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
‘선생님’이라는 말의 한자가 ‘먼저 선’, ‘날 생’자를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먼저 태어난 사람?’
숱한 고민의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먼저 세대의 것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사람.’
멋진 말이지 않은가?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앞선 세대의 것들을 다음 세대로 전해주는, 세대를 이어주는, 막중한 교두보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나에게 그 의미는 대단한 감동으로 다가왔고, 자연스레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꿈꾸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이 꼭 꿈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는다. [사실 대체로는 적이다] 내 현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선생님이라는 멋진 꿈을 가졌지만, 애석하게도 내 성적은 그 꿈을 허락하지 않았다. 매번 나오는 성적표가 내게 단호하게 말했다.
‘너는 선생님이 될 수 없어. 그 중요한 일을 너 같은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어.’
차가운 성적표의 말과 비정한 현실에 의해, 나는 선생님이 되기를 포기했다.
시간이 한참 흐른 어느 날 알게 되었다.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학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제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선생님이라는 직책이 학교에만 존재하는 것이지,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세상 도처에 만연해 있었다.
내가 삶에 어떻게 임하느냐에 따라, 나는 다양한 형태의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선생님이라는 꿈을 꾸게 되었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학교 선생님’에서 ‘강연자’로 텍스트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때부터 내 다이어리 제일 앞에는 아래의 문구가 새겨졌다.
어렸을 적부터 동경했던 선생님이라는 말의 의미.
내가 살아오며 깨달은 세상 혹은 삶의 법칙들을 전하는 사람이 되자.
다이어리 제일 앞에 머리말처럼 적어두고서 늘 마주했던 목표 ‘강연자’.
노력이야 했지만 언제 꿈을 이룰 수 있을지는 나로서도 미지수였다. 그저 내가 맞다고 여기는, 나의 영혼을 위한 일들을 해나갈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레 강연이 잡히게 되었다.
그래. 드디어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뻐할 시간이 없었다.
힘들게 이룬 꿈이 한 번에 그치지 않게, 그저 한 번의 좋은 경험이 아닌 꿈의 시작이 되려면, 나는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내 삶의 정수라 할만한 것들을 갈아 넣었고, 나조차 그것에 감동할 수 있도록 몰입했다. 그렇게 내가 가진 이야기들로 나를 불태우듯 강연했다. 동경해오던 내 또 다른 꿈의 시작을 위해서.
그런 내게 어떤 단어들이 찾아왔다.
“북토크를 왔는데 강연 자체만으로 하나의 영화나 한 권의 책을 읽은 것 같은 감동이 있었습니다.”라는 강연 후기.
얼어붙은 듯 멈춰버린 나를 마주 보며 단어들은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모습을 바꾸어 다른 말을 건네왔다.
“마음 깊이 염원하고 동경해오던 너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어, 그리고 시작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