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31
늦잠은 다시 고질병이 될 참이고, 해는 오늘도 멀뚱히 가라앉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익숙한 옷들을 찾아 걸쳤다. 익숙한 바깥 풍경을 살피는 일이야말로 한해의 마지막 소일거리로 적당했다.
몇 번이나 들락거렸던 공원길을 걷다가 어설픈 노을을 마주쳤다.
문득 대기를 길게 통과하는 스펙트럼이 떠올랐다. 빛은 지평선 너머로부터 무엇을 마주쳤을까. 파랑에 닿은 연노랑 빛은 곧 자취를 감추고 어둠이 깔리겠지.
언젠가, 그날따라 모질게 굴었던 네 말이 뒤이어 들려왔다. 밀레니엄이 지난 지도 스무 해가 지났다며. 언제까지 그런 미신 같은 일에 몰두할 거냐며.
생각해 보니 그날 내가 했던 말들은 미신 같은 일이긴 했다. 기우제를 지내는 제사장 이마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일과 다르지 않았으니.
하지만 훗날에도 나는 그런 바람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의 현실이 비단 자연현상일 뿐만은 아닐 것이라고. 중력을 초월하는 무언가가 삶을 붙들고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지푸라기 같은 꿈에 매달리고 어린애 장난 같은 웃음에 기대어 왔을 뿐이다.
얼어붙어있는 벤치를 보았다. 스러진 가을의 자리. 바람과 발길에 부서진 낙엽들이 실바람에 기우뚱거리며 서로를 부볐다. 그런 풍경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가을이란 계절이 참 몰염치하다는 것뿐이다. 아무 이유 없이, 어떠한 위로나 사과도 없이 계절을 앗아가고 소실을 떠올리게 한다. 눈이 보이는 것들 앞에 상실이나 고독 같은 단어들이 어울리는 회갈색 낙엽풍경을 내놓는다. 그리고 눈이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는 눈앞이 아득한,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책장이 부스럭 거리는... 그런 표현들을 떠올리게 하는 기억을 남겨둔다.
차라리 절반쯤의 중력이었다면, 적어도 초라하게 엉겨 붙은 낙엽들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을 텐데. 그렇게 또 미신 같은 일을 떠올렸다.
곧, 중력은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생각과 사르트르의 잔소리가 뒤따랐다. 그는 너의 목소리를 빌리고 있었다. 너는 그래서 안 돼. 그래, 변명해. 그 변명도 운명이라고 변명해 봐.
중력이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도저히 위안이 되지 않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다. 이끌려온 모든 것들을 그저 받아들이자 결심했던 것도 아마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해와 인정을 바라는 이유는 아마도, 변명이 아닌 설명이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일 테다. 다만 누구도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또 다른 잔소리거리로 삼을 수 있겠지.
삼백육십오에 이른 시간의 단위가 한 번 더 지나가는구나. 오늘 보았던 그 어설픈 노을은 기억 속 까망으로 덮이겠지.
그래도 대단한 이유 없이 오늘 보았던 풍경들을 간혹 떠올려보려 한다. 가끔 네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별 의미 없는 말들로 시간을 보냈던 것처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됐던 서로의 침묵처럼.
혹 이 편지 같은 글을 읽더라도 기별 없기를 바란다.
아직도 미신 같은 일들에 빠져 산다며, 여전히 별 수 없는 놈이라며 웃어 넘기 길 바란다.
추신. 아까의 자문에 자답하자면.
노을이 마주친 모든 것들은 모두, 중력에 이끌린 것들이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