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사회 문화 고찰
여기 정동진에 도착해서 잠시 공원 산책 정도의 바람만 쐬었는데도 중간중간에 좋은 사람들을 꽤 마주쳤던 것처럼, 여행을 하다 보면 사람의 향기를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역시 우리나라의 인심이 아직은 살아있다는 생각에 안도감까지 살짝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 조상들이 선량하고 인심 좋은 민족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라도, 점점 분주해지는 요즘 같은 현대사회에서는 아무래도 예전 같은 인심을 느끼는 게 쉽지 않을 때도 있으니깐 말이다. 옆집이나 같은 아파트의 주민 얼굴도 잘 모르고 지낼 때도 있을 만큼 개인화 시대가 되어가고 있으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짬을 내어 여행 중에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면, 진짜 알게 모르게 선량한 사람들의 도움을 곳곳에서 받을 때가 많다. 잠시 해외라도 나가보면 우연히 마주치는 한국인들과 주고받는 이런 도움을 더욱 크게 느낄 수가 있어서 내면에서 얼마나 큰 감사의 마음이 자주 올라오는지 모른다. 오늘처럼 찰나일지라도 어쩌다 만나게 된 사람들과 서로 좋은 덕담을 주고받으면서 긍정적 감정을 느끼는 순간들을 종종 마주칠 때도 있고 말이다. 이런 경험들만 보아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타고난 심성이 선량한 편이라서 평균적인 인심 자체가 좋기 때문에 사람 냄새나는 곳들이 여기저기 꽤 많다는 걸 느낄 수가 있다.
그런데 여행길에서는 가득하던 이런 사람 냄새가 정말 신기하게도, 일하는 회사나 조직 공간으로 이동되면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증발되는 경우가 많은 현실에 가끔씩 놀라울 때가 있다. 똑같은 대한민국 안에 있는 공간들인데 말이다. 동일한 한국인들인데 말이다. 외국에 있는 해외 지점도 아닌데 말이다. 아니, 물론 일하는 공간은 아무래도 더 분주하고 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깐, 그런 사람 냄새가 진하게 마구 진동하는 건 쉽지가 않은 게 당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까 잠시 상기했듯이, 그 온도 차이가 너무 크게 날 때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다.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는 전체적으로 사람의 향기가 그득한 편인데 그중에서도 한국 ‘사회’라는 곳으로 공간이 설정되면, 갑자기 사람의 향기가 어디론가 막 흩어져서 공중분해 되어 사라지듯이 인심의 온기 자체가 거의 소멸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국 사람들의 타고난 심성과 인성은 선량하고 따스한 편인데, 이런 사람들이 '사회'라는 공간에서는 그렇지 못한 모습으로 다시 재설정된다는 의미 아닐까? 태생적으로 좋은 성향들이 사회라는 곳에서는 그대로 유지되는 게 쉽지 않거나, 다른 성향으로 변형되어 또다시 형성되어야만 하는 다른 측면들이 있을지도 모를 것 같다는 거다. 아니, 그렇다면 왜 이런 좋은 성향들을 굳이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켜야만 하는 걸까? 혹은, 자신도 모르게 변질되어 버리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우리나라가 경쟁 사회와 계급 사회를 기본 밑바탕으로 하면서 성장의 주요 원동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사회 문화를 당연시하게 되는 인식에서 우러나오는 현상들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우리나라는 매우 짧은 기간에 고도성장을 이끌어낸 기적의 나라로 유명하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상징적으로 항상 따라붙어 다녔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로 인한 여러 부작용과 폐해도 만만치 않다. 어떤 현상이든 간에 동전의 양면적인 측면이 있는 것처럼, 아무리 대단하고 화려한 결과를 끌어온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럴수록 그 뒤의 이면에는 그에 상응한 대가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토대로 탄탄하게 이루어낸 것이라면 그 뒤에 숨은 이면 또한 멋진 결과에 어울리는 멋진 과정이 함께 있을 확률이 높겠지만, 우리나라처럼 급성장과 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경우라면 그 뒤에 숨은 과정과 이면은 오히려 결과와는 상반되는 측면들이 있을 확률이 높은 법이다.
간단하다. 짧은 시간에 벼락치기 공부를 통해서 높은 성적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동일한 시간을 집중했을지라도 그 시간당 뼈를 깎는 신체적 고통과 영혼을 갈아 넣는 몰입을 했을 확률이 높은 법과 같다. 이와 비슷한 원리라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급성장이나 벼락치기의 높은 성적 같은 결과들이, 엄청나게 타고난 천재성과 초능력적인 우월함으로 이끌어낸 결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지는 않다.
