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악마

단편 습작 2

by 앤드류

결정론

아무것도 없는 공간, 이를테면 우주의 가장 구석진 공간을 떠올려보는 거야. 그곳에 두 팔과 손이 달린 무한동력장치가 있어. 양손에 젓가락 하나씩을 쥔 그것은, 정확히 1초에 한 번씩 젓가락을 부딪혀 소리를 내고 있어. 정확히 같은 부분을, 정확히 같은 힘으로.

같은 입력이 무한히 반복되는 사이, 같은 파동이 무한히 출력되고 있지. 하나의 원인이, 하나의 결과로 영원히 이어지는 것. 한치의 우연이라도 돌연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 '결정론'을 두고 내가 떠올리는 그림은 그런 것이었어.


복잡계

악마가 가진 능력들에 대해 세세히 알 수는 없어도, 단 하나만을 가정해야 한다면 '전지의 능력'이지 않을까 생각했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존재여야만, 삶을 관통하는 모든 우연성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을 테니까.

단순히 계산해 보건대, 한 사람이 태어나 성년에 이르기까지 최소 수천 명, 더 의미 있는 관계들로는 고작 수십에 지나지 않는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가지. 하지만 나는 눈에 스치는 모든 사람들까지를 포함해서 대략 오만 명 정도의 존재들을 마주친다고 가정했어. 수만에 이르는 얼굴과 그 알 수 없는 이름들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복잡성'에 대하여, 한 인격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적 현상을 만드는 데에 가담하지.

비단 사람이란, 이 땅 위에 홀로 발 딛고 살아갈 수 없어. 살아갈 의지도 없어지고, 의미도 없어지는 법이지. 단순히 둘 이상의 상호작용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할 수 있지만, 고작 몇몇의 관계만으로는 '창발'은 일어나지 않아.

복잡계는 다양성을 포함한 복잡성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예측불가능한 무한한 가능성들 사이에서 상당히 다의적인 현상으로 나타나지. 가령, 완벽하게 대칭하지 않는 타원체의 공으로 경기하는 스포츠를 예로 들 수 있어. 십수 명 선수들의 개개인 능력과 마음가짐이 각기 다르고 선수들의 손에는 땀이 흥건해지지. 심지어, 공기의 흐름은 완벽히 계산되지 않아 공중을 가르는 공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지.

하지만 잔꾀를 부리기 좋아하는 나의 악마는, '전지의 능력'으로 모든 복잡계의 진원지와 그 결과를 알고 있어. 모든 창발과, 모든 결정론을 허락한 존재라 할 수 있지.

그런데, 그런 그에게도 거스를 수 없는, 그러나 거스르고자 하는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



그리고 오늘, 12월 26일 아침. 무한한 격자로 채워진 이 세상의 작은 좌표에 앉은 나는, 간밤의 꿈속에서 악마가 보여준 이야기를 적어내고 있어. 이야기 속에서 이미 답이 정해진 궁금증을 다시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단 하나의 실, 무한 개의 바늘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실 한 가닥이 이제 막 어떤 바늘귀를 통과해 빠져나왔어. 그는 자신이 통과한 바늘이 지난번의 그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지 못했어. 하지만 어쨌든 또 하나의 바늘을 통과했다는 사실에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것은 자신이 남긴 과거의 흔적-그 무수한 바늘귀들-을 종종 돌아보며 '어지간한 우연들'이란 생각에 잠기곤 했어. 그리고 어느 바늘귀들에, 자신이 아닌 다른 실가닥이 꿰어 있는 모습을 보았어.

질감이며 색깔, 향기, 그 모든 특성이 다른 실가닥들이 남긴 흔적을 보면서, 그는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고민했어. 맞바람처럼 불어오는 시간 속에는 아직 다른 바늘귀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는 과거의 바늘귀들만을 돌아보며 계속 떠올렸어. 그 '가능성'에 대해서, 그 절망적일 정도로 치밀한 우연들에 대해서.

그는 그가 머무르고 있는 바늘귀의 옆에, 어느새 '자신이 아닌 다른 실가닥'이 다가와 있음을 눈치챘어. 자신의 분홍으로 짙은 선명한 실가닥과 달리, 그것은 그보다 더 가녀리고 위태로운, 투명에 가까운 파란색 실가닥이었어.

