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추억의 노화

빛바랜 채도에 대한 예의

by 안명심


추억의 노화


한때는 눈부신 파편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낡은 외투를

걸치고 있다

반짝이던 이름들은 모서리부터 닳아 없어지고

입술 끝에 맺히던 뜨거운 고백들은

이미 눅눅한 비스킷처럼 바삭하지 않다.

기억의 도르래가 삐걱거리며

세월이 덧칠한 먼지 섞인 분말들은

망막 위로 내려앉아 비문을 새긴다

지팡이 없이 절뚝이며 내 의식의 복도를 기어가는

저 마른 등 굽은 환영(幻影).

팽팽하게 살아 꿈틀대던 그날의 공기가

빛바랜 흑백 사진의 표정으로 멈춰 있다

시간의 태엽은 가끔 헛돌고

가장 선명했던 바다의 파도 소리는

귓속을 맴도는 마른 모래알이 되어 서걱거린다


​아, 추억도 나이를 먹는구나.







詩作 노트

기억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아마 그 끝은 부패가 아니라 '건조'일 것이다.
​추억은 영원히 박제된 채 빛날 거라 믿지만, 사실 추억은 나와 함께 숨 쉬며 늙어가는 생명체다.
한때 심장을 터질 듯 뛰게 했던 뜨거운 사건들도 세월이라는 바람을 맞으면 수분이 빠져나가고, 모서리가 마모되며, 결국에는 작고 가벼운 부스러기가 된다
​잉크가 번진 영수증처럼 흐릿해진 기억들은 이제 더 이상 나를 아프게 찌르지 않는다.
​서랍을 열었을 때 끼쳐 오는 그 퀴퀴하고도 다정한 냄새.

​노화(老化)란 어쩌면,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가장 편안한 표정으로 바꾸어가는 성실한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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