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위미리에서

by 앤드류

푸른 바다, 바람, 파도, 어느 오름 위로 내리는 별무리. 제주를 떠올리게 하는 건 그런 것들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변덕스럽게 널 따라온 위미리. 너는 네가 영화관에서 두 번이나 봤다는 그 영화 촬영지라며 꼬드김 없이 꼬드겼지. 못 이기는 척 운전대를 잡았지. 그곳으로 가는 길은 제주의 어떤 공통된 풍경으로 가득했지.

위미항에 들러 바닷바람을 조금 쐬면서 맑게 개어가는 하늘을 보았지. 수평선 멀리 구름을 걷어내는 바람의 기세는 뜻하지 않은 황홀경이었지. 너는 나의 제주 선배였고, 너는 선배 노릇을 톡톡히 했지. 무엇하나 그냥 넘어가는 법 없이 그 조용한 마을의 사소한 풍경들을 내 눈에 보여주고야 말았지. 그리고 그날 태양이 머리 위로 오르기도 전에 제주가 아닌 제주를 보았지.


태어나 이런 곳은 처음이다. 동서남북 어디를 향해 바라보아도 한 눈 가득 푸르고 붉은 기운이 가득하다. 동백나무숲이라니. 마치 교과서나 여행잡지에서나 들어 볼 법한 동화 같은 이름이다. 마치 가라앉는 저녁노을처럼 떠오르는 아침의 그것이 그날의 동백나무숲을 천막처럼 덮어내고 있다. 턱을 땅밑까지 내려놓고 그 어이없는 광경을 눈에 담는다. 그날 처음으로 누군가가 아닌 무언가로 감동한다. 아무도 내게 선물하지 않은 그 무언가. 찾아오라 초대한 적 없는 이곳 이 숲에 철저하게 감동하고 있다. 너는 그렇게도 우쭐해한다. 아직 멀었다는 듯한 선배의 눈초리로. 유독 햇볕을 잘 머금은 꽃들 앞에 서서 손끝이라도 닿으면 그것들이 어떻게 돼버릴까 애지중지 들여다본다. 그곳에서 네 사진을 몇 장 찍어주고, 나는 한사코 사진 찍히는 일은 거절한다.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사이. 기다림은 자못 긴 법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그 덧없음에 관한 노래를 숱하게도 적어내지 않았던가. 그러나 동백은 그 이름처럼 겨울의 주인으로 하는, 그리 외롭지만 않은 기다림을 주는 나무다.


돌담길을 걷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더 걷고 싶다. 더 눈에 담고 싶다. 겨울에도 단단하게 피어오르는, 차가운 계절에서 더 빛을 내는 동백처럼 살고 싶다. 사흘 사이면 나는 이곳에 없겠지. 오늘 이 꽃잎에 닿은 볕이 그날도 너에게 닿고 있겠지. 헤어짐을 두고서야 돌아갈 여행길이 두려워졌다. 크게 소리칠 순 없지만, 돌아가는 길 어느 사이엔 말할 수 있겠지. 꼭 다시 만나자고. 너는 동백꽃이라고.


2020. 02.

위미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