분홍은 자신과 하나의 바늘귀에 나란히 걸터앉은 파란색 실가닥에게 물었어. 너는 어디에서 왔니? 왜 이곳에 있는 거니?

하지만 파랑은 답하지 않았어. 그저 자신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볼 뿐이었어. 그렇게 둘 사이의 침묵이 익숙해질 무렵, 그들의 앞에 악마가 나타났어.

십 수개의 손으로 무한개의 바늘을 들고 있는 악마는, 자신의 모습에 경탄하는 분홍에게 네 개의 바늘을 건네었어.

청색, 녹색, 다홍색 그리고 황색 빛을 띠는 바늘들이 그 앞에 나란히, 수직으로 꽂아졌어.

그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어. 악마를 올려다봤지만 아무 말도 없었어.

그는 네 개의 바늘구멍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가장 먼저 놓인 바늘의 머릿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어. 그러자 이야기가 시작되었어.


첫 번째 바늘귀 : 단장

다갈색 롱코트를 입은 Y는 이제 막 걸음마에 익숙한 그녀의 아이를 업고 있었어. 턱이 낮은 백여 개의 계단을 다 내려오고 나서야 숨을 몰아쉬며 아이에게 말했어. "아들, 이제 엄마 손 잡고 걸어서 가자?"

포동한 점퍼를 입고 있던 아이는 어미의 등에서 내려와 얼어붙은 땅에 두 발을 붙였어.

Y는 삽십여 미터쯤 앞 버스정류장을 바라봤어. 다행히 시내버스를 놓칠 것 같지는 않았어.

그 사이, 아이는 돌연 차도로 걷기 시작했어. "아가, 이쪽으로 와. 찻길로 가면 위험해."

하지만 아이는 Y의 부름에도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차도로 향했어. Y가 손에 들고 있던 짐을 추스르는 사이, 아이는 어느새 차도 한복판에 서있었어.

"아가...!"

Y가 고개를 돌려 아이의 이름을 부르짖는 찰나, 빠르게 달려오던 트럭 한 대가 아이를 들이받았어.

강한 충격에 몸이 붕 떠오른 아이는 십여 미터쯤을 날아가 땅에 떨어졌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어미는 몸이 굳어버렸고, 뒤이어 쏜살같이 달려오던 다른 트럭 한 대가 쓰러져있던 아이를 밟고 지나갔어. 그제서야 어미는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어.

Y는, 뒤이어 달려오는 차들이 있을까 살피면서도 속으로 생각했어. 아이는 죽었을 거라고. 모든 게 끝나버렸다고.

자식을 잃은 슬픔을 단장斷腸의 고통에 빗대곤 하는데, 그것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은 단말마의 소리 없는 비명, 숨이 끊어지는 고통이었어.


두 번째 바늘귀 : 쓰러진 승객

추적스런 눈비가 떨어지는 날.

출근길 승객들을 모두 쏟아낸 시내버스는 다시 차고지로 향했어. 삼십여분쯤 걸려 시내를 빠져나온 버스기사 K는 기지개를 켜며 긴 하품을 했어. 그때, 후사경 속에 한 여자가 눈에 들었어. 앳되보이는 정장차림의 여자였어. 밤새 야근을 하고 퇴근하는 길인지, 요란하게 덜덜거리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어.

도외지에 접어들며 피로감을 느끼던 K는 하마터면 버스정류장을 놓쳐버릴 뻔했어. 사이드미러 속에 지나친 정류장에 서있던 노인의 모습을 발견하고서야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어.

십 수 미터를 헐래벌떡 뛰어온 노인은 버스에 올라타며 K에게 화를 내려했어. 하지만 그때 노인의 눈에 바닥에 쓰러진 여자가 먼저 보였어.

그녀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고, 심박도 거의 들리지 않고 있었어. 구급차를 기다리는 사이, K는 심폐소생을 했어.

곧 구급차가 도착했고 K는 담배를 꺼내 물었어. 그는 혈색이 돌지 않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곤 의문했어. 죽었을까? 죽게 될까? 이렇게 죽을 운명이었나?

K는 눈비로 범벅이 된 연석에 주저앉아 숨을 돌렸고, 그를 바라보고 있던 악마는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구급차를 따라 사라졌어.


세 번째 바늘귀 : 징조

폐기물업자 P는 궂은날이면 일하기를 싫어하는 남자였어.

