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것들에 대하여

W에게

by 앤드류

낯 뜨거운 밤.

기회는 돌아서 맞댄 등허리처럼 곧 밝아올 여명에 사그라들 참이었다. 차라리 맨바닥에 주저앉아 네가 누운 침대에 등을 기대어 한숨 몇 줌 털어냈다.

분명 너는 잠들어 있었고 나는 이런 말을 했지. 없던 일이라 믿으면 모두 없던 일이 될 수도, 잊을 수 있는 일이라 믿으면 모두 잊을 수 있어. 그거면 됐다.

그래서, 결국 나는 네 까망 웅덩 밑으로 가라앉았는지 불현 궁금한 밤.


그날이 입춘이었던 것이 생각났다.

유난히 일찍 밝은 새벽빛이 안갯속에 산란했지. 집으로 향하는 짧은 길. 취해 넘실거리기에 봄기운은 충분했지.

아끼는 구두 밑창을 터덜거리며 다 닳아 없어져도 좋다 생각했던 이유는 고작 그런 것이었다.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는 찰나. 딱 좋은 타이밍에 내린 그 안개가, 지난밤 몇 방울 수분과 빛으로 그린 네 모습들이 모두 기화해 버린 탓이라고 생각했던, 탓...


겨울이 남긴 습관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 것이었지. 그 부벼진 온기를 한 줌 쥐고서 딱 체온만큼의 행복을 뒤적거리는 것이었지. 주머니 속에서 찾아낸 구겨진 영수증을 보고선 휴대폰 메모장에 헛소리를 남겨두었다.「구겨진 모든 것들에 대하여, 이름 모를 모든 그대들은 저마다의 온기를 품고 있을까.」

그리고 오늘. 이 낯 뜨거운 밤. 여명과 안개로 그려진 그날의 장면들 속에서.

구겨진 것들과 그 온기에 대해 너에게만큼은 어느 정도 일단락을 해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혀지지 않을 편지를 쓴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흔적 없이 하루를 사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여적 그날의 온기가 손등 위에 느껴지는 걸 보면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사라졌다고 믿어야만 간신히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그러나 사라졌다고 믿는 순간부터 하릴없이 선명해지기만 하는 그런 것이었으니.


술잔을 쥐고 있어야만 수전증이 멈추는 것처럼. 그 보잘것없는 온기만큼의 마음을 움켜쥐고 있어야만 비틀거리는 계절을 지날 수 있는 것이었나?

돌이켜 보니, 주머니 속 구겨진 영수증이 남긴 감상은 그것에 적힌 금액이나 그 밤의 흔적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구겨진 것들조차도 다른 무언가, 혹은 다른 누군가와 겹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막 겨울이 시작될 무렵인데.

한때 적당한 곳에 내버려 두지 못한 기억으로 벌써부터 이 특유의 계절성 빈궁함이 드러난다는 것. 그럼에도 낮밤으로 뜨는 지독한 밤무리에 너를 포함시키고 싶지 않은 것. 사이즈 조절에 실패한 옷에 팔다리를 욱여넣는 것. 그런 기색이 옅게 열어둔 창문 틈으로 스며든다. 머리맡에 내려앉는다.


적당한 설명서를 준비해두길.

지금보다 훨씬 덜 아름다웠을 그 무렵의 너에 대해서, 서투르고 구겨지고 접혔던 네 청춘에 대해서.

그 구겨진 모습 그대로 행복을 습관으로 여기는 적당한 누군가에게 체온만큼 이상의 온기가 되어주길.


... 이렇게라도 적어두면. 훗날이라도 그 무렵 가라앉았던 웅덩의 수심을 얼핏 떠올려볼 수 있겠지. 혹은, 휘갈긴 필체를 사정없이 찢어내 구겨버리곤, 비로소 적당한 곳에 내버릴 수 있겠지.

작가의 이전글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