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을 걷다

삶의 페이지에 기대어

by 안명심

서촌은 오래된 책 같다.
걸을수록 삶의 페이지가 한 장씩 열린다.




경복궁 서쪽 언덕을 따라

그 이름을 품고 있다.

북촌처럼 화려하게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서촌은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왔다.

나는 이곳을 걸으면서 낡음과 새로움이 겹겹이 쌓인 시간을 만난다

골목마다 얇게 깔린 빛과 그림자가 하루를 천천히 흔들고 있다

작은 카페의 문을 열고 나오는 커피 향

기와지붕 위로 번지고

잊었던 소녀적 기억이

불쑥 되살아나며 오래된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허름한 상점과 바랜 간판은 세월의 주름을 품고,

그 위로 새로운 시간이 겹쳐진다.

리모델링된 가게의 유리창과 외국어 메뉴판이 그

변화의 증거다.

낡음과 새로움이 충돌하며 이곳만의 공기를 빚는다.

두 개의 시선이 겹쳐지는 길

하나는 과거를 향한다.

윤동주가 머물렀던 하숙집 자리,

박노수가 살았던 집.

그 흔적이 남은 골목은 펜을 들고 싶게 만든다.

또 하나는 현재를 향한다.

젊은 예술가들의 화실과 서점, 작은 공연장이 숨어 있는 서촌은 오늘을 살아가는 공간이다.

여행자와 화가, 학생이 같은 길 위에서 서로의 시간을 나누는 것이다




담장 위의 들꽃, 대문에 매달린 자물쇠 같은 작은 흔적들도 눈길을 붙잡는다.

그것들은 사소해 보여도 이 마을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증언한다.

그 풍경에 잠시 기대어 서니

내 삶의 시간과 겹쳐진다.

서촌의 길은 발걸음을 느리게 만든다.

화려한 빌딩 숲과는 다른,

천천히 늙어가는 얼굴이 있다.

그러나 늙음은 쇠락이 아니라 축적이다.

서촌은 낡아가며 단단해지는 나무 같다.

겉은 거칠어도 속살은 뽀얀 참살이다

골목의 그림자를 바라보면 내 지난날이 겹쳐진다. 한때는 분주했지만 지금은 고요한 길처럼,

나 또한 지나온 날들을 덜어내며 살아간다.

서촌은 그렇게 나의 거울이 된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나는 내 안의 오래된 시간을 마주한다.

이제 그 시간은 무겁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다.



내려오는 길에

허기를 달래려고 들어선 통인시장.

기름떡볶이집이다.

수필을 가르치시는 교수님께서

꼭 들르라한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

장을 보는 사람, 골목에 선 노인, 갓 구운 빵을 들고 뛰어가는 아이.

서촌은 사람들의 호흡으로 오늘을 이어간다.


이곳은 단순한 동네가 아니다.

우리 삶이 담긴 오래된 책이다.

읽을수록 바래지만, 바랠수록 더 많은 이야기를 품는다. 오늘의 서촌은 어제를 지우지 않는다.

대신 새로운 글자를 덧입히며 페이지를 더해간다.


나는 그 책을 덮지 못한 채 다시 길 위에 선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나란히 걷는 풍경 속에서 나 역시 한 문장이 된다.




― 서촌에서 한 페이지가 되는 나를 발견한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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