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을 기억하는 법
베르베르 베르베르는 그의 장편 《신》, '숫자의 상징체계'에서 아라비아 숫자에 대한 나름의 철학과 해석-곡선은 사랑, 가로선은 속박, 교차점은 시련-을 보여준다. 그가 제시한 '0'부터 '9'가 가진 의미는 대략 이렇다.
0 - 무無,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닫혀있는 상태
1 - 광물, 하나의 선으로 이루어진 태초의 시작
2 - 식물, 땅에 속박되어 사랑을 사랑하는 존재
3 - 동물, 지상과 천상에 모두 속하는 존재
4 - 인간, 3과 5의 교차점이자 동물이 될 수도, 현자가 될 수도 있는 존재
5 - 깨달음을 얻은 현자, 천상에 구속되어 지상을 사랑하는 존재
6 - 천사, 사랑으로 이루어진 존재
7 - 신의 후보, 천상에 구속되어 시련을 겪은 존재
(가운데에 교차선을 긋는 유럽식 표기)
8 - 무한, 지상과 천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존재
9 - 열린 나선, 외부로 향하는 순수한 선線과 영성靈性
10 - 우주, 사랑으로 가득한 무無'0'와 태초의 시작'1'이 함께 있는 공간
작가가 처음 떠올린 그 본질을 따라잡기엔 언뜻 추상적이다. 그가 이야기에 녹여낸 표현들을 함축하긴 했지만, 여전히 직관적으로 설명하기는 내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나 나름대로 도움이 되었다. 누군가의 생일을 기억하는 법으로.
*
D에게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를 보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갑작스러운 편지에 당황스러우시겠지만, 기분이 좋아지시길 바라며 펜을 들었습니다.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한참 애송이였을 적, 그러니까 대략 이십 대 초중반이었을 무렵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남자가 가장 멋있는 나이는 서른다섯 즈음이라고. 적당한 성공과 적당한 실패, 적당한 사랑과 적당한 이별, 적당한 좌절... 어른이 되려면 그 적당한 것들을 겪어야만 하고, 그 나이가 서른다섯은 되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딱 그 나이가 됐지만 고개는 갸우뚱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득 당신의 서른다섯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부정父情 없이 자라서 그런지,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든든한 아저씨 같은 존재. 시련에 흔들리지 않고, 아픔에 표정 짓지 않고, 슬픔이나 기쁨에 무던한, 그런 어른.
애송이는 하루라도 빨리 어른스러워지고 싶었고, 정작 그렇게 하지는 못했던 듯합니다. 제 생각과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줄곧 사랑이나 살아감의 고단함 같은 것들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비로소, 언젠가 당신이란 사람을 알고 지켜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른스러움에 대한 또 다른 힌트를 얻었습니다.
책임 앞에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
행간을 읽을 필요 없이 표현하는 것.
타인의 미력을 포용하는 것.
그러나 때론 그의 성장을 위해 아낌없이 다그치는 것.
짐짓 상처 줬을 때, 깨우침이나 용기를 낼 필요 없이 단숨에 사과하는 것.
당신의 그런 어른스러움을 닮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서야, 아. 나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당신의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당신의 일부를 닮아가고 싶어 지겠지요. 그래서 얻은 결론은 이런 것 같습니다.
훌륭한 롤모델 곁에 있는 것은 큰 행운이구나. 그러면 최소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 어른스러움에 가까워질 수 있겠구나.
한 번은 누군가에게 당신을 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라면 별안간 길가에 나앉게 되더라도 두려울 게 없을 것 같아요. 동네 구멍가게를 해도 때부자가 될 것만 같아요.
며칠 전 당신의 생일을 알게 되었을 때.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며칠을 조바심으로 가득했습니다. 당신의 생일을 구실로 적당한 감사와 무한한 축하의 마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딱 적당하게도! 마침 당신의 생일까지 이틀을 내리 쉬게 되었으니! 지금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누군가 보고 있다면 연애편지라도 쓰는 줄 알겠지요. 생각해 보니 비슷한 것 같기도 합니다.
각설.
9,1,6은 특별한 숫자로 다가왔습니다. 어느 작가의 설명을 빌려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9 | 원형에 담긴 사랑이 지상으로 향하는 모양. 그건 당신이 어쩌면 당신도 모르게 주변에 베푸는 친절과 사랑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1 | 무無로부터 탄생한 단 하나의 존재. 그건 그 자체로 어떤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니, 생일에 딱 어울리는 숫자입니다.
6 | 원형에 담긴 사랑이 천상으로 향하는 모양. 그건 지상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는 사랑을 뜻하는 것이니, 당신의 세상살이에 대한 신념과 같은 듯합니다.
그리고 그 숫자들을 나란히 세워두면, 하나의 경계를 사이에 두고 대칭하는 그림으로 보입니다. 비슷한 모양이지만 전혀 다른, 마치 똑바로 선 당신의 모습과 당신을 닮고 싶은 제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이렇게까지 표현하니 당신의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려 웃습니다. 왜 이래? 정신 차려! 적당히 해!
아무튼, 저는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생일에 담긴 숫자들의 미묘한 특징을 짚어내는 것으로 기억하곤 합니다. 그리고 9월 16일은 삼백육십오일 중 하루가 되어 매년 하루치의 행복이 되겠지요. 그래서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될 수 있으면 오랫동안 연이 닿아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025. 9. 16
당신과
당신을 아끼는 모든 이들에게
행복이 잦기를 바라며
감사를 담아,
A 드림
ps. 변함없는 다그침을 약속해 주십시오.
약소한 선물과 편지는 결코 뇌물이 아니므로.
글감이 떠오르면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그래서 오늘은 서둘러 카페로 나섰습니다. 선물을 사기 좋은 상점가 근처에 옛 단골 카페로. 이곳에선 한낮에도 글을 쓰기에 딱 좋은 어둠 속에 파묻힐 수 있습니다. 어서 노트북을 펼쳐두고 원고를 대신할 흰 화면을 보고 싶었습니다. 원고 위로 깜박거리는 텍스트 커서의 박자로 심박을 가라앉히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초고를 써 내려갑니다.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는 일만큼 기분 좋은 일은 흔치 않은 듯합니다. 그 몰래 선물을 준비하고, 함께 건넬 편지를 쓸 꿍꿍이로 며칠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선물이 가장 잘 어울릴지를 떠올리며 그야말로 찰떡같은 선물을 골라냅니다.
떠오른 모든 문장 중에서도 가장 간결하고 덜 부끄러운 표현만 골라 담겠지만, 이렇게나마 미리 초고를 써둬야만 직성이 풀릴 듯했습니다. 하지만 후련하지는 않네요. 이틀 뒤면 선물과 편지를 건네야 할 텐데, 도대체 어떻게 부끄러움을 이겨낼지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적당히 해!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이제 적당히 노트북을 접으려 합니다.
마지막으로, 며칠 사이 마음에 담아두기만 했던, 참기 어려운 궁금증을 남겨둡니다.
혹시, 생일이 언제예요?
써둔 편지는 결국 읽혀질 일 없는 글이 되어 책장에 꽂혀졌습니다. 이 지독한 부끄러움을 어찌하면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