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판매로 새 폰을 샀다
새 기계의 매끄러운 512기가 영토를 분양받았으나,
내 손바닥은 여전히 낡은 기기의 익숙한 함몰 부위를 기억하고 있다.
8기가에서 시작해 16, 32, 128, 256기가를 거쳐 마침내 도달한 이 거대한 수치는
현대인이 지불해야 할 ‘과잉의 대가’다.
사전 판매라는 달콤한 이름표를 달고 온 업그레이드 기기는 그 화려한 성능만큼이나 잔인한 기계값과 고가의 통신 요금을 청구서로 내민다.
나는 무엇을 그토록 절박하게 저장하기 위해 이토록 비싼 값을 치르며 거대한 디지털 감옥을 짓고 있는 것일까
기술의 변천사는 무섭도록 가팔랐다.
초창기 8기가 시절,
사진 한 장을 남기기 위해 열 장을 지우는
선택의 고통을 감내했다.
그때의 저장 공간은 소중한 것만을 골라 담는 농축된 기억의 창고였다.
하지만 용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512기가라는 심해 같은 숫자에 이르자,
기록은 ‘방치’가 되었고 추억은 ‘데이터의 홍수’ 속에 침수되었다.
기이한 상실은 이 지점에서 발생했다.
수년간 손때 묻은 옛 폰은 238기가라는 숫자로 꽉 차 있었는데, 영혼을 옮기듯 백업을 마친 새 기기에는 고작 167기가의 데이터만 안착해 있다.
증발해 버린 71기가의 행방.
그것은 내가 찍은 어느 날의 풍경일까
누군가와 나누었던 뜨거운 문장인가,
혹은 기계조차 기억하기 싫어 지워버린 내 삶의 찌꺼기인가.
무엇이 빠졌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망연자실하게 만든다.
71기가만큼의 내 생애가 디지털의 미로 속에서 실종되었는데, 정작 나는 그 잃어버린 조각이 무엇인지조차 호명할 수 없다.
더욱이 이 ‘광활한 영토’를 소유하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기기값 200만 원 시대와 10만 원을 상회하는 요금제는, 내가 누리려는 편리함이 실상은
거대 기업이 설계한 정교한 소비의 궤적임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모든 합리적인 비판보다 앞서는 것은,
차마 내던지지 못한 낡은 폰에 엉겨 붙은 삶의 습기다
책상 위에 나란히 놓인 두 대의 전화기를 본다.
새 폰은 미래를 말하느라 눈이 부시지만,
헌 폰은 내가 지나온 시간의 증거물로 묵직하다.
액정 구석의 미세한 금은 어느 고달픈 날의 실수였고, 모서리의 닳은 자국은 수만 번의 통화 속에 녹아든 내 목소리의 흔적이다.
이제 현실을 직시할 시간이다.
수년을 함께한 저 기기를 언제까지 끼고 있을 수는 없다.
기술은 정점에 달했고, 낡은 것은 결국 폐기되어야 할 산업 쓰레기로 분류될 운명이다.
하지만 나는 데이터 전송이 끝난 뒤에도 차갑게 식어가는 헌 폰을 지금도 만지작거리고 있다
512기가의 광활한 용량은 돈으로 살 수 있지만, 백업되지 못한 채 증발해 버린 71기가의 정체와 저 낡은 기기에 새겨진 내 삶의 지문은
그 어떤 고사양 메모리로도 영원히 복구할 수 없는 유일한 실체이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산 것은 최신형 기기가 아니라,
낡아가는 자신을 견디게 해 줄 위안의 도구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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