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초록 Oct 30. 2022

치기

어려서는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스티커를 갖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야광스티커를 좋아했다. 문구점에서 1000원을 주고 야광스티커 하나를 사면 방 안을 우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천장과 벽에 야광스티커를 참 많이도 붙였는데, 이제는 빛이 다 사라졌다. 별의 수명이 이리도 짧았던가. 세월의 흐름은 스포트라이트의 방향을 바꾼다.


어렸을 땐 스티커를 왜 그리도 좋아했을까. 나는 스티커만 있으면 벽이든 장난감이든 눈에 띄는 곳에 가리지 않고 덕지덕지 붙여댔다. 좀 더 높은 곳에 붙이고 싶어서 까치발을 들고 스티커를 붙이기도 했다. 영역 표시의 심리랄까? 어떤 곳에 스티커를 붙이면, 그것으로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스티커를 좋아하던 버릇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난 스티커만 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여기저기다 붙인다. 내 교실 책상 오른쪽 상단에는 친구들이 준 스티커들이 많이 붙어있다.


스티커를 붙이면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좋다. 야광스티커로 별과 달과 고리 달린 행성을 만들던 그때 그 시절의 명랑함이 떠올라서 좋다. 훌쩍 커 버린 나는 이제 까치발을 들지 않고도 천장에 스티커를 붙일 수 있게 되었지만, 이제 더는 순수한 소망을 품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까만 밤이 좋아졌고 야광스티커가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아무렇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혼자 자는 것 따윈 무섭지 않다. 세상엔 무서운 게 더 많다.


허수아비가 청명한 가을 하늘 밑에 서 있다. 우락부락한, 조금은 괴이하기도 한 겉모습의 허수아비.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가 너무도 사랑하는 참새들을 내쫓는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 가냘픈 지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는 우울과 고독을 느꼈다.


바람은 조금도 안주하는 법이 없다. 단지 허수아비를 가볍게 흔들어놓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스쳐 지나간다. 감질나는 선선함만 주고 떠나버린다.


앙상하게 고정된 양팔과 하나뿐인 다리는 허수아비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너무나 볼품없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형체 없이 일그러진 갈비뼈와 웃고 있지만 어딘가 불편한 표정. 그 또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있기에 다가오지 않는 참새들을 결코 원망하지 않았다.


사실 허수아비는 곧게 뻗은 한 그루의 어린 느티나무였다. 매년 봄이 되면 아리따운 참새들이 그의 주위를 맴돌며 사랑을 고백하곤 했다. 나무는 행복했다. 서늘한 바람에 잎을 이리저리 흔들며 참새들과 새벽과 계절을 맞이하는 것. 그는 싱그러운 꿈과 희망을 만끽했다. 나무는 행복했다.


그러나 이제 허수아비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사랑하는 이들을 쫓아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변하지 않을 진실을 삼키면서 홀로 맞이하는 노을, 황혼, 자정, 이슬.


허수아비야, 한 번만 미친 듯이 달려보자.

논밭을 가로질러 고정된 사지를 기괴하게 놀려보자.

절대 변하지 않을 표정은 영원히 그대로 하자.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 아닐까. 유치한 소망을 벗어던지고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묵묵히 해야 하는 것. 희망이 없음을 겸허히 인정하며 사는 것. 이것이 우리들이 말하는 '어른스러움'이 아닐까?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이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동심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어린아이만이 할 수 있는 덧없는 소망과 막연한 희망을 품고 떳떳하게. 우스꽝스럽더라도 고정된 양팔을 마구 휘저으며 달리는 허수아비들이 되셨으면 좋겠다.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어린 시절의 유치한 꿈을 다시 붙잡았으면. 그리고 훌쩍 자라 버린, 그러나 아직 성장이 멈추지 않은 지금 이 순간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을 빠짐없이 하셨으면 좋겠다.


우리는 작은 별이다. 세상 사람들은 너무도 지친 나머지 밤하늘을 올려다볼 여유가 없다. 너무 작아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을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밤하늘의 그 작은 별은, 실은 가장 크고 웅장한 별이다. 미칠 듯한 열기를 폭발적으로 내뿜으며 우주를 향해 누구보다 크게 빛나고 있다는 것. 우리라는 작은 별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주위를 맴도는 행성이 있다는 것.


어린 시절 꿈꿨던 나의 미래를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그 소중한 꿈, 그러나 현실에 치여 마음 깊은 곳에 담아만 두었던 꿈을 다시 꺼내본다. 더 이상 바다를 보며 한숨 쉬지 않기로 한다. 괜한 두려움과 불안함에 휩싸여 바다 밑으로 잠식하는 상상을 하지 않기로 한다.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배와 나의 연약한 종이배를 비교하지 않는다. 꿈을 담기엔 충분한 종이배니까. 난 야광스티커로 예쁘게 꾸민 종이배에 꿈을 실어 넓은 바다로 전송한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치기를 부린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치기나 실없는 동경은 아니다.


더디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신뢰한다. 종이배의 목적지가 뚜렷하므로 끊임없이 나의 언어를 조탁하리라. 다시 한번 답장을 기다린다.

작가의 이전글 균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