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Light Healing
정동진에서 강릉까지는 기차로 한 정거장 차이라서 대략 15분 정도가 소요되는 아주 가까운 거리이다. 우선 기차로 강릉역까지만 도착하면 정동진에서 멀지 않은 강릉의 주요 관광지까지 대중교통으로 쉽게 도착할 수 있는 방법들이 많은 편이다. 그런 대표적인 관광지들 중 하나로 ‘아르떼 뮤지엄(ARTE MUSEUM)’이라는 곳이 있다. '아르떼 뮤지엄'은 세계적 수준의 디지털 디자인 컴퍼니 ‘디스트릭트’가 선보인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관이다. 2020년 9월 제주 애월에서 첫 아르떼뮤지엄을 오픈했고, 제주의 성공으로 2021년에는 여수와 강릉에도 오픈했다. 특히, 강릉에서는 밸리(valley)라는 테마로 백두대간의 중추인 강원도와 강릉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다채로운 미디어아트 전시가 1500평의 공간에서 펼쳐진다.
미디어 아트(Media Art)란, 그 구성에 있어서 대중매체를 활용한 예술을 의미한다. 즉, 멀티미디어 같은 기술(Technology)을 활용하여 예술(Art) 표현을 확장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예술과 기술의 융합' 장르인 것이다.
미디어 아트라는 장르는, 들어보기는 했어도 자주 체험했던 편은 아니었던지라 호기심 반 설렘 반의 심정으로 출입구 쪽으로 들어섰다. 어떤 형태의 예술일지 대략적으로 상상은 되었지만 진짜 실체는 또 어떨지 궁금했다. 왠지 내가 좋아할 것 같은 유형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무언가에 푹 빠지는 그런 순간을 좋아하는 편인데 ‘몰입형 미디어 아트’라는 용어에서, ‘몰입형’이라는 어감이 왠지 그런 나의 선호도를 증가시켜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몰입형 미디어 아트’는 공간 기반 콘텐츠로서, 테크놀로지와 예술을 융합하여 공감각적 체험을 통한 관람객의 몰입을 끌어내는 미술 형식이라고 한다. 아마도 공간 활용의 그런 다양한 가능성이 예술적 감상에 대한 몰입도를 향상시켜주는 환경을 제공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나 보다. 여러 가지 기술들로 많은 유형의 색상과 빛이 활용되는 것 같아서 그런 분위기에 흠뻑 빠져서 심취되고 싶기도 했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아무런 걱정과 잡념이 없는, ‘티 없이 맑은 몰입’의 천국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좋을 것 같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약간의 기대감과 함께 살짝 상기된 마음으로 입장권을 사서 첫 번째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전시관의 테마는 ‘꽃(Flower)’이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코스모스였다. ‘가을의 꽃’ 코스모스는 가냘픈 허리선의 줄기가 하늘하늘하게 바람에 부대낄 때면 더 연약해보여서 그런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늦게라도 피어나줘서 고맙고 대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자신만의 독보적인 존재감을 은은하게 드리우고 있는 것 같은 그 분위기에서 왠지 애잔한 향기가 흘러나올 것만 같은 꽃이다. 그래서 그런지, 수많은 꽃들 중에서도 이런 코스모스가 메인 테마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고 입구 쪽으로 설레는 한걸음을 내딛었다. 그 순간. ‘와아!’ 그 신비로운 공간에 발을 들이자마자 바로 탄성부터 절로 우러나오고 말았다.
전체 공간이 너무 아름다운 코스모스의 빛깔로 잔뜩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공간의 벽면과 바닥까지 각양각색의 코스모스 이미지의 불빛들이 나풀거리면서 작은 몸짓들로 춤추고 있었다. 벽면에는 거울이 활용되어 사방팔방 코스모스들로 둘러싸여 있는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고 귓가를 간질이는 듯한 공기의 바람 소리와 꽃내음의 분위기가 어우러져서 마치 향기로운 꽃방석에서 기분 좋게 뒹구르고 있는 꿈같은 기분이 절로 들었다. ‘아, 이게 바로 미디어 기술과 거울 같은 도구를 결합하여 예술적인 공간의 느낌을 더욱 증폭시키는 미디어 아트구나’라는 느낌이 팍 드는 동시에, 혼연일체가 되어 완전 흠뻑 빠져서 몰입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순간에 매료되고 말았다. 사진으로는 진짜 그 느낌을 다 담을 수가 없어서 아쉬울 정도였다.
