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대한민국

Come back to yourself

by 사랑의 등대

한국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구조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회색빛의 한국.. 역사적, 집단적 카르마로 진통을 겪고 있어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한국의 현주소..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해 카르마가 반복되고 있다.

이 단계에서 깨달음이 있고 의식적, 행동적 변화가 있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텐데..

계속 반복 중인 거 같다.


외세의 침략, 왕들이 나라를 지켜주지 못하고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는 구조,

그 백성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싸워대는..

남북이 나눠지고, 남한에서도 또 분리되어 정치적 갈등..

서로 아픔과 상처를 주고받으며 보복을 위한 정치를 하고

그에 대한 결과로 탄핵을 반복한다.

거기다 더해 빈부 갈등, 지역 갈등, 세대 갈등, 남녀 갈등.. 등

끝도 없이 나누어져 서로에게 분노하고 비난하고 갈등을 빚고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세계 속의 한국은 작다.

그중에서도 반으로 나뉘었다.

한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2025년 기준 77년 경과했다.

100여 년도 안 된 사이에, 경제 발전이 급성장하여 '선진국' 대열에 오르게 되었으나,

100여 년이 되지 않은 시간에 급성장하여 성장통을 겪고 있다.

산업시대 이후의 이익 중심, 원가 절감, 생산성 향상, 경쟁, 성장과 발전 중심, 자원의 부족 등

더 빨리, 신속하게.. 효율성에 의한 발전에만 집중하다 보니,

균형에서 이탈하여 혼란과 갈등을 극심하게 겪고 있다.



다른 선진국들의 건국시기를 대략 살펴보면,

미국(250여 년), 영국(320여 년), 프랑스(240여 년), 독일(155여 년), 일본(158여 년), 이탈리아(165여 년)

등이다. 한국은 임시정부 수립시점으로 생각해도 아직 100여 년 밖에 되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의 혼란과 지역/세대/정치/남녀/빈부 등의 수많은 갈등은 빠른 성장에 대한 결과로써

당연히 겪어야 하는 성장 과정의 진통일지도 모르겠다.

자아혼란, 분노, 억압, 끊임없는 분리, 비교, 판단, 경쟁심화..

내부의 의식적 성장 없이 외부적 성장에만 채찍질을 가하며 달려온 결과, 부작용을 겪고 있다.



한국은 그 안에서도 전쟁으로 반으로 갈라졌는데,

남한 안에서도 지역/정치 갈등으로 반으로 또 갈리고,

그 안에서 또 세대/빈부 갈등으로 반으로 갈리고,

또 그 안에서 남녀갈등으로 반이 갈린다.

세포분열도 아니고, 계속된 분리의 연속이다.



좁은 땅, 부족한 자원으로 인적자원이 경쟁도구로 선택된 탓일까?

좁은 땅의 많은 인구로 서로와 끊임없이 싸우고, 갈등하며

서로를 경쟁상대, 적으로 인식한다.

화합이나 조화가 되지 않고 공동체로서의 인식보다는 개인/가족 중심의 인식이다.



주입된 교육/ 토론 대화방식이 아닌, 답이 하나로 정해진 객관식 교육 방식/

정해진 답안의 입시 교육으로 정해진 인생의 길이 하나라고, 인생경로가 하나라고 생각하며

타인을 또 자신을 비교, 판단, 판결의 대상으로 올려놓는다.

정해진 성공의 인생경로가 하나이기에, 더욱더 경쟁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

성공의 문이 하나이기에, 그 많은 사람들이 통과할 수 없다.

그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을 좌절, 인생의 실패로 인식한다.

다른 기회의 문을 보지 못한다.



어릴 때부터 과거의 제한된 입시교육, 제한된 삶의 시선을 가진 부모로부터 교육을 받는다.

부모/자식 간에도 서로를 인간으로서 존중하여 대화하는 방식이 아닌,

일방적 통보 방식이 대부분이다.

가족단위에서 조차 대화가 되지 않고, 대화가 즐겁지 않게 된다.

서로가 확장되는 방식이 아니라, 어느 한쪽의 의사는 무시된 채,

일방적으로 따라가야 하는 방식이 되어버린다.



이런 계속된 자유의지의 상실과정은 개인 자신으로서 서지 못하게 되고,

의존하게 만들고, 부모의 의견대로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

이러한 습관은 사회/직장 속에서도 계속된다.

나 혼자로서 결정을 하지 못한다.

남을 따라서.. 사회의 요구방식 대로.. 남들이 좋다니까..

