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가분함과 서글픔의 아이러니
아이들이 결혼해 가정을 꾸리면 그 곁에서 손주들이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고
때로는 아이를 봐주기도 하면서 함께 장을 보러 나가는 소박한 일상을 꿈꿨지만
현실은 그 설계도를 비껴가 버렸다
큰딸은 태평양 너머 먼 타국으로 떠났고
아들네는 장모님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이미 그 빈자리가 채워져 있다.
내가 내어줄 자리가 이미 다른 이의 온기로,
또한 물리적으로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이 손주 돌보느라 개인 시간이 없다며 내뱉는 푸념 섞인 자랑은 때때로 부러운 투정으로 들리곤 한다
그들에게는 일상을 옥죄는 고단한 희생일지 모르나, 나에게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확인받고 싶었던 정서적 유대감으로 보일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상이 나에게는 손에 닿지 않는 소박한 꿈이 되어버렸다
자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독립적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부모로서 감사하고 대견한 일이다.
하지만 이성적인 안도감과는 별개로
감정의 밑바닥에는 너무나 완벽한 아이들의 일상에 대한 서운함이 존재하기도 한다.
부모라는 이름 아래 누리고 싶었던 혈육의 정이 옅어지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서운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역설적이게도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시와 합창, 그리고 우쿨렐레가 있는 예술적 일상이다.
손주 돌봄이라는 달콤한 구속에 묶인 지인들은 오히려 나의 홀가분함을 부러워하며 시기 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타인은 나의 자유를,
나는 그들의 북적임을 부러워하는 이 기묘한 대칭 구조가 결핍과 충만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나의
풍요로운 고독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휴식일수가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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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소소한 소망이 비워진 자리에 예기치 못한
창작의 충만함이 들어차게 된 이 상황은
인생이 내게 준 묘한 숙제와 같다.
손주를 업어주는 대신 우쿨렐레를 품에 안고
상실의 슬픔을 예술적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타인의 고단함을 소망하면서도 나만의 하모니를 빚어내는 지금의 일상은,
어쩌면 인생의 후반전이 나에게 준
'온전한 나로 존재하는 시간 '
이라는 다른 형태의 축복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