평소에는 길가의 코스모스를 지나칠 때면, 바람에 의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녀들의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좀 연약해 보이고는 했었다. 코스모스를 받치고 있는 줄기들이 꽃을 지탱하면서 그 아름다움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기에는 너무 가녀린 느낌 같았다고나 할까. 가을 공기 바람에 의해서 이리저리 허우적대는 코스모스 꽃들이 갑자기 바람의 강도가 세지기라도 하면 훅 쓰러질 것만 같아서 그런 나약함이 불안해 보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전시관의 소개 글을 보면, 이렇게 가늘고 약해 보이는 코스모스(cosmos)의 원래 의미는 반대로 아주 거대한 ‘우주’와 ‘질서’를 뜻한다고 한다. 혼돈을 의미하는 ‘카오스(chaos)’의 정반대 의미 말이다. 저렇게 한없이 나약해보이기만 하는 꽃이 만물을 아우르는 ‘우주’를 의미한다니. 그것도 주위 만물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질서’의 상태를 의미하는 관념적인 우주를 나타내는 뜻이었다니.
바람에 의해서 힘없이 가냘프게 이리 저리 휘청거리느라 항상 혼란스러울 것 같은데도 그런 혼돈이 증폭되는 ‘카오스’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무질서하던 그런 바람조차도 새로운 평화의 질서로서 다루는 ‘우주’ 공간을 매 순간 또 새롭게 만들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주변의 바람과 공기와 함께 조화롭게 어우러지면서 말이다. 가을 날씨의 서늘하고 거센 바람으로 인해 불안정하게 흔들리면서 시달리기만 하던 꽃이 아니라, 날선 바람도 시원한 산들 바람처럼 만들면서 우주 공간의 새로운 질서를 유연하게 창조해내고 있던 그런 전지전능한 여신 같은 꽃이었던 걸까. 지금 여기 이 코스모스의 예술적 공간에 서있으니깐 그런 느낌이 더욱 물씬 풍겨져 나오는 것 같았다. 가을바람의 공기 속에서 픽 쓰러질 것만 같았던 애처로운 꽃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의 산들 바람과 함께 리듬을 타면서 코스모스 자신만의 아름다운 매력을 더욱 발산하고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예술적 공간에서는 같은 사물도 엄청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에 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관점과 시선의 차이에 따라 같은 꽃이라도 완전 다르게 보일 수가 있구나.
따라서 자신만의 관점과 의지를 형성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는, 이렇게 제법 괜찮은 공간으로 이동해보는 것도 꽤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딱 허허벌판의 코스모스와 이런 예술적 공간의 코스모스를 비교해 봐도 완전 그 차이가 확 느껴지는 것 같지 않나. 흡수할 수분조차 충분치 않은 척박한 땅에서 피어난 코스모스가 바람까지 매서운 공간에 있다면, 안 그래도 타고난 줄기도 약한데 항상 메마르게 야윈 상태에서 거센 바람까지 불어오면 뿌리 뽑힐 듯이 세차게 흔들리느라 정신을 못 차리는 그 꽃은 얼마나 불쌍한 것인가. 기껏 자신의 힘으로 뒤늦게 겨우 간신히 꽃이 피어났어도 그 보람을 느끼기도 전에 강풍의 세파에 또 시달리느라, 자신의 꽃을 힘들게 피워낸 감격도 느낄 틈조차 없어져버린 아주 가녀린 코스모스일 테니 말이다. 저렇게 위태위태하면 다음 가을에는 과연 또 다시 피어날 수 있을까. 상상만 해도 너무 가여워서 내가 다 눈물이 날거 같구나.
하지만 기술과 예술의 환상적인 조합이 넘쳐나는 이런 공간에서는 우리의 코스모스가 얼마나 아름다운 여신처럼 보이는가. 자신의 매력과 모든 잠재력을 뿜어내면서 주변 공기까지 평화롭게 아우르는 신비로운 우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꼭 여기처럼 미디어 기술의 도움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는 코스모스의 모습까지 비교해야지만 수긍이 되는 건 아닐 것이다.
그저 바람이나 습도가 너무 강렬하게 극단적인 환경이 아닌 온화한 날씨의 지역이라면 수분이 충분한 양질의 땅에서 피어난 코스모스는, 주변의 살랑대는 바람들과 함께 나비처럼 나풀나풀 춤을 추듯이 흥겹게 움직이는 모습으로 매순간을 그렇게 즐기듯이 피어있는 한 폭의 그림 같은 꽃이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이 얼마나 큰 차이란 말이냐. 똑같은 품종의 꽃이라도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에 따라 완전 달라질 수 있지 않은가.