특히 우리나라의 고도성장 기간에는 제조업 등 노동 산업이 발전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만큼 노동자들의 엄청난 피땀이 헌신적으로 바쳐진 것에 대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처럼 콘텐츠 등의 창조 산업이나 지식 산업의 발전이 주된 분야였다면, 반드시 시간당 노동 투입에 비례하여 성장 가능하다는 원리가 정답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그 시기 성장은 거의 물리적인 노동력의 투입에 비례하여 그에 따라 끌어올려진 성과라고 봐야 하는 측면이 클 것이다. 하물며 작은 벼락치기 성과 또한 내 몸과 정신을 훨씬 더 몇 배로 초집중하여 투입해야지만 얻어내는 결과인데, 이렇게 커다란 국가적인 성장은 오죽했을까 싶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땀과 노력이 갈아 넣어졌을까. 그것도 엄청나게 무리해서 말이다.
이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부작용처럼, 항상 우리 사회의 이면에는 그에 따른 내상이 늘 그늘처럼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벼락치기 또한 심하게 몰아서 하게 되면, 시험 기간이 끝난 직후부터는 그동안 쌓여있던 질병과 피로의 둑이 터지듯이 열병을 앓는 몸살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동안 온몸에 쌓여갔던 긴장감과 독소가 한 번에 풀어지면서 드디어 ‘이제는 아파도 된다.’는 안도감으로 제대로 마음 편히 아플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겨우 며칠 혹은 일주일도 폭풍 같은 후유증에 시달릴 때가 있는데, 몇십 년 쌓인 우리나라의 이런 집단 후유증은 어느 정도일까. 비록 겉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내부적으로 쌓여 왔던 내적 손상과 평소에는 잘 분출할 수도 없던 긴장된 고통 같은 것들 말이다. 오랫동안 누적되어 있는 이런 것들이 바로 집단 후유증으로 나타날 수 있는 잠재적인 내상 덩어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그 집단 후유증들 중 하나로 나타나고 있는 대표적인 증상이 바로, 저출산 문제 아닐까.)
대한민국 노동자의 하루하루가 매일 새로운 시험을 치는 나날 같은데, 그 내상 덩어리의 깊이와 농도는 얼마나 더 할까. 지금껏 쌓여온 내상의 존재를 인지조차 못할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 시험은 끝도 없다. 살아야 하는 한 말이다. 시험 기간이 중간에 끝나지도 않으니깐 말이다.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방학 또한 충분치 않아서 별 의미도 없어 보인다. 하나같이 다들 무한 반복의 시험 기간 속에서 시달리고 있는 수험생들 같아 보인다. 학교를 졸업해도, 공부가 끝나도, 오히려 더욱더 한국적인 지독한 수험생 기간이 또 기다리고 있을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우리의 수험생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의미는, 여전히 엄청난 경쟁 사회라는 것이다.
짧은 기간에 성과의 압박이 항상 존재하므로 자연스레 경쟁 구도는 더욱 심해지는 것이고, 이런 경쟁 사회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양극화되어 분명하게 존재하고 이에 따른 계급 사회의 구도는 더욱 치열해지게 된다.
따라서 스펙 위주의 서열화 사회가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이런 수직적인 조직 문화에서는 유연성이 더욱 줄어들고 질적 성과보다는 양적 성과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된다. 이러하니 충실한 과정보다는 수치적 평가의 결과만 맹목적으로 따르게 되는 현상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게 되고, 마치 기계의 성능을 파악하려는 듯이 점수와 순위의 기준으로만 구성된 껍데기들로 평가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개인의 개성과 다양성은 존중받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밖에 없어서 적재적소의 업무에 배치되지 못할 때도 많게 되고, 그만큼 구성원들의 잠재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없는 경우들이 자동으로 따라오게 된다.
급격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그 놀라운 비결의 동전 뒷면은 바로, 이렇게 국민들의 뼈를 깎는 노동과 살을 에는 듯한 서러움을 밑바탕으로 하는 극심한 경쟁과 성과 위주의 사회적 분위기와 이로 인한 수직적인 계급 사회의 구조가 아니었을까. 단기간에 급성장을 위해서 모두 다 같이 달려오다 보니, 그에 대한 대가로서 이렇게 지불할 수밖에 없던 것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뒤쳐진다는 불안함을 항상 지닌 채, 고도로 성장하는 나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성공해서 출세해야 한다는 그런 절박함으로 살아왔을 거다. 대한민국 전체가 끌어올린 눈부신 성과의 결과에 따른 희생처럼, 어쩔 수 없이 이런 사회 구조적인 현실이 생겨난 것일 거다. 이로 인해 너무 오랫동안 뿌리 내려온 악습 같은 분위기는 뜨겁게 치열한 사회로 만들었으며, 모두가 자신을 셀프 보호하기 위해 서로를 경계하면서 더 단단한 껍데기와 더 두터운 갑옷 속으로 들어가려고 온갖 스펙의 발버둥을 치게 되는 곳으로 점점 더 숙성되어 온 것 같다.
