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초록 Oct 28. 2022

균형

하굣길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비둘기들이 등굣길에는 바글바글하다. 무법자 같은 비둘기들은 도로에 차가 지날 때마다 날아오르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다. 그러나 얼마 날지도 않고 곧바로 착륙한다. 인간이 곁을 스치듯 지나도 꿈쩍도 않고, 날개를 몇 번 푸드덕거리다 언제 그랬냐는 듯 갈 길을 가는 비둘기들은 건방져 보이기까지 한다. 동네를 주름잡는 조폭 무리처럼 고개를 꺼떡이며 불량하게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야생 새가 날갯질을 하면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공기 중에 퍼져 사람의 호흡기에 들어온다는 미신(사실 나의 상상)을 믿는 나는 가뜩이나 힘든 등굣길을 방해하는 비둘기들이 짜증난다. 마음만 먹으면 두 손으로 콱 쥐어 눈물을 쏙 빼줄 수 있지만 지성을 갖춘 인간으로서 참았다.


두 날개를 가졌으나 오래 날지 않고 요란하게 파닥거리다 곤두박질치길 반복하는 비둘기를 보면서, 새라고 부르기엔 닭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날개가 있지만 날지 못하는 동물이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차라리 날개가 없으면 서럽지라도 않지, 있지만 사용하지 못하는 건 화가 나고 억울할 것 같다. 날지 못한다면 날개가 아니라 팔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으려나? 그런데 가만 보면 인간도 닭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날개가 있지만 날지 못하는 것. 음, 닭보다는 펭귄에 가깝지 않을까. 어리바리한 느낌은 펭귄과 더 유사한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이 닭이나 펭귄과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면, 각자 지니는 날개의 형태가 다양하다는 것이 아닐까. 모두 비슷한 날개를 가진 닭과는 달리,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날개를 가진다. 멋지게 하늘로 비상하기 위해 장착했지만 사용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날개 말이다. 이것을 우리는 약점이라고 부르는 듯하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강점과 약점을 동시에 지닌다.


계절이 또 바뀌고 낙엽이 쌓이니 수능이 코앞이다. 수능이 가까워질수록 불안에 휩싸여 공부에 집중하기 어렵겠다 생각했는데, 예상과 다르게 의연한 하루를 살고 있다. 사실 잘 체감이 되지 않는다. 아니, 체감이 안된다기보다는 모종의 착각을 하는 것 같다. 고3이라는 특별한 시기이기에 매일 반복적으로 문제를 풀고 공부를 오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나의 삶 자체가 본질적으로 이런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본래 나는 이렇게 살아야 했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 할 것만 같다. 한 가지 목표가 삶 전체를 지배하고 피지배인이 그것에 충실히 순응할 때 벌어지는 안타까운 환각이다. 때문에 친구들이 수능이 끝나면 무엇을 할 것이냐 물으면 대답하지 못한다. 주말마다 가던 도서관을 가지 않아도 된다면, 매일 풀던 모의고사를 풀지 않아도 된다면 난 무엇을 해야 할까? 사실 정말 모르겠다.


그래서 수능에 대한 불안보다는 예측할 수 없는 앞날에 관한 맹목적인 혼란이 더 신경 쓰인다. 순식간에 찾아오는 목표 부재의 상황에 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쭉 뻗은 하나의 길을 걷다 어느 순간 무한한 목적지로 갈린 갈림길에 선다면 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 무한한 가능성에 기인하는 고뇌와 번민은 항상 불편한 감정을 안겨주기에 난 확실하고 명시적인 목표를 설정하지 않으면 도무지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이것이 나의 약점 중 한 가지다. 추상적 관념에 지나치게 매몰된 나머지 추상적 삶을 견딜 수 없게 된 것. 나의 추상적 꿈과 마음과 이상을 맡길 수 있는 구체적 사물을 갈망한 것. 궤도 이탈을 두려워한 나머지 항성의 중력에 몸을 맡겨버린 것. 시간과 세상의 거대한 틀에 끌려다닌 것. 그리고 그 외 여러가지. 나의 약점들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나는 두려울 것 없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고, 이미 두려움에 휩싸여버린 내 안의 나와, 의연한 척 살아가는 내 바깥의 나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받침점 역할을 수행하기 급급했다. 나의 삶과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기 위해 양옆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균형을 맞추는 데만 집중했던 것이다. 때문에 다른 사람의 진실한 내면에 공감하지 못했고, 약점까지 온전하게 사랑하지도 못했다.


기울어지지 않기 위해서, 균형을 잃고 무너지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극단으로의 탈주보단 평균으로의 안주가 더 편해서 위태롭게 평균대 위를 걸었다. 발을 헛디뎠을 때 알맞게 쓰러질 방법을 알지 못해서 우스꽝스럽게 손을 양옆으로 벌렸다. 하나의 평균대를 무사히 건너면 또 나를 맞이하는 더 얇고 긴 평균대. 난 평균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며 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며, 나의 삶 자체라고 생각해서 오로지 균형 유지에만 집중했다. 평균대를 하나씩 건널 때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고통에는 성숙이 뒤따르고, 노력은 배신하지 않으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끈기와 열정이 진정 가치 있다고 믿으며 기계처럼 움직였다. 마치 사이비 종교의 광신도마냥 평균의 안온함에 희열을 느꼈다.


양팔을 벌리고 균형을 유지한다. 언뜻 보면 날아오르는 듯 보이나 실은 땅에 발을 가장 잘 붙이기 위한, 다시 말하면 결코 날지 않기 위한 날갯짓이다. 멋지게 하늘로 비상하기 위해 장착했지만 사용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날개 말이다. 약점이라고 부르는 이 날개를 떼어낼 수 없기에, 떼어내지 못하기에, 균형 유지에 사용한다. 최대한 잘 서있기 위해 사용한다. 날개의 아이러니다. 날지 못하는 날개의 의미를 알 것만 같다. 몸부림이다. 거센 몸부림. 발길질 몇 번에 즉각 반응하는, 그러나 멀리 가지는 않고 순간의 위험만 회피한 뒤 곧바로 회귀하는 비둘기. 먹이처럼 보이는 것은 쪼고, 미세한 위험을 느끼면 피하고, 고개는 까딱까딱, 그러나 열심히 균형을 지키는 비둘기. 나의 모습에서 비둘기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나 자신이 한낱 조류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균형 유지, 이러한 몸부림이 내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고, 기계 같은 순응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에 앞으로도 날개를 펼치며 살 것이다. 역시 나에게 더욱 집중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무너지는 법도 배우려 한다. 기울어지지 않는 시소는 재미가 없음을, 오르락내리락 무너지는 균형이 시소의 묘미임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바람이 민들레를 흔들 때 민들레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지 않는다. 고개를 바람결에 따라 꺾으며, 그렇게 균형을 잃어가며 씨앗을 퍼뜨린다. 균형을 잃고 패대기쳐지는 것이 민들레가 살아남는 방법이다. 목적지 설정 따윈 하지 않는다. 어디에 떨어질지 모른다는 사실을 개의치 않는다. 민들레가 날개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민들레는 자신의 씨앗이 어디에 떨어진대도 꽃을 피워낼 수 있다는 신념이 있는 듯하다.


아직 씨앗을 퍼트리고 있는 시간이기에 급하지 않아도 괜찮음을 서서히 깨닫는다. 이제는 넘어지는 방법을 배우려고 한다.

작가의 이전글 환절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