특히, 코스모스처럼 자신의 몸을 가누기도 쉽지 않아 보이는 허약한 줄기를 가지고 태어난 꽃이라면 더더욱 큰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의 꽃을 피워낸 공간에 따라, 눈물이 날 수도 혹은 미소를 머금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깐. ‘고된 시련의 공간’이냐, 아니면 반대로 ‘융합의 우주 공간’이냐에 따라서.
코스모스 이외의 다른 예쁜 꽃들의 이미지도 보였고, 이런 식물들뿐만 아니라 동물들 또한 여러 기술들에 의해서 아주 생동감 있게 표현되고 있었다. 정글 배경에서 금방이라도 바로 튀어나올 것처럼 눈빛과 자태가 아주 리얼(real)한 호랑이도 있었고, 어떤 화면 속의 사슴은 실제로 터치하거나 쓰다듬으면 색상이 변하거나 움직이면서 서로 교감을 할 수 있는 체험형 전시관도 있었다. 이런 생명체들은 마치 진짜로 살아있는 듯한 모습처럼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했던 것은 바로, 엄청난 대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감격스러운 장면들이었다. 장엄한 폭포의 경이로움, 초대형 파도의 울림, 쩌렁쩌렁한 천둥 번개 소리와 같은 모습들 말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역시나 바닷가의 파도 물결이 넘실거리는 해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제일 좋았다. 현실에서도 바닷가 해변을 좋아해서 더욱 그런지도 모르지만, 실제의 바다보다 더 멋져보이게 몽환적이면서도 영롱한 모습을 띄고 있었다. 찬란한 오로라 빛을 머금고 있는 바다라서 그런지 아주 아름다운 색상의 여러 빛깔들이 섞여서 어우러진 모습들은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 빛들을 배경으로 바다의 물결은 살아 숨 쉬듯이 움직이고 있었고 찰싹거리는 파도 소리가 가득한 해변을 느낄 수 있었다.
커다란 벽면과 바닥이 모두 멋진 바다의 모습이라서, 어느 위치에 앉아있거나 서있든 간에 내가 마치 아주 웅장한 바다의 대자연 속 현장에 실제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아무데나 앉아서 아름다운 불빛들을 뿜어내는 바닷가 풍경에 흠뻑 빠져있는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하던지. 실질적인 바다의 실체는 아닐지라도 이런 미디어 음향과 조명 효과의 도움을 받아서 진짜로 바다에서 힐링하는 기분을 만끽할 수만 있다면, 이런 행복감 또한 정말로 소중한 것 아닐까. 어디 이런 대자연뿐이랴. 실제의 명화 같은 미술작품도 이런 빛의 기술 효과를 활용하여 여러 유명한 그림들을 볼 수 있는 전시회 코너도 있었는데, 나의 이런 생각이 더욱 확고해지는 느낌이었다.
우리나라 작품으로는 조선 시대의 화가 ‘김홍도’의 그림들을 볼 수 있었고, 해외의 유명 작품으로는 오스트리아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와 역시나 우리의 멋진 화가 반 고흐(van Gogh)의 작품들을 아주 커다란 공간에서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명성이 자자한 최고의 작품들이 아주 화사한 불빛들과 어우러져서 더욱 찬란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거대한 스크린들로 둘러싸여 있는 넓은 공간의 한복판에 서서 어느 방향을 바라보더라도 대형 사이즈의 여러 미술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정말 매순간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뭐랄까. 시공간을 초월한 몰입의 행복감이랄까. 마치 타임머신과 비행기를 번갈아 타면서 동서양을 아주 쉽게 가뿐히 이동하고 몇 백 년 전의 시대로 사뿐히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렇게 온갖 시공간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 수많은 명화들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여러 자연 풍경의 모습들도 너무 멋들어지게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나는 화려한 등불들이 하늘 위로 날아가는 저 멋진 장면을 보는 순간 자동으로 끌릴 수밖에 없었다.
‘어? 저 화면은 뭔가 낯익은데?
아 맞다. 실제로 본적이 있는 것 같네.
바로 눈앞에서 저런 현장을 마주하게 되면,
정말 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느낌이지.
저 명장면이 너무 놀라워서 순간적으로
내가 일시 정지 화면처럼 굳어버리게 될 정도거든.