이리저리 휩쓸리며 좋아하게 되고, 결정하게 된다.

예로서, 누가 착용한 의류/신발/물품들이 좋아 보인다고 해서, 많은 집단의 사람들이

같은 물건을 구입하여 착용하고 다니는 현상은 어찌 보면 괴이해 보이기도 한다.



집단의 의견은 내 의견이 되고, 그것이 곧 개인의 정체성이 된다.

그러므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

집단을 공격하는 것은, 곧 나를 공격하는 것이 된다.

혼자로서는 불안하고 불확실성이 가득한데,

집단으로서 머물고 안주하게 되면 안정성을 얻게 되기에

그것이 이상하다 하더라도 그 안에 계속 머물려고 한다.



이러한 집단주의 인식은 개인의 의사를, 자유를 존중하지 않게 된다.

개인을 존중하지 않으니, 어떠한 대화를 나누어도 서로의 말에 귀 기울여 진심으로 듣지 않는다.

자신의 할 말은 정해져 있고, 대화를 하는 것은 상대방을 내편으로 들어오게 함이다.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길 바랄 뿐이다.

자신의 편으로 들어오라고 강요하고 설득한다.



개인의 의사와 결정을 배려, 존중하지 않는다.

그러니, 배려/존중하려는 자에게 선을 넘게 된다.

이용하려고 든다던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희생시키려 하게 된다.

그 결과로 배려/존중하려던 자는 휘둘리고, 상처받게 되며

그도 가해자처럼 변하게 된다.

그래서 더욱더 사회가 삭막하다고 느껴지게 된다.



이러한 결과로 여유와 낭만이 없는 사회,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고

외부의 조건, 그럴듯한 장식을 쫓아다니는 사회가 된다.

진심이나 진정성이 없고 허세와 가면, 사기가 판을 친다.

인간으로서의 존중이 아닌, 인간을, 타인을 경쟁상대나 자원으로만 바라보게 된다.



한국의 건물양식들만 봐도 그런 걸 느낄 수 있다.

서로 경쟁하는 듯 건물을 뒤덮은 간판,

조화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 돋보이길 바라는 건물의 색감, 높이 등등

건물, 도시의 곳곳이 낡아가는데도 이익/원가절감을 위해 낡은 채로 방치한다.

그런 것을 쫓느라고 정작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다.



어느 사이트나 카페에 누군가가 올린 주관적인 의견들이 나의 의견이 되어버린다.

그것에 대해 전혀 생각해보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좋아요'를 누르면, 그것이 대세가 되어버린다.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않고, 타인의 의견을 구하고, 외부의 인정을 구한다.

개인 자신들의 소리를 내지 못한다.

대세의 의견이 정해져 있으면, 이에 대응하지 못하고 개인의 의견을 숨기거나 변경시킨다.



한국은 상담 문화도 발달하지 못하여 상담은 점집에 가서 한다.

미래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로서,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음에도 점쟁이의 말을 맹신한다.



늘 의식이 분열된 채, 싸우기 여념이 없었는데..

2002년 월드컵 때 처음으로 의식이 하나 된 기쁨을 맛보았던 거 같다.

그에 대한 향수인지, 2002년 월드컵의 그 기운을 정치인들이, 언론이, 기업이.. 마케팅으로 이용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이러한 아비규환이 필요한 부분일까?

점점 극단으로 흐르면 각성하고 그 반대로 흐를 것인가?

이 또한 통합/조화/균형/공존으로 가기 위한 단계인 것인가?






어느 유튜브를 봤는데, 해외에 여러 지식인들이 모여 만드는 콘텐츠 같았다.

구독자가 2천만 명이 넘었는데, "한국은 It's over"라고 하는 콘텐츠를 만들었다.

그 이유가 출산율이 적어서 2060년이 되어서는 한국이 사라질 것이라는?!

근데 이 또한 현재의 경제관념으로 바라보는 하나의 부정적인 시각일 뿐 아닌가?

한국이 한민족으로 이루어진 단일국가이긴 하지만, 외국인 유입도 많아지고 있고

점차 사람들의 의식의 변화들이 생기면..

굳이 세계를 각각의 나라로 경계를 나누지 않을 거 같은데..

미국이 좋은 예시이다. 여러 국가의 민족이 모여 만든 국가 아닌가?

여러 개의 주들이 모여 하나의 연방국가가 이를 다스리는..



기술과 의식의 급진적인 변화로 세계가 차원 대이동을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기존의 경제관념이 적용되지 않을 수 있지 않은가?

