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카운트다운.
나이테는 그저 나무의 몸통 속에 갇힌 딱딱한
기록물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해를 거듭하며 깨닫는다
사람의 나이테는 안이 아니라 바깥으로
돋아난다는 것을,
그것은 때로 눈가에 내려앉은 가느다란
비문(碑文)이 되기도 하고, 타인의 슬픔을 읽어내는 투명한 도수가 되기도 한다.
내가 보낸 2025년은 단순히 지구의 공전 궤도를
한 바퀴 돌았다는 물리적 증명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중력의 무게가 조금 더 깊어졌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 무게를 견디는 근육이 더 유연해졌음을 뜻한다.
스무 살 무렵의 나이 먹음은 화려한 포장지를 뜯는 행위였다.
내일이라는 상자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해 발을 동동 굴렀고,
세상은 온통 원색의 채도로 번뜩였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은 무채색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과정에 가깝다.
짙은 회색의 하늘에서 눈의 냄새를 맡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부는 바람의 결에서 지나간 계절의 안부를 읽는다
감각은 더욱 예민해지고, 동시에 무뎌진다.
사소한 악의에는 무뎌지되, 길가에 핀 이름 없는 풀꽃의 고단함에는 심장이 먼저 반응한다.
이것은 퇴화가 아니라 진화다.
세상의 소음 속에서 나만의 주파수를 찾아가는 과정이며, 불필요한 인맥과 감정의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오로지 나라는 본질에 집중하게 되는
고요한 혁명이다
사람들은 흔히 나이를 '먹는다'라고 표현한다.
이 능동적이고도 수동적인 동사 뒤에는 '낡아감'이라는 서글픈 전제가 깔려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를 쓰는 나의 시선으로 이 상황을 반전시켜 보자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생의 여백에 낯선 낙인을 새기는 일이다.
예전에는 '상처'라고 불렀던 흉터를 이제는 '무늬'라고 부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익숙한 풍경 속에서 한 번도 쓰지 않았던 감각적인 시어를 발견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한 살을 더 먹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유희다.
나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입체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평면적이었던 슬픔은 다면체의 외로움이 되어
햇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빛을 내뿜고,
가벼웠던 기쁨은 묵직한 평온함으로 침전한다.
이 반전의 묘미를 알게 될 때, 거울 속의 주름은 더 이상 지워야 할 오답이 아니라 정성껏 휘갈긴 시의 초안처럼 느껴진다.
나이를 먹으며 가장 근사해지는 지점은
타인의 생애를 짐작하는 보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남편의 뒷모습이,
어느 날 문득 내 그림자와 겹쳐 보일 때 나는 비로소 나이 듦이라는 이름의 외투를 제대로 걸치게 된다
.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나만의 세계관이라는 단단한 성벽을 쌓는 일이 아니라,
그 성벽에 낮은 창문을 내어 밖을 내다보는 일이다. 타인의 고통이 내 살갗을 스치는 통증으로 느껴지고, 누군가의 한숨 소리에서 내일의 날씨를 예견하는,
이 지독하게 감각적이고도 이타적인 연결이야말로 세월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얻어낸 가장 귀한 전유물이다
그것은 내가 이제껏 써 내려온 시의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쪽 번호일 뿐이다.
누군가는 숫자가 커질수록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말하지만, 나에게 나이는 더 정교한 은유를 구사할 수 있는 재료가 된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자.
나는 매년 조금씩 더 '잘 쓰이지 않는 시어'를 닮아가는 중이다.
흔치 않아서 , 귀하고 낯설어서, 매혹적인 그 이름들로
나의 다음 계절을 채워가면 되는 것이다.
"새해는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써 내려가는 문장 사이의 여백에서 태어납니다."
익숙한 풍경을 낯선 감각으로 뒤집어 보여주는 작가님들의 시선이 올해도 브런치를 눈부시게 하길 바랍니다.
작가님들의 마침표 뒤에 항상 새로운 설렘이 숨겨져 있기를 응원하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٩( ´ω` )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