너무 멋진 야밤의 축제 모습에 홀려버린 기분이니깐.’
그때 옆에 같이 있던 또래의 동생이 바로 저런 장면에서 갑자기 눈물을 글썽였는데, 처음에는 그저 감성이 풍부한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녀의 눈물이 뭔지 나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 또한 뭔가 살짝 가슴에서 뭉클한 게 느껴졌는데 완전히 발산하지는 못하고 있던 그런 감정들이,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칫하면 나의 내재되어 있던 눈물주머니도 터뜨릴 뻔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 순간 울컥했던 것이다. 행복한 장면을 보면 웃음과 미소부터 나와야 하는데, 희한하게도 정반대로 눈물이 먼저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거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가만 생각해보니깐, 나도 캐나다에서 그런 감정을 종종 느꼈던 것 같다. 어쩌면 신나게 놀거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가게 되는 단기의 해외여행이 아니라, 잠시라도 일상의 삶처럼 살았던 시공간이라서 그런 기분이 불쑥 찾아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여행처럼 온종일 구경하러 돌아다니거나 재미난 이벤트를 경험하기만 하는데도 벅찬 시간이었다면, 노는데 바빠서 그런 감정이 불시에 찾아오는 게 쉽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깐. 그런데 똑같은 활동이거나 비슷한 일상일지라도 그 자체가 거주하던 시간이라서 그랬는지, 평소의 일상적인 삶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여러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불현듯 찾아올 때가 있던 것 같다.
분명 너무 행복한 순간인데 이상하게도 문득 슬퍼져. 진짜 행복해서 미칠 것 같은데, 묘하게도 눈물이라는 녀석이 어디선가 갑자기 날라 들어와서 찔끔찔끔 나오려고 해. 그렇다고 뭐, 엄청 크고 대단한 즐거움이나 행복의 장면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게 더 의외인 것이다. 그런 거면 차라리 감격의 눈물이라고 할 수도 있지. 올림픽에서 1등 하면 그동안 고생한 노고로 인해서 상반된 눈물이 날 수도 있을 테니 말이야. 그런데 그저 도심 속 공원의 관광지에서 친구들과 함께 단체용 자전거를 타고 옆의 물가 바람을 시원하게 느끼던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왠지 모를 서글픔까지 왜 동시에 느껴졌던 걸까. 가볍게 스치는 그 강바람에 혹시 모를 서글픈 눈물을 남몰래 날려 보내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 날 밤 작은 크루즈 선박 안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선율의 라틴 음악에 한껏 취해 있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야경까지 너무 멋진 바람에, 행복을 몇 배로 만끽하던 그 행운의 순간에 나는 왜 문득 또 다른 슬픔까지 스며들어오는 퓨전(fusion)의 기분을 동시에 느꼈던 걸까.
혹시 그동안 나도 모르게 내 인생에서, 우리의 피겨 스케이팅 여왕 ‘김연아’처럼 그런 고된 훈련을 하면서 혹독한 시간을 보냈던 걸까. 그래서 그런 작은 행복의 순간에도 막 올림픽 금메달 먹은 기분이었던 걸까.
‘와우, 드디어 해냈어!
나의 이런 행복을!
오예! 난 최고야!
이제 내 삶은 앞으로 여한이 없을 것 같아요!?
아무런 소원이 없을 것 같아요!?
이런 행복을 만끽했으니?’
뭐, 이런 감격의 순간이라도 느꼈던 걸까? 그동안 너무나 수고 많았던 고생한 삶의 세월이 흑백 영화 필름 돌아가듯, 마구 한스럽게 스쳐 지나가면서 감격의 눈물까지 찔끔 한 건가? 이거 뭔가..좀 짠한 블랙 코미디 같은데? 그냥 자전거 하나 탔을 뿐이잖아? 음악 있는 야경 장면 하나 봤을 뿐인데? 이런 것들조차 무슨 세계 챔피언 급에 환호하는 그런 순간의 감격들과 맞먹을 수가 있는 건가? 아, 뭔가 좀 웃프다. 아니, 그런데 나는 분명 그때 그렇게 웃기는? 슬픔은 아니었거든? 정말로 가슴 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쓱 올라오는 가느다란 슬픔의 감정들이 마치, 여러 실핏줄들이 한꺼번에 터지듯 잔잔히 번지면서 은근히 진중하게 스며들고 있었다는 거야. 아, 슬퍼. 너무 황당해서 슬프다. 행복한데 슬퍼야 한다니 말이지. 뭐 이런, 어이없는 슬픔이 다 있나.