현재는 과거의 경제관념인.. 적자생존, 약육강식 등의 생존본능으로서의 모든 지식들 아닌가?

이 모든 것이 과거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서 삶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통제, 조정하고 손으로 움켜잡으려는 학문들 아닌가?



이 모든 것이 미래에서는 쓸모 없어질지도 모른다.

너무 현재를 과거 정보의 의한 시각으로 삶을 단편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거 같아서

그 유튜브에 댓글을 달았다.



"문제를 바라보면 문제가 커진다. 관점을 변화시켜라."



문제에 집중하기보다 해결점에 집중해 보는 게 어떨까?

그리고 인구출산감소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 아닌가?

인간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해 아이를 낳지 않는다.

사회를 산업시대의 경제관념인 이익추구, 원가절감, 생산성 향상 등 생존전략으로 바라보면,

인간을 곧 생산성 향상을 위한 생산자원, 효율적인 기계라는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누가 아이를 낳고 싶겠는가?

인구출산감소가 당연한 인간의 본능이 될 것이다.

세상을 경제논리로 바라보도록 가르치고, 그 논리를 계속 주입하면서

왜 출산율이 감소하는지 궁금해하고, 돈을 쥐어준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당연히 그 사람을 닮은 이쁜 아이를 낳고 싶은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일 텐데..

지금 현 사회는 어떠한가?

경제논리가 침투하지 말아야 할 부분에까지 침투를 한다.

인간이 진정한 자신(사랑)으로서 사랑을 체험하고 생명(사랑)을 창조하는

아름답고 신성한 창조 작업을 하는 부분에도 두려움을 심어 놓는다.



진정한 사랑을 해서 그 결과로 결혼을 하는 게 아니고,

사회에서 주입한 대로 자신을 상품으로 올려놓고 상대방도 상품으로 인식하여

세세하게 비교하고 견적을 따지고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느라 바쁘다.

사랑을 하는 게 아니고 어떤 조건을 얻기 위한 거래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해서도 이익 손실을 계산한다.

아예 누굴 만나기 전부터 이익 손실을 계산하고 결혼 자체를 거부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손해 보는 것에 대해 집중하고 불확실성을 거부한다.

자기 자신도 생산성 향상을 위한 생산 자원으로 바라보고

상대방도, 아이도 생산자원으로 바라본다.



어쩌면 한국은 이념과 가치를 잊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현상만 놓고 보자면, 경쟁과 싸움이 정체성이 되고, 돈 자체가 가치가 되어버린 거 같다.

돈은 어떤 것을 하기 위한 매개 수단이어야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

홍익인간의 이념이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라" 아니었나~

우리는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사랑의 가치에 대해서도 잊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부모들 또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보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자식에게 조건적인 사랑을 준다.

공부를 잘해야지만, 부모의 말을 잘 듣고, 부모의 뜻에 잘 따라와 줘야지만..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부모와 사회가 주입한 사랑이란 진정한 의미가 퇴색된다.

조건이 되고, 거래가 되고, 교환이 되고, 윈윈 전략이 된다.

사랑을 미디어로 배워서, 사랑을 남녀 사랑의 쾌락적인 부분으로만 한정하고,

부모의 사랑에서 배워서, 사랑을 일방적인 희생으로 완성되는 것으로 오해한다.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자유롭고, 변화하고, 성장하고, 확장하며, 믿어주고, 신뢰하고, 지지하고

격려하고, 그들의 진정한 자신을 체험할 수 있게 놓아준다.

사랑은 조건적이고 통제하고 구속하고 소유하거나 의존시키려 하지 않고, 옭아매지 않고,

희생을 요하지 않고, 균형에 치우치지 않고, 사랑하는 이의 성장과 변화와 확장을 막지 않고

움켜쥐고 있으려 하지 않는다.



굳이 내 눈앞에 두고 보겠다고, 길가에 아름다운 꽃을 꺾어와 시들어버렸다고 슬퍼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자연 안에서 장대한 나무로 자라날 수 있게 움켜쥐지 않고 놓아준다.

어미새가 아기새가 날면 다칠까 봐, 세상을 자신의 날개로 훨훨 날으며 체험하지 못하게 새장에

가둬두지 않는다. 항상 내 눈앞에 있으라고 아기 새의 발에 줄을 매달아 놓지 않는다.

자신의 아름답고 커다란 날개로 하늘의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게 해 준다.

바다는 위험하고 불확실한 곳이라고, 어항에 가둬두지 않는다.