잘 익은 통배 하나로 아침식사를 마친 P는 가스렌지에 주전자 물을 올려놓고는 담배를 들고 창가에 섰어.

전날밤 내리기 시작한 비에 어느새 눈발이 섞여 있었지만, 이미 쉬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상관없는 일이었어. 그는 딸을 보러 갈 계획이었어.

"요즘 잘 지내셔?" 전날밤 통화했던 딸의 목소리는 유독 기운이 없었어. 하지만 생전 전화가 뜸했던 딸이 먼저 연락을 해왔다는 사실에 내심 기뻤어.

성냥에 불을 붙이려 할 때 전화벨이 울렸어. 껀수가 잡혔다는 동료의 전화였어. 잠시 고민하던 P는 늘 입던 작업용 가죽재킷을 걸치고 키뭉치를 챙겨 밖으로 나섰어. 딸과의 저녁식사 전까진 일을 마칠 생각이었어.

몸을 구겨 넣듯 트럭에 올라타고서야 창가에 타 두었던 커피가 떠올랐어. 고개를 비죽 내밀어 올려다보자 창가에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잔이 보였어. 그때, 삐삐가 울려왔어. 딸의 전화번호였어.

P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딸에게 전화를 할까 고민했어. 마침 있어야 할 라이터도 보이지 않았고, 돌아간 김에 커피까지 챙겨서 나올까 생각했어. 하지만 이상하게도 남자는 시동을 켜고 싶었어. 일하기 싫은 궂은날이었기에. 저녁이면 딸의 얼굴을 볼 수 있었기에. 이상하게도, 그는 덤덤히 시동을 켰어. 운전대를 잡고 현장으로 향했어.

구교사 뒤편은 눈비로 범벅이 된 온갖 폐기물이 널브러져 있었고, 한 소사가 P와 동료를 맞이했어. 물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고 일을 시작하려 할 때, P의 허리춤에서 삐삐 알림이 울렸어. 다시 딸의 휴대폰 번호였어. 그는 딸과의 저녁약속을 자랑하고는 소사에게 물었어. "전화 좀 쓸 수 있을까요?"

P는 수위실 전화의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어.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씨 아버님 되십니까?"

정신이 아득해진 P는 비틀거리며 트럭에 올라타고선 시동을 켰어. 담배를 물고 마대자루를 정리하고 있던 동료는 P에게 다가갔어.

"우리 딸이..."

P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는 교정을 빠져나갔어. 큰일이 났다 싶은 동료도 곧 시동을 켜고 그를 뒤쫓았어. 당황한 소사는 교정을 빠져나가는 두 대의 트럭을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어.


네 번째 바늘귀 : 응급실

뺑소니 신고를 받고 용의차량을 추적하던 경찰 D는 두 대의 용의차량 중 뒤따르던 트럭을 멈춰 세웠어. 하지만 용의자는 자신의 트럭이 아이를 밟고 지나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어. 아이의 체구가 워낙 작았기 때문에 그럴듯한 변명이었어.

D는 앞서 달리던 트럭이 아기를 쳤고, 당신이 그 아기를 밟고 달렸다는 사실을 말했어. 충격에 빠진 용의자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자신도 P의 행선지를 알지 못한다 말했어.

D는 곧 도주 차량이 대학병원 응급실 앞에 세워졌다는 연락을 받고 그곳으로 향했어.

수간호사 M은 심정지 환자를 살피고 있었어. 후배들 나이와 비슷한 또래의 여환자였어. 버스기사의 응급처치, 구급차에서의 약물처치와 CPR이 심장의 맥박을 되찾아주었지만, 그녀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어.

두어 시간 전, 그녀의 휴대폰에 기록된 전화번호들을 통해 환자의 소식을 알리려 했지만, 토요일 이른 아침에 가족들의 연락처를 찾는 일이란 쉽지 않았어.

그때, 또 한 대의 구급차가 인계되어 들어오고 있었어. 이번에는 교통사고를 당한 두 살배기 아기였어. 축 늘어져 피범벅이 된 아기는 수술실로 들어갔고, '아가, 아가'하며 울부짖던 여자는 결국 복도에서 혼절했어.

곧 P가 도착했어. 울부짖으며 딸을 붙잡으려는 P를 말리기 위해 M과 동료 간호사들이 들러붙었어.



