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르는 서투름
오늘도 같은 자리에 앉아 한낮의 여유를 누렸습니다.
미뤄뒀던 퇴고推敲는 지난밤 마쳤습니다. 아직 탈고脫稿가 남았지만,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한 번쯤 적당한 날이 오겠지요.
오랜만에 이어폰 없이 글을 써야만 했는데, 빗소리 없이 바람만 불어 손가락이 박자를 잃더군요. 그래서 노트와 펜이 대신해서 고생했습니다. 글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저 빗소리와 제법 어울리는 펜촉의 움직임을 따랐습니다. 하여간 다시 밤 잠에 들지 못하는 날이면 그때 마침표를 찍어볼까 합니다. 탈고가 되련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어제저녁, 계획보다 늦게 서점에 도착하는 바람에 인상 깊게 본 책들을 두고 왔습니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오늘은 오래전 읽었던 책을 읽었습니다. 내 것이 아닌 훌륭한 글을 읽어야만 간밤의 체기가 가라앉을 것 같았습니다. 그전에, 자꾸만 창밖을 바라보려 하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뜻이었습니다.
마음을 전하는 일은 언제나 초고草稿에서 시작됩니다.
있는 사실을 꾸밈없이 적어내는 것으로부터 마침표까지, 거칠고 투명하게 적어냅니다.
각 문장의 첫머리를 적는 순간마다, 문장의 사이마다 날뛰는 심박을 진정시킵니다. 이제껏 글밥 아닌 글밥을 먹었는데도, 하나의 주제를 떠올려 놓고 그 모든 세월이 무색해집니다.
점 하나, 쉼표 하나를 두고 퇴고를 거듭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 없이 사랑을 말하는 일은 까다롭기 그지없습니다. 어떤 단어가 있더라, 하며 막 글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애가 됩니다. 어떤 문장을 꺼내려다 너무 무거운가 지우고, 농담 같은 말을 꺼내려다 너무 가벼운가 멋쩍어 잘라둡니다.
초고일 뿐인데,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적어내는 것뿐인데도 영 쉽지 않습니다. 원고를 고치고 또 고치며, 얽혀낸 문장들이 있지만 마음은 완결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탈고해야 하겠지요. 더는 수정할 수 없고, 더는 미룰 수 없는, 온전한 문장으로서의 고백에 마침표를 찍어야겠지요.
십 수 번의 탈고를 마치면, 비로소 한 권의 분량은 될까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저 어떤 식으로는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주제를 열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그 주제는 당신과 함께 써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덧붙이자면, 이 편지 같은 글을 쓰고서, 일전의 원고를 세 번이나 엎어버렸는데, 당신의 웃음 섞인 말이 들려와 웃었습니다.
그 정도 써내면 제법 장편소설이겠어요.
A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