바다의 광활한 아름다움과 자유로움을 느끼고 경험하고 실수 속에서 배우고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우면서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자신을 더 믿고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게 놓아준다.

이 세상은 위험으로 가득 차 있으니, 안전한 곳에 편하게 있으라고 제한하지 않는다.

두려움을 주입해 의존시키거나 자립할 수 없게 하지 않는다.

드넓은 바다에 자신만의 배의 멋진 선장이 될 수 있게,

아름다운 세상을 자신의 재능으로 탐험하고, 체험하고,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위대한 모험을 할 수 있게,

걱정되고 두려워도 그를 믿고 지지하여 준다.

자신의 힘을 믿고 스스로 두 발로 걸어 나갈 수 있게, 자립할 수 있게 방법을 알려준다.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고, 실수나 실패하는 과정 속에서도 배우고, 성장하는 자신을 느끼며

기뻐할 수 있게 격려해 준다.



자신에게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허용한다.

동반자로서도,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받으며 서로 변화, 성장, 확장하고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서로를 구속하거나 통제하거나 제한하지 않아도 사랑임을 느낄 수 있다.




진정한 자신이 되고 진정한 자신을 체험하고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최고의 선물이다.




왜 인간 사회에서 큰 죄를 지으면, 자유가 제한되고 자유의지가 제한되는 감옥에 가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감옥에 가지 않고서도, 스스로 자신에게 제한을 하고

스스로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자신을 찾지 못하고 진정한 자신으로서 체험을 하지 못하니,

스스로의 자유와 행복, 사랑, 열정을 찾는 체험을 하지 못하니,

두려움을 주입하여 어디 날아가지 못하게 구속하고 통제하고 의존시키려 하는 것인가?

서로의 조건을 제시하여 거래하는 무미건조한 사랑이 되어버린 것인가?



우주의, 자연의 모든 것 중에 인간만이 미지의 세계를, 불확실성을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을 기초로 모든 것을 통제하기 위해 지금의 모든 학문들과 산업체계가 나오게 되고..

우주의 에너지는 모두 자유롭고, 변화, 성장, 확장되는데,

이렇게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 부작용으로 흐르게 하는 걸까?



동양권의 집단적인 문화가 개인의 의식성장을 더디게 하는 걸까?

집단주의가 오히려 개인을 망치고, 더불어 공동체를 더 와해시키는 걸까?

진짜 공동체가 아니라, 그냥 의무적인, 피상적인, 조건화된 집단체계로 변질되는 걸까?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피지컬 아시아>를 흥미롭게 봤는데,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이 나와 경기를 하는데, 각국 선수의 태도나 운동경기들이

신기해서 지켜봤던 거 같다. 잘하는 팀도 넘 자만한다거나 방심한다거나,

경기에 집중이 안되면 다른 국가에게 지기도 했다.

그리고 경쟁프로이기 때문인지, 다른 팀이 실수하길 바라는 인터뷰를 계속하는데

결국은 본인팀이 그 상황이 되어버리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우승후보라 생각했던 터키와 호주가 다 탈락해 버리고..

자만심이 균형을 흩트렸나보다. 겸손이 필요했나?

일본마저 탈락하고 결승전에 몽골과 한국이 올라가

전략과 학습, 단합, 리더십을 겸비한 한국이 승리하였다.

일본은 각자는 강한데, 리더십이나 단합이 아쉬웠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은 뭉치면 그렇게 강한데..

한국팀의 비전과 목표를 향한, 부드럽고 통합된 리더십과

서로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서로를 믿고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한 번의 실패에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그 속에서 배우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 러닝학습을 하며

두려움에 맞서 앞으로 나아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단합하니

무적이 따로 없었다는 말이다.

정말 아름답고 멋진 팀워크였다.





먼저, 지금 우리의 모습에 대하여 솔직해지고

불편해도 바로 마주 보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사랑) 기억하고 자신의 내면을 치유하고 자신의 취약점이나

그림자도 포용하고 끌어안아주고 이해해 주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점점 두려움에서 자신인 사랑으로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그렇게 자신에게 했듯이, 타인도 연민과 자비로 바라보고

이해하고 존중하고 포용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자신과 타인을 분리시키지 않고, 타인에게서 자신을 보며,

타인이 다른 체험을 하고 있는 자신임을 기억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의 의식의 변화가 닻을 내리고,

계속 번져나가 네트워크 효과로 모두가 진정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다면..

두려움 없이 진정한 자신을, 삶을 즐길 수 있다면..

극단으로 흘러가는 이 시점에서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Come back to yourself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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