*



악마의 고백

네 개의 바늘귀를 통과한 분홍은, 병실에 누워있는 여자의 모습을 보며 그녀가 생전의 자신의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었어. 그녀는 여전히 죽지 않고 숨을 쉬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그는 그곳 그의 몸으로 다시 돌아가기 싫었어. 그보다, 자신의 옆에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파랑이 신경 쓰일 뿐이었어.

그는, 파랑이 자신을 뒤따라 병원에 실려온 Y의 아이임을 직감했어. 아직 말을 트지 못한 갓난쟁이였기에 그의 물음에 답할 수 없는 것이었어.

모든 전말을 알게 된 분홍은 그와 파랑을 내려다보고 있는 악마를 쳐다봤어. 악마는 여전히 무한 개의 바늘을 손에 쥐고 있었어. 그리고 곧 한 가지 의구심이 들었어. '만약, 내가 더 이상의 바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러자 악마는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던 바늘 하나를 찾아내어 그의 앞에 내밀었어. 그리고 말했어. "한때 이름을 버린 남자가 있었고, 그는 벌을 받고 있지."


마지막 바늘귀 : 이름 없는 남자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기를 바라는 남자가 있었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 대한 분노로 가득했다고 할 수 있지. 그건 일종의... 두려움으로 발현된 도피에 가까웠어. 하지만 자신의 유약함을 스스로 인정하기 싫었기에, 그는 스스로 '이름을 버려야 한다'고 믿는 머저리였어.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임신 소식을 알렸어.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말했어. "아이, 낳지 말자." 그는 스스로 이름이 없어야 했기에, 자신의 성씨를 물려받을 아이의 존재도 불필요한 것, 없어야 하는 것이었어. 아내는 반대했지만, 신이 그를 도왔는지 뱃속의 아이는 완전한 몸을 얻기도 전에 유산됐어. 아내는 슬픔에 빠졌고, 그는 그들의 상실을 위로하기 위해 다짐했어. 다음의 아이가 허락된다면 사랑으로 키우겠다고.

이듬해 봄, 아내의 뱃속에 새 생명이 찾아왔고 그해 겨울 아이는 태어났어.

하지만 그의 다짐은 쉽게 무너지고 말았고 그는 결심했어.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알기 전에, 이름을 포기해야겠다고.

이름을 버린다는 것은 죽음을 택하는 일과 다르지 않았어. 그렇게 그는 생명을 잉태한 아내를 두고 죽음을 택했고, 그렇게 악마와 마주쳤어. 악마는 그로부터 이름을 앗아가겠다 약속했고, 시간은 그의 이름으로 하여금 모든 이들로부터 잊혀지도록 했어. 그는 그 누구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지. 하지만 그는 죽음의 세계에서 영원히 혼자가 되었어.

그러나 그 대가로 벌을 받아야 했어. 그건 이 세상 모든 실과 바늘의 교정자가 되는 일이었어. 하지만 비겁자였던 그는 그의 이름에 얽힌 바늘들을 수습하는 데 열중했어. 하나의 바늘을 거두는 데에 하나의 손이 필요했고, 억겁에 이르는 그 모든 바늘들을 감추는 데에는 수천수만 개의 손도 모자랐어. 그리고 끝내는 수습하지 못한 바늘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어.

마침내 모든 바늘을 수습한 그는, 원형을 잃어버린 체로 교정자의 의무를 이행하기 시작했어. 그것은 무한의 계에 갇혀 무한의 실과 무한의 바늘, 그리고 무한의 교정을 반복해야 하는 일이었어.

그에겐 끝내 수습하지 못한 단 하나의 바늘이 있었어. 그건 그의 성씨를 물려받은 아이, 푸른 실타래로 시작된 새 생명의 바늘이었어. 파란색 실가닥은 건강하게 자랐어. 아이가 어미의 깊은 사랑 속에서 자라는 사이, 어느덧 원형을 잃고 악마의 모습이 된 이름 없는 남자는 내면에 남은 얄팍한 부성에 당혹스러웠어. 하지만 대수롭지 않았어. 십수 년의 세월이 흐른다면, 파랑은 세월 속에 빛이 바래고 언젠가 그조차도 아이의 존재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었어.

