리는 말처럼 들리는데!?
‘재투성이처럼!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 그대만의 궁전으로! ^^’
진짜로 갑자기 나의 시공간이 어딘가로 확 아주 멀리 떠나는 듯한 기분으로 만들어주는, 요렇게 신기한 형형색색의 동굴 같은 통로도 중간에 지나칠 수가 있다. 여러 색상으로 빛깔이 바뀌면서 다양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에, 색이 변할 때 마다 꼭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현대미술관 3관까지 모두 다 관람을 마치고 나면 ‘피노키오 박물관’으로 이동하게 된다.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고 꽤 커다란 규모의 공간에 구석구석까지 가지각색의 피노키오들로 꾸며져 있다. 피노키오 인형을 연상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한 가지 정도로 고정된 편이었는데, 정말 많은 종류의 버전으로 각양각색의 모습을 띄고 있는 피노키오 조각품들과 인형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의 신성한 모나리자와 반 고흐의 자화상 그림까지도 피노키오의 기다란 코 모양으로 만들어서 전시하고 있었을 정도로 말이다.
계속 눈으로만 관람을 하던 와중에 좀 더 귀여운 모습의 아이 같은 피노키오 조각품이 보였다. 마침 그 공간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조용한 편이었고, 그 피노키오는 다른 유형들보다 더 꼬마 아이라서 그런지 코 모양도 더 몽글몽글하게 귀여운 편이었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건지 그 꼬맹이의 코를 한번 움켜쥐어 보았다. 그렇게 그 조각품 아이와 같이 놀고 싶었던 걸까. 분명히 처음에는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손이 갔던 것 같은데, 나중에는 괜히 그 꼬마 피노키오한테 괜한 투정을 부리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야 말았지 뭐야.
오 마이 갓.
“안녕. 얘야. 너는 피노키오인데 왜 모자도 안 쓰고 있고, 오히려 더 귀엽게 생긴 것이냐.
근데 너는 무슨 거짓말을 해서, 이렇게 코가 길어졌니? 거짓말을 얼마나 많이 한 거야?
너는 착하게 생겼는데도 거짓말을 했구나. 혹시 너도 하얀 거짓말을 한 거니??
상대방이 별로 알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면, 하얀 거짓말도 참 좋을 수도 있겠지.
아니, 그런 거라면 굳이 거짓말을 하느니. 차라리 그냥 함구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그런데 과연, 화이트 거짓말은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너가 아무리 좋은 의도로 한 거라도, 상대방이 원치 않는 하얀 거짓말이라서 힘들어 한다면?
혼자만 하얀 미소를 띄는 바보 인형이 되느니, 차라리 진실을 아는 게 덜 괴로울 것 같다면?
과연 하얀 거짓말이 항상 좋은 걸까? 결국 상대방의 의사가 먼저 존중되어야 하는 것 같아.
아무튼,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을 일방적으로 하는 건! 화이트 거짓말이 아니라고!
그건 검은 거짓말일 뿐이라고! 에잇! 코를 비틀어서 꼬집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