그래서 언젠가 한번은 이런 영단어가 없는지 검색을 해봤었다. 해외에 있었으니깐 일상에서 영어로 이런 감정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 궁금했었나 보다. 어쩌면 그런 영어 단어가 존재하길 바라면서 일종의 호기심으로 찾아봤던 건지도 모른다. 무언가 이것저것 몇몇 단어를 검색해본 것 같은데 역시나 없었다. 무엇보다도 Happy와 Sad가 조합된 단어나 이와 관련된 파생 단어를 찾아보았지만 그다지 별다른 용어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뭔가 좀 아쉬웠는지 그 순간 갈증 나서 목마른 사람처럼 ‘HappySad'라는 단어의 조합을 급 생성해서, 나의 SNS 계정에 바로 올려버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그 행복했던 순간들에 대한 감정을 온전하게 그대로 표현할 단어는 그거 말고는 도저히 다른 게 없을 것 같았거든. 아, 혹시 나만의 저 영단어 ‘HappySad’를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얼마 전에 숙소에서 바비큐 파티를 했던 날 느꼈던 그런 감정과 유사하려나? 잠들기 직전에 올라왔던 그런 말랑말랑한 애잔함 같은 기분 말이야. ‘단짠’처럼 짠내 나는 달달함의 ‘HappySad’ 감정? 달달한 멜랑꼴리 사탕의 ‘HappySad’ 기분? 이렇게 행복하면서도 동시에 슬퍼지는 HappySad 같은 감정을 나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것을 등불 축제날에도 그 또래 동생 덕분에 알 수 있던 것처럼, 우리 주변에도 이런 반응이 나타나는 사람들을 의외로 심심치 않게 마주칠 때가 꽤 있는 편이다. 물론 어떤 경우는, 현재의 행복감이 너무 많이 넘쳐나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글쎄다... 나는 그런 과한 행복감으로 인해서 터지는 눈물이나 슬픔의 감정은 아닌 것 같았다. 전혀 결이 다른 두 개 이상의 상반된 감정이 공존하는 듯한 기분이었거든. 감정의 결이 너무 다르니깐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못한 채 내 마음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일종의 공중 부양된 감정의 느낌에 더 가까웠다. 물과 기름이 부딪힐 때면 서로 조금씩 긁히면서 스크래치 자국도 내는 것 같고 말이야. 우연히 마주한 이 행복감을 한껏 가득 느끼고 싶은데 갑자기 어디서 날라 들어온 이상한 슬픔이라는 아이가 불쑥 비집고 들어와서는, 오로지 행복만 느끼고 싶었던 그 마음을 침범하는 기분이랄까. 그런 짠내 나는 감정의 불청객이 내 마음의 방으로 무단침입을 해버려서 그 순간의 온전한 행복감을 충만하게 느낄 수가 없는 어정쩡한 상태 같았다. 주객이 전도된 것처럼 혹시, 슬픔에 억눌려 있던 행복감들이 간신히 살짝 삐져나오다가 그 숨통 트이는 공기의 어색함에 놀래서 다시 안으로 말려들어가고 있던 걸까.
아니 그렇다면 이런 증상들은 도대체 왜 나타나는 걸까?? 행복감이 과도하게 넘쳐나서 생기는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면, 진짜로 행복과 함께 동시에 생겨나는 슬픔의 눈물인 건가? 물론 피겨 여왕의 김연아처럼 커다란 수상의 기쁨으로 인해서 행복한 동시에 그 동안 고생한 시간들로 인한 서러움과 슬픔 등의 여러 감정이 섞여서 복받쳐 오르는 진한 감격의 눈물도 있다. 하지만 우리처럼 보통 사람들은 그런 커다란 이벤트보다는 일상의 행복에서 눈물이 나올 때가 종종 있는 것 아닌가? 즉, 이런 경우들은 우리의 피겨퀸(queen) 연아의 눈물만 닮았다고 보기에는 뭔가 조금 부족할 듯하다. 다른 이유도 있을 것 같다는 거지. 그녀의 고된 훈련 기간처럼 힘든 삶을 살아와서 행복한 순간에 슬픔의 눈물이 앞을 가린 것일 수도 있다고 반신반의하면서 농담을 하기는 했지만,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뿐만이 아니라 진짜로 다른 이유가 뭔가 또 있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