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위험한 일에 관하여
사랑은 좋아하는 책을 두 권 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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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은 내 것, 다른 한 권은 당신의 것이다.
나는 책장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곱게 꽂아두고, 당신은 당신의 가방 속에 넣어 다닌다. 우리는 각자 다른 자리에서 책을 펼쳐본다. 같은 페이지를 넘기고, 같은 문장에서 멈칫한다. 각자 떠오르는 장면은 사뭇 다르다. 하지만 그것을 알 방법은 없다. 깊은 수면 위로 떠오른 그림을 서로에게 곧대로 펼쳐 보일 수는 없기에.
때문에 책을 건네는 것은 자칫 위험한 일이다. 단순한 종이의 묶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와 감정을 공유하는 일이기 때문에, 은밀한 취향과 세계관을 함께 건네는 일이기 때문에. 그리고 짐짓 어떤 마음으로 받아 들여질지는 영영 알 수 없기 때문에.
당신에게 책을 준다는 건, 곧 나는 이런 세상을 살아간다, 이 안에 당신이 있길 바란다라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건넨 책이 당신의 마음에 닿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나의 세계가 거부당한 듯한 아픔으로 돌아올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서점을 찾아 좋아하는 책 앞에 선다. 잠시 고민하지만 꼭 두 권을 사고야 만다.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어떤 마음을 온전히 전달하고 싶은 충동을 이겨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당신의 눈으로 밑줄 그어질 문장을 나 또한 발견하고 싶다는 소망, 그 흔적 위에 내 시선을 겹치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다.
때로 상상한다. 책등에 당신의 손길이 닿아있고, 어느 페이지엔 오래 머물러 눌린 자국이 남아 있다. 당신이 왜 그 문장에서 멈추었는지, 왜 그 단락에서 당신의 눈길이 다시 첫머리로 돌아갔는지, 서로의 마음을 펼쳐 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책 속의 세계관을 넘어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될 텐데.
한편으론 책을 선물하는 일이 어떤 거창한 선언이나 특별한 사건이 아니길 바란다. 결코 무겁지만은 않은, 사소하지만 그럴듯한, 그런 쇄편碎片 같은 문장을 나눠주는 일로 당신의 기분이 잠시라도 좋아지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당신이 그 안에서 당신만의 의미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시간이 흐르며 책은 표지가 바래고 모서리가 닳아가지만, 그건 새겨진 눈길과 손길, 마음, 그 흔적의 선명함이다. 그러므로, 언젠가 그 낡은 책을 다시 꺼내었을 때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은, 그때의 내 망설임과 두려움, 용기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펼쳐보는 것이다. 그리고 서점으로 향하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책을 두 권 사겠다는 설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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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뜻한 아침이길 바라며 눈을 떴지만, 하늘엔 구름과 습기가 가득하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건 며칠새 거슬렸던 어떤 장면들 때문이겠지.
주일은 쉽니다.
매번 찾는 카페가 문을 열지 않았다. 오늘은 선택지가 많지 않다. 그래도 바로 옆 스페어 카페는 문을 열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자리도 편치 않지만, 선택지가 많지 않은 날엔 어쩔 수 없다. 그나마 여기 두바이 쿠키는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효력을 그 주된 성분으로 한다. 달콤한 것이라면 참을성 없이 삼켜버리는 성격 탓에 오천 원짜리 쿠키는 포크질 두 번에 사라졌다.
이런 기분으로는 글을 쓰기 싫다. 잠시 자리를 비우고 집으로 돌아가 책장을 살펴봤다. 오래전 마음을 뒤흔들었던 책을 집어 들고, 제발 비만 내리지 말아라,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플레이리스트를 수정하고 책을 펼쳤다. 다행히 눈길은 비틀거림 없이 작가의 목소리를 순순히 따라갔다. 순간순간 어느 무렵의 사건들과 인연들이 떠올랐지만,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사랑했던, 사랑받았던 기억들이 페이지마다 스며들어 있었다. 스쳐 지나는 오래된 노랫말들은 플레이리스트를 다시 수정하게 했다. 한때 안달했던 설렘, 두려움과 기대감이 살갗의 주변으로 피어올랐다.
책 속의 문장은 변하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그것을 들여다보는 마음이 어느새 조금 더 나이 들어 있다는 것. 새로운 시각, 누적된 경험, 혹은 어떤 여유로움이라 할만한 것. 그 옆에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애틋한 무력감이었다.
사랑받았던 일은 오래전의 일이고, 지금의 사랑하는 마음은 옛날의 사랑했던 마음과 너무도 닮아 있다. 소중하게 간직했던 순간들이 그때의 나를 한 꺼풀씩 성장하게 했다면, 지금의 시간은 내 청춘을 조금씩 흘려보내기만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책의 장르를 표현하자면 로맨스 스릴러일까. 영화 같은 책이다. 채 삼백페이지도 되지 않는 분량 속에 기억에 남기고 싶은 대사들이 빼곡하게 차있다. 몇몇은 오래 묵혀둔 원고에 인용해야겠다.
글을 쓰는 일이 떠오른 감상으로 하여금 그럴듯한 단어와 문장을 찾아 정리하게 하는 일이라면, 책을 읽는 일은 또 다른 감상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다. 오늘의 책은 가라앉아 있던 영감을 푹, 떠, 올려, 주었다.
똑같은 책을 사러 가자.
아무래도 이만 서점으로 가야겠다. 날씨가 변덕을 부리기 전에.
비 내리는 날에는 책을 사기 싫기에, 오늘의 초고는 서둘러 퇴고합니다.두서 없는 글은 부끄러움을 남기지만, 지금 서점으로 향하지 않으면 후회할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