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살이

어느 겨울 편지

by 앤드류

어머니께

오랜만에 만난 당신은 후미진 동네의 수정장이라는 여인숙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그곳은 좁고 어둡고 낡고 해지고 차가운 곳이었습니다. 남루한 시간. 하루하루 몇 푼의 방세를 미루지 않아선지 이젠 난방과 온수를 틀어준다는 말씀을 듣고 저는 드러눕는 척 좁은 천장을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당신을 만난 시간 중 절반은 당신이 전화기 너머로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봐야만 했고, 또 남은 시간의 절반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그 나머지 절반은 제 이야기를 한 줌 토로하였습니다.

부모 잘못 만난 자식이 제일 큰 걱정이라는 말씀에 퉁명스레 답하고 싶었습니다만, 당신은 곧 다시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셔야만 했죠. 그 사이 담배 한 개비 들고 밖으로 나가 눈물을 참아냈습니다. 어두워지는 하늘이 이미 삼켜낸 좌절감을 또 한 겹 짊어지게 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알 수 없는 분노를 삭이며 그곳 여인숙 낡은 간판에 지어진 이름을 눈에 똑똑히 새겼습니다. 무얼 빌미로 희망을 갈구하며 살아갈까 잠시 생각하다, 당신께 받은 사랑과 또 당신께 드릴 보답이 남은 세월을 헤쳐갈 이유임을 확실히 떠올렸습니다.

제 몸 뉘일 곳으로 돌아오는 길. 당신은 제게 커다란 비닐봉지를 건네셨습니다. 인정 많은 사람이 주었다는 김치 한 포기와 자잘한 먹을거리, 어디서 나셨는지 포장이 뜯기지 않은 새 양말 한 짝.... 그간 하나라도 더 주고자 그 많은 짐 속에 싸들고 다니셨을 당신의 마음이 시린 발끝부터 차올랐습니다. 매섭게 부는 칼바람 속 배웅해 주신 한걸음 한걸음, 하늘은 아득히 멀어지고 발끝은 그리움을 벌써부터 찾았습니다.

인사라고는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한 계단 밟아 설 때마다 지금 돌아가면 아직 멀지 않을 텐데, 지금이라도 뛰어가면 아직 뒷모습을 볼 수 있을 텐데 생각했습니다. 당장이라도 포옹을 나눌 수 있을 텐데, 사랑이라는 그 음절 그대로 전해야 하는데... 그렇게 또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옥상에 올라 담배 하나를 태우고 마저 글을 씁니다. 날이 정말로 추워지고 있습니다. 며칠째 밤하늘을 덮은 뿌연 안개에 별빛은 보이지 않고 손에 쥔 담뱃불만 들여보다 왔습니다. 그래도 아침은 올 채비를 하고 있겠지요.
문득 겨우살이가 떠오르는 날입니다. 다른 나무의 양분을 받아먹고 산다는, 그 꽃말이 강한 인내심이라 한다죠. 또 좋은 약재로도 쓰인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살아갈까 합니다. 비루하다, 실없다, 철없다, 가볍다, 누군가 욕하더라도 웃으며 답하겠습니다. 괜찮다고.

겨우살이 같은 마음이라도, 희망을 부여잡은 손에 힘을 내시길, 부디 건강하시길, 매일 당신의 풀꽃 같은 미소가 피우길 바랍니다.

2014. 12. 15

아들 올림


추신. 생일축하한다는 말씀이 없으셨기에, 날짜를 남기지 말까 고민했습니다만 오늘을 기억하고 싶어 기어코 적었습니다.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돌아올 생신엔 웃으며 뵙기를.






이젠 십년도 더 된 이 편지는 결국 부치지 못했습니다. 당시 큰 고비를 넘겨야 했던 우리는 한동안 주소지를 등록할 수 있는 거주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전입신고를 하려 주민센터로 가던 길에 그날을 떠올렸습니다. 그간 악착같이 버티고 기어오를 수 있었던 건, 그곳 여인숙의 이름을 두 눈에 똑똑히 새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평 남짓한 방, 그리고 너무도 좁아 이곳저곳 세간살이들이 어지러웠던 여인숙 수정장... 그리고 편지를 쓰며 떠올렸던 겨우살이의 이미지가 다음 해 여름날까지 선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힘든 시기를 겪는 모든 분들께서 겨우살이를 아시고, 떠올리시고, 좋은 점들을 빌려 이겨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