어느 끊어진 실타래의 마지막 바늘을 들고 그 주인을 찾아 나선 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어. 그 주인은 바로 파랑이었어.

그날, Y의 등에 업혀있던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던 그는, 무슨 영문인지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어. 착각인 줄 알았지만, 땅을 딛고 선 아이는 분명 자신을 향해 걸음마를 시작했어. Y의 부름에도, 아이는 차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어.


운명

그날은 92년 화이트 크리스마스 아침이었고, 파랑과 분홍에게 운명의 바늘이 주어지는 날이었어.

분홍이 악마에게 말했어. "마지막 바늘귀라니, 당신의 아기에겐 너무 가혹하네요."

"아가! 아가!"

어디선가 파랑을 부르는 어미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분홍은 자신의 죽음에 얽힌 파랑의 죽음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

악마는 자신의 가슴속 깊숙한 곳에 숨기고 있던 두 개의 바늘을 꺼내 들었어. 노랑빛, 그리고 무채색으로 투명한 유리바늘이었어.

분홍은 악마가 꺼내든 자신의 분홍빛 바늘을 바라보며 그것이 자신의 앞에 꽂히길 기다렸어. 하지만 악마는 그의 앞에 노랑빛 바늘을 세워 꽂았어.

분홍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악마의 변덕을 거절했어. 더 이상 삶에 미련이 없다고. 벌 받는 악마에게 남의 운명을 뒤바꿀 권한 따위는 없다고.

악마는 침묵했어. 다만 유리바늘을 파랑의 앞에 세워 꽂을 뿐이었어.

파랑은 자신의 앞에 놓인 바늘귀에 다가가더니 잠시 분홍을 향해 뒤돌아봤어. 마치 또 보자는 인사를 하는 듯한 파랑의 모습에, 분홍은 인사했어. "미안했어. 또 만나."

파랑은 곧 바늘귀를 통과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졌어. 분홍은 자신의 앞에 놓인 노랑빛 바늘 앞에 서서 악마에게 물었어. "이게 정말로 마지막 바늘인 거죠?"

악마는 또 침묵했어. 그리고 분홍이 마침내 바늘귀의 좁은 틈에 머리를 비집어 넣었고, 그제야 악마는 기다렸다는 듯 감추고 있던 두 개의 바늘뭉치를 분홍의 앞에 쏟아부었어. 하나의 뭉치는 노랑빛 바늘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투명한 유리바늘들이었어.

분홍은 이해할 수 없었어. 조금 전까지 파랑과 함께 머물렀던 분홍빛 바늘귀가 분명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바늘귀였어. 그리고 그가 돌아봤던 파랑의 자취도 분명 마지막 바늘귀였어.

"내 딸! 우리 딸...!"

어디선가 분홍을 부르는 아비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그 순간, 분홍은 바람에 떠밀리듯 아득한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어.


악마의 잔꾀

분홍과 파랑은 결국 같은 병실에서 눈을 떴고, 그들의 곁에는 아비와 어미가 있었어. 분홍이 눈을 뜨자 경찰 D는 뺑소니범이었던 분홍의 아비를 체포해 갔어. 하지만 분홍은 슬프지 않았어. 수간호사 M이 혈액검사를 통해 그녀의 임신사실을 알려줬기 때문이었어. 분홍은 조금 전까지 꿈에서 보았던 연노랑으로 가득한 빛을 떠올렸고, 아이의 태명을 소리 내어 불렀어. "노랑이..."

그때, 커튼으로 가려진 건너편 베드가 소란스러웠어. 어째선지 분홍은 그 커튼 너머를 살펴보고 싶었어.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커튼 앞으로 다가가 그 틈으로 고개를 내밀어 들여다봤어.

그곳에선 간신히 의식을 되찾은 핏덩이가 울음을 터뜨리려는 참이었어. Y는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어. 엄마가 미안하다며, 살아줘서 고맙다며 울고 있었어.

그제서야 분홍은 가물했던 꿈의 한 조각을 선명하게 떠올리고는 왠지 모를 깨달음을 얻었어. 그것은 병상에 누운 아기에게 주어졌던 투명한 바늘귀에 대한 것이었어. 무채색의 유리바늘, 그것은 한때 어미의 몸에 머물렀던, 그러나 시작되지 못했던 새 생명의 바늘귀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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