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랑은 짝사랑
"좋아하는 게 뭐예요?"
종종 사람들에게 물으면, 매번 비슷한 답을 듣는다.
어떤 거요?
되물음에 다시 되묻는다.
"뭐든지요. 어떤 걸 좋아하세요?"
되물음의 되물음에, 다시 되물음이 돌아온다.
먹는 거요? 취미요?
뭘 좋아하냐는 물음은 매번 그런 반복으로 시작될 걸 알면서도 대화의 주제로 꺼내게 된다.
지난 십수 년 간 나는 그럴싸한 답을 들어본 적이 없다. 반대로 그럴싸한 답을 원하는 누군가가 내게 물어본 적도 없다.
두 눈이 번쩍 뜨여서 입술을 바라보게 되는 대답.
모든 청력이 압도되어 시선을 따라 귀가 열리게 되는 대답.
나는 그런 대답을 듣고 싶었다. 내가 들었던 가장 신박했던, 들어본 적이 없어서 황홀하기까지 했던 답은 이랬다. "예수님이요!"
원체 오지랖이 깊어 무엇이든 물어보는 일을 좋아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당신 삶의 원동력. 그 크고 작은 것들이 무엇인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을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됐는지. 그 사람은 지금 당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그 사람이 왜 좋은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알면 사랑한다.」- 최재천 저,〈통섭의 식탁〉
"뭘 좋아하세요?" 단순한 질문 하나가 당신을 머뭇거리게 만든다. 누구나 어느 하나의 주제를 놓고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있지만, 막상 "좋아하는 게 뭐냐"는 질문 앞에서는 당신은 입가가 공허해진다. 나는 당신의 그런 모습을 너무도 많이 봐왔다. 무표정하거나, 머쓱하게 웃어 보이거나, 무슨 그런 엉뚱한 질문이 있냐는 듯 미간을 오므리는 표정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는,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살아간다. 그것은 행복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와 별개로 애석하게도 그럴듯한 대답을 들어본 적은 거의 없다.
만약 내게 같은 질문이 되돌아온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곤 한다. "저는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백 개씩은 말할 수 있어요."
오히려 마음 깊이 숨겨놓은 꿍꿍이에 대한 자백에 가까운 답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로 다짐한 뒤로는 그런 자백도 썩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사소한 세계를 무심히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 모든 것들에 의미를 덧붙이고, 좋고 나쁜 것의 경계에서 호감과 불쾌, 또는 아름다움과 추함을 명확하게 구분 짓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 그런 일을 살아있음의 증거로 삼는, 나는 그런 사람이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 짓는 일은 쉽다. 누구나 선과 악의 구분을 명확히 알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하는 고상한 질문은 때때로 우리의 직관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무엇이 좋고, 무엇이 그릇된 것인지 알고 있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 이름 지읍시다.
선과 악에 대한 구분은 만물이 알고 있으니,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것들로 구태여 마음에 흩트려놓지 맙시다. …」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은 좋고 싫은 것들의 기준이 되어줬다. 그렇게 남겨 놓았던 한때의 기록은 훗날 아름답지 않은 것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되어줬다. 그리고 그 연민의 마음은 도돌이표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갔고, 그 대답은 미학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 미학의 잣대로 나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구분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한다 할 수 있을지 어떤 질문에도 답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구분된 것들 중에서, 당신이 내게 좋아하는 것들 중 단 하나만을 고르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사랑'이라고 답한다. 낯부끄러운 대답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사랑만큼 명징하게 나를 움직이는 것은 없었고, 없고, 없을 것이다.
사랑은 걱정과 환희를 동시에 품는 것이었고, 나의 자아는 아무래도 그 속에서 성장한 것이 틀림없다. 좋아하는 감정이 단순한 기호의 영역이라면, 사랑은 내면의 확장과 그것을 넘어서게 하는 초월의 영역이었다. 그것이 내가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이유였고, 오늘의 세상과 삶이 나를 품어주는 방식이라 믿는다.
나는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로부터, 당신의 삶이 풍요로워지길 바란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싫어하는 것들보다, 좋아하는 것들이 훨씬 더 많길 바란다. 내가 당신에게 뭘 좋아하냐 물었을 때, 나는 당신이 백 가지가 넘는 답을 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걸 다시 물었을 때, 나는 당신이 '사랑'이라고 답하길 바란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뭘 좋아해요?"라는 나의 엉뚱한 질문에 "사랑을 가장 좋아합니다."라고 답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짝사랑 예찬론자의 짧은 설파가 힌트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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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랑은 짝사랑"
「마음이 머물고 있는 곳을 '심포'라 한다는 말을 들었다.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것보다야 내 마음이, 내 몸속 어딘가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이 왠지 안심이었다.」 <01. 심포> 중에서.
짝사랑의 파동은 늘 한쪽으로만 퍼져나간다. 간혹 그 파동은 상대의 심포에 닿아 어떤 무늬를 남긴다. 그리고 마침내 첫사랑으로 말미암아 상대로부터 되돌아온 파동이 나의 심포에 맞닿을 때, 영원히 불가해할 것 같았던 사랑을 알게 된다.
