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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초록 Dec 09. 2022

밋밋

사실 최근부터 채소가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있다. 19살치고는 너무 어른 입맛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친구가 나에게 아이셔(신 맛 나는 사탕)를 주길래 즐거운 마음으로 먹었는데, 맛있다는 생각보단 너무 셔서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릴 때는 아이셔보다 훨씬 신 사탕도 맛있게 즐겨 먹었는데 이제는 조금만 셔도 맛있는지 잘 모르겠다. 과한 맛이 싫어졌달까. 요즘은 맵단짠보단 다소 싱거운 게 좋다.


반찬으로 숙주나물이나 브로콜리 따위의 채소가 나올 때마다 나는 가리지 않고 그것을 한가득 담는다. 따뜻하고 고슬고슬한 밥 한 숟가락 위에 나물 한 점을 올려서 먹으면 그것만큼 맛있는 식사가 없다. 물론 채소만 먹는 것은 아니다. 채소가 최고라기보다는 채소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다고 느낄 뿐이다. 나도 여느 사람들처럼 연근보다는 빨간 떡볶이가 좋고 시금치보다는 얼큰한 라면이 좋다. 햄버거를 입에 우걱우걱 쑤셔 넣은 뒤 마시는 콜라나 노릇노릇 구워진 삼겹살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이왕이면 채소도 함께 먹으려고 애쓴다. 뷔페에 가면 마지막 접시는 샐러드와 과일로 채운다. 자극적인 것을 먹으면 그것을 중화시키고 싶은 이상한 욕구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요즘들어 채소를 좀 더 좋아하게 된 것은 나의 성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난 웬만하면 한쪽으로 치우치는 선택이나 행동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싫어하는 선생님에게서는 좋은 점을 찾으려 노력하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에게는 과한 존경이나 애정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작년부터 4세대 아이돌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난 어느 그룹 하나를 더 좋아하지는 않는다.(사실 요즘은 뉴진스가 더 좋은 것 같기도 하다.) 난 중간이 좋다. 원래 극단적인 것보다는 안정적인 것을 선호했다. 워낙 성격이 예민해서 마음이 한 번 불안해지면 일상생활을 잘 못하기 때문에, 최대한 안전하고 편안한 중간이 좋다. 쉽게 생각하면 OX퀴즈에서 헷갈릴 때 사람 많은 곳으로 가는 거. 불안하니까 중간이라도 가자, 라는 생각에 안전한 선택을 하려고 한다. 최대한 과하지 않고 안 튀는 선택을 하려는 성격 때문에 담백한 채소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노래를 들을 때 흔히 말하는 탑100 노래를 잘 듣지 않는다. 물론 정말 유명하고 좋은 노래는 가끔 듣지만 일부러 찾아 듣지는 않는다. 난 아무도 모르거나 아는 사람만 아는 음악을 자주 듣는다. 주류에 저항하고 비주류에 자부심을 가지거나, 남들과는 다른 취향을 가진 것에 우월감을 느끼는 건 아니다. 그냥 그런 음악이 차분하면서 듣기 편안하고 가사도 예뻐서 좋다. 유명한 노래여도 가사가 잘 들리면서 듣기 좋으면 자주 듣는다.


약간 비슷한 맥락에서, 난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한다. 친구와 왁자지껄 수다를 떠는 것도 물론 재밌고 신나는 일이지만, 아무 말없이 나란히 앉아있거나 같이 걷는 것이 더 좋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면 굳이 왜 같이 있는 것이냐는 궁금증이 생길 수 있다. 아예 입꾹닫을 시전한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시공간과 분위기를 온전히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행복하게 느껴진다는 의미다.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단둘이만 나눌 수 있다는 건 마치 평소에 좋아하던 친구와 짝지가 되어 같이 수업을 듣는 것처럼 설레는 일이다.


마음이 한 사람에게 집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의 집중도가 높아진달까. 주변이 시끄러우면 그 소리 탓에 마음이 약간씩 산란하지만, 최대한 대화를 자제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나와 상대방의 관계에 집중한다면 시선도, 마음도, 발끝도 자연히 상대를 향하게 된다. 좋아하는 친구와 영화를 보면 영화에 더 집중하게 되고, 노래방에 가면 노래에 더 집중하게 되고, 식당에 가면 메뉴와 맛에 더 집중하게 되지만, 그저 옆에서 조용히 걷는다면 온전히 마음을 그 사람에게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약간 편지 같은 느낌이다. 휘황찬란한 선물도 기분이 좋지만 어쩔 수 없이 선물의 용도나 가치에 마음이 간다. 그러나 편지는 상대방이 온전히 내게 집중하면서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쓴 것이기 때문에 더 가슴이 찡해지는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은 아니다. 채소는 맛이 없고 편지는 오글거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전적으로 동의한다. 좋아하는 사람과 신나는 놀이공원에 가거나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에 가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근데 난 도시도 좋지만 시골도 좋고, 시끄러운 것도 괜찮지만 조용한 것도 좋다. 이면에 숨겨진 미묘한 매력이 있달까.


내가 수수하고 밋밋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유도 그것과 같다. 매력이 없어 보이지만 그것 자체로 이미 너무 매력적이다.


세련된 정장과 모던한 디퓨저 냄새도 좋지만, 알록달록하고 빈티지한 어르신 옷과 쌉싸름한 들꽃 냄새도 좋다.

편안히 쉴 수 있는 주말과 공휴일도 좋지만 치열하고 힘겨운 평일도 좋다.

매콤한 불닭볶음면도 좋아하지만 구수한 콩국수도 사랑한다.

스릴 넘치는 15세 관람가 액션 영화도 재밌지만 잔잔한 전체관람가 가족 영화도 좋다.

오차 없는 음정을 가진 유명가수의 노래도 멋있고, 음치 아저씨가 부르는 한 맺힌 트로트도 매력 있다.


모두가 멋진 빌딩을 보려고 고개를 쳐들고 위를 보며 살지는 않는다. 수평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앞을, 추억과 향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뒤를, 흙과 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밑을 보고 산다. 정말이지 사소한 초록 잡초와 까만 바위까지 사랑하고 그것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기억하자. 가끔은 호텔의 고급 이불보다는 냄새나고 촌스러운 할머니집 이불이 그리울 때가 있다. 밋밋한 것도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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