일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전쟁터와 뭐가 다를까. 이렇게 축적된 사회적인 구조와 문화의 분위기에서 어찌 숨이 안 막힐 수가 있겠으며, 어찌 유연성 있는 다양한 껍데기를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어찌 보면 정말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인과 관계의 풍경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뜨거운 치열함이 넘치는 한국 ‘사회’라는 공간에서 너무 뜨겁게 데이지는 않으면서? 계속 잘 살아가려면 어떤 비법이나 방책을 추구하는 게 좋을까. 당연히 공기가 좋은 곳을 찾아가는 게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될 수는 있다. 그런 산업이나 업종이든, 그런 기업이든, 그런 부서이든 간에 말이다. 물론 열정적으로 열심히 일 하는 건 아주 이상적이고 좋은 것이지만, 너무 험난할 정도로 뜨거울까 봐 염려가 되는 것일 뿐. 개인 성향에 따라서 심하게 뜨거운 공기보다는 적당히 따뜻한 공기 속에 있는 게 능률이 더 오르는 사람도 있으니깐. 하지만 그 모든 걸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어찌 미리 많이 알 수가 있겠으며, 설령 미리 알게 된다 한들 평범한 개인이 그걸 또 어떻게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높을까나.
그러하니 우선적으로는 저런 한국적 특성과 배경을 먼저, 머리로는 인지를 하고 가슴으로는 이해하려고 해 보는 게 더욱 좋을 것이다.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가슴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편이 더 수월할 거다. 우리 조상들이 뭐 나쁘게 살아오느라 저리 된 것도 아니고 너무 과하게 열심히 살아오다 보니깐 어쩔 수 없이 그리 된 것을, 어떻게 무작정 원망만 할 수가 있겠는가. 그 덕분에 우리 세대는 감사하게도 가난한 나라를 벗어날 수 있던 것 아닌가. 어떤 것들은 썩 마음에 들지는 않더라도, 일부분 수긍하는 수밖에. 너무 지극정성으로 열심히 살아오신 부모님이 어떤 면에서는 속상해도 차마 원망할 수는 없는 심정과 비슷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저런 기본적 특성을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렇게 살짝 애잔한 시선으로 어느 정도는 먼저 받아들이게 되면, 설령 너무 납득되지 않는 면이 보일지라도 그냥저냥 적당히는 잘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 정도까지는 그저 한국 사회 문화의 한 과목 중에서도, 교실에서 배우는 이론 파트가 아니라 현실에서 익히는 실습 파트려니 하고 지내다 보면 나름 적응이 되니깐 말이다.
다만 이런 한국적인 분위기와 문화적 특성들의 배경과 장단점은, 원래부터 내장되어 있는 빌트인(built-in)처럼 미리 인지는 하고 있어야 하는 게 중요하다. 절반 정도는 이해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그리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일종의 문제의식을 지닐 목적으로 말이다. 비록 현재는 이상적인 상태가 아닐지라도 평소에 문제의식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언제라도 기회가 될 때 개선 여지의 가능성은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 여부를 아예 인지조차도 못하고 있는 상태가 제일 무서운 걸 수도 있다. 이미 그런 공기에 잠식해서 살아가고 있는 거라서 개선의 필요성조차 느낄 수도 없을 테고 그만큼 변화의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울 테니깐.
어쩌면 가장 무서운 말은 바로 ‘원래부터 그랬어.’가 아닐까. 당연하다는 듯이. 당연한 법처럼.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보다 더 한 상황들을 마주하게 될 때이다. 이때는 그저 내적으로 문제의식만 탑재하고 있기에는 더 커다란 문제가 보이는 경우들이다. 실제로 눈에 확 띄는 실질적인 문제들이 명확하게 존재하는 상태이므로, 이럴 때는 조용히 문제의식만 지니면서 도 닦는 수행을 할 것이 아니라면 무언가 액션을 실행해야 하는 시점인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이런 기본적인 디폴트(default) 조직 문화와 분위기 자체가 다소 갑갑한 공기가 많은 편인데, 다른 악조건들이 더 추가되는 상황이라면 그때는 정말로 무조건 버티는 게 정답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셀프 여행 같은 방법을 시도해서라도 자신의 삶을 보호하지 않으면 나중에 굉장히 힘들어질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 요인에 따른 상황으로 크게 나눠볼 수 있는 것 같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 각각에 따라 미리 셀프 해방하는 방안을 강구해 놓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마치, 내 인생의 ‘비대위(비상대책위원회)’ 1인 조직이 필요한 순간일지도 모르거든. 비상시에 출동해야 하는 유일한 조직원 ‘나(ME)' 하나 가지고 무언가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순간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