사랑은 배울 점이 많다. 더 명확히 하자면, 사랑을 해야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주는 기쁨과 받는 감사, 결핍으로부터 얻는 만족, 상실로 얻는 소중함, 나의 어리석음,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좋은 사랑은 그런 것들을 배우게 한다. 그래서 나는 남녀와 노소 불문 누구든 사랑하라 말한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사랑받는 사람이 돼라 말한다. 깊이 사랑하고, 널리 사랑받을수록 사랑은 배울 점이 많아진다.
「사랑은 미워하고 미워하는 마음, 증오와 떼어놓을 수 없다.」<02. 악의에 관하여> 중에서.
아무리 깊은 사랑도 미워하는 마음과 함께 한다. 애석한 일이지만 인정해야 한다. 당장의 서운함, 섭섭함, 걱정, 의심 같은 마음은 내가 사랑하는 만큼 되돌려 받으려는 욕심 때문이다. 그 욕심은 채워지지 않는다. 당장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좋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마음속에 숨어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는 건 욕심이 숨어있는 마음속 빈 공간을 사랑으로 채우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한때의 어리석음을 외면하려 마음 밖으로 쫓아내선 안 된다. 쫓아낸 어리석음은 언제든 되돌아오는 법이다.
「세상 사람들을, ‘좋은 사람’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구분 짓기를 좋아했다.」<03. 기수어> 중에서.
이따금 기회가 되면 이렇게 예를 들곤 한다. "나는 나쁜 사람이어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요."
하지만 욕심 어린 마음을 채워주는 것은 좋은 사랑에 대한 경험임을 알아야 한다. 좋은 사랑이란, '진정 좋은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으로만 겪을 수 있는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온전히' 사랑을 한다는 말이다. 온전히 사랑한다는 말은, 상대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 사랑에는 욕심과 욕망이 끼어들 수 없다. 그러니, 욕심으로 망쳐버리고 떠나보낸 사랑에 대해서 마음속에 사과와 감사의 말을 남겨둬야 한다. 그래야 한때의 내 어리석음과 화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여전히,
「저울에 매달아 무게를 재어볼 수 없고, 수평계로 기울기를 재어볼 수도, 나침반을 얹어두고 방향을 가늠할 수도 없다. 다만 이따금씩 마주치는 갈림길에서 추측해 결정할 뿐일 테다. 그래서 사랑은 종종 걱정거리라 할만하다. 이별과 만남의 갈림길 앞에서도 나보다 당신을, 당신의 한순간 안녕까지 사랑한다.
사랑은, 그런 식으로 짝사랑을 자처하는 일이었다.」<04. 갈림길> 중에서.
지금의 사랑이 짝사랑임을 인정하면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짝사랑은 앗아가는 것이 없음을 분명히 하자. 한때의 짝사랑을 떠올렸을 때, 그 기억은 분명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비록 상실감으로 끝나버린 시간이라 할지라도, 그 계절감이 주는 어떤 향수가 느껴진다. 아무도 주지 않았던 상처로 마음이 아팠고, 아무도 앗아가지 않았던 마음을 주었던 그때의 기억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니 지금의 사랑이 짝사랑임을 인정하자. 우리는 우리가 더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운함과 걱정으로 사랑한다. 때론 증오하고 슬퍼한다. 하지만 짝사랑임을 인정하면, 상대가 주는 상처는 상처가 아니게 된다. 짝사랑은 원래 우리가 더 많이 사랑하는 당연한 것이므로. 비단 짝사랑이란, 주는 것 하나 없이도 받는 것들이 산더미처럼 가득한 것이므로.
"운명으로부터 벗어나서, 내가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을 매일 아침마다 오늘도 사랑하리라 선택하는 일. 그리고 내일도, 그 내일도 사랑하겠다 선언하는 것만이 진정한 로맨스인 거야." <05. 자유와 운명> 중에서.
사랑은 분명 아름다운 것이지만, 또 '운명'이라는 단어만큼 사랑의 옆에 어울리는 단어도 흔치 않지만,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운명을 쉽게 믿어선 안 된다. 운명에 대한 믿음은 어떻게든 안일함으로 채워진다. 지금 당장 있는 힘껏 거머쥐어도 모자라는 시간과 계절에 대해서 변명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신의 사랑을 운명이라고 믿고 싶다면, 당신의 선택만이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믿어야 한다. 자유로운 선택이 없는 어떤 사랑도 운명이 머물러 주지 않는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매일 밤 눈을 감는 모든 순간마다 그 사람을 당신의 자유로써 사랑하는 일을 선택하겠노라, 운명에게 선언해야 한다.
「사랑은 그곳에 당신이 있기에 시작되었고, 대가 없는 선물처럼 다가온 그것은 때때로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 사랑은 미움과 함께하는 것. 슬픔은 자유와 의지로 기꺼이 감내하는 것.」 <06. 계절> 중에서.
그리고 그 사랑을 당신의 운명이라 믿기로 한 이상, 사랑이 주는 모든 것들을 당신의 자유와 의지로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 사랑은 행복과 슬픔으로 나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은 나뉜 두 심장이 아닌, 하나로 포개진 심장으로만 품을 수 있다. 때문에 사랑이 주는 모든 것들은 여과 없이 마음에 남는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선 안 된다.
「혹자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라 말하고, 필자는 종종 짝사랑을 예찬하며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랑은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감내하는 일이지요. 기쁨이 사라진 사랑은 어떻게든 닫아내야 해요. 긴 슬픔은 불행으로 이어지는 법이니까요. 그러니까, 영원한 사랑은 함부로 꿈꿔선 안 되는 거예요. 불행해지는 순간 결심하세요. 다시는 짝사랑은 하지 않겠다고."
슬픔과 불행은 다르다.」<07. 상사병> 중에서.
그러나 불행은 다르다. 사랑은 슬픔과 상처를 줄지언정, 불행을 주지 않는다. 행복의 반대말이 불행임을 잊어선 안 된다. 사랑의 시작과 끝, 좋은 사랑도 그저 그런 사랑도 그 과정에 불행은 없다. 불행은 불행일 뿐이다.
사랑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은,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해야 한다. 때론 삶과 죽음을 초월한 사랑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어 전해지곤 하지만, 분명 그 초월은 스스로의 행복을 초월한 무언가이지, 나의 불행을 대가로 지불한 사랑이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행복을 담보로 사랑해선 안 된다.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또 슬픔을 잘 보살펴야 한다. 밀려오는 슬픔은 때때로 피할 수 없는 해일과 같다. 그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흉터마저 사랑하는 일이란 절반쯤은 광기를 품어야 가능하다. 때때로, 사랑 때문이 아니더라도,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밀려올 때면, 영원한 것은 없다고 위로해 보자.
「나는 영원한 사랑을 꿈꾸면서도, 영원한 사랑은 없다고 믿었다. 그것은, 한여름 뙤약볕에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지 않길 바라는 아이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죽음을 마주하는 노인의 마음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사랑도 마찬가지일 뿐이었다.
사랑은 허약하고, 그래서 필멸하며, 그래서 덧없고, 그러므로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는 것은 헛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08. 마력> 중에서.
모든 사랑에 대한 고찰 중에서도, 가장 혼란스러웠던 때는 사랑이 가진 마법적인 힘에 대해 떠올릴 때였다. '반드시 소멸하는 것'을 두고 시작됐던 한때의 의문은 사랑으로 이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답을 얻었고, 그것은 필멸을 인정하는 것으로 완성되었다.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오직 우리 기억 속에, 우리가 사라지지 말지어다 명령하는 것들만이 실존할 수 있고, 영원성을 획득한다.
최소 몇백 년 정도는 삶고 싶은 내게, 삶은 너무도 짧다. 게다가, 시시각각 몸이 늙어가는 사이에도 죽음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닥쳐올지 알 수 없다. 행복은 꿈꾸기보다 만들어내는 것이 좋고, 만들어내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의 것들로 얻는 것이 좋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기다리는 것보다 다가가는 편이 좋다. 다가가지 않아도 스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편이 좋다. 멀리서 찾지 말라는 것도 행복과 사랑이 그런 의미에서 결이 같다.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해지면, 눈이 닿는 모든 것들이 사랑으로 다가온다. 행복으로 가득한 마음은 한때의 불행조차 애틋한 그리움을 갖게 한다.
연인을 사랑하는 마음만 사랑이 아니다. 작은 것들을 소중히 하는 마음, 특히 살아 있는 것들을 유심히 지켜보는 마음과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도 사랑이다. 그런 태도는 '사랑받는 방법'을 알게 한다. 이미 나의 존재가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하물며, 연인에게 받는 사랑이 있다는 것은, 그 마음의 경중을 떠나서 실로 엄청난 일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내 말은, 사랑해야 한다고. 너만의 사랑을 찾으라고. 너의 그 짠내 나는 슬픔까지 확 덮쳐서, 네가 어쩔 줄 모르게 다 녹아내리고 싶을 정도로 깊은 바다로 빠져들라고.」<09. 소금기둥> 중에서.
결론은 그렇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지 않고, 인연에는 번호표가 붙어 있지 않다.
사랑만큼은, 새치기를 해도 도둑질을 하더라도 괜찮다.
*
연인을 품에 안은 사랑을
아기를 잠재우는 부모의 사랑을,
친구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랑을,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는 사랑을,
깊은 짝사랑에 행복한 아픔을 앓는 사랑을
진심 어린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
「그래서 나는 늘 누군가를 향해 기울어져 있는 내 마음을 좋아한다.
그것은 사랑이고, 사랑은 기울어져 있어야 하니까.」
- 밝히지 않은 짝사랑 중에서.
<편련애찬片戀愛讚>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