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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열 Apr 22. 2018

끝이 보이는 인연일수록

인도 맥그로드 간즈


 여기는 인도 북부에 있는 티벳의 망명정부가 위치한, 맥그로드 간즈라는 이름의 작은 도시이다. 이 곳 생활 8일만에 처음으로 길에서 한국사람을, 그 것도 무려 세 명이나 마주쳤다. “한국분이세요?” 라는 첫 질문 덕분에 티벳 식당에서 함께 점심식사까지 하게 되었다. 인도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피부의 여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이름은 수연, 나이는 25살, 홀로 인도 배낭여행을 왔고 봉사활동을 하느라 여기 잠시 머무는 중이라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방향으로 걸어오면서 수연이는 ‘문치’ 라는 이름의 인도 초코바를 내게 건네줬다. 짧은 대화에서도 봉사활동이나 동남아 여행 같은 공통점을 꽤 발견하였고, 덕분에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다. 무척 친근하게 느껴졌지만 무언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신비로운 분위기 같은게 있었다. “오빠, 말 편하게 해요.” 라고 수연이는 말했고, 나도 “그래. 대신 너도 같이 말 편하게 하자.” 라고 답했다.


 그렇게 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자연스럽게 일상을 공유하게 되었다. 아침 일찍 산책길을 걷고, 식사를 하고, 카페에서 인터넷을 하고, 각자 봉사활동을 다녀오는 여행 속 일상 말이다. 3일째 저녁엔 수연과 같이 일본식 카페에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소나기가 쏟아졌고, 하나 뿐인 우산에 의지해 나란히 걸었다. 수연은 옆에 소가 지나간다는 핑계로 나를 괜히 밀치더니 자기를 생명의 은인으로 부르란다. 유치한 장난에 어린시절 별명 이야기로 이어지며 서로를 놀리기도 했고, 우리 둘 다 MBTI 성격 검사에서 1%의 확률인 INFP 형에 해당한다는 걸 알고 0.01%의 인연이라며 놀라워하기도 했다.  



 카페에서 각자 여행기를 쓰던 중, 훌쩍이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수연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유학을 준비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고, 방황하다 이렇게 인도 여행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아버지가 편지를 건네주었는데,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너무나도 감동적이라 편지를 읽을때마다 이렇게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렇게 물렁물렁해진 마음으로 서로의 연애사도 나눌 수 있었다. 그녀는 첫사랑 이후로 만났던 남자친구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얘기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던 얘기를 꺼내며 사람의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동감하기도 했다. 긴 여행길에서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만큼, 수 많은 작별도 있었다. 아무리 많은 헤어짐을 겪더라도 그 때마다 찾아오는 허전함과 아쉬움에는 결코 익숙해질 수 없었다. 수연이는 그렇기 때문에 짧고 긴 모든 인연 앞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수연은 이어서 인도에서 만난 한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밤새 달리는 버스 안에서 수연이는 복도쪽 좌석에 앉아 있었고, 사람이 꽉 차서 가운데 복도까지 앉아 있는 현지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옆 창가 자리에 앉은 프랑스 남자가 그녀를 갑자기 깨우더니 가방이 열렸다고 알려줬다. 당황해서 급히 가방을 확인했으나 다행히 없어진 건 없었다. 바로 옆 복도에 앉은 한 인도남자가 유일한 용의자였다. 그를 옆에 두고 버스에서 밤을 보내야하는 상황에 겁이 났던 찰나, 프랑스 친구가 자기와 자리를 바꿔 복도쪽 좌석에 앉았다고 했다. 그리고나서 허벅지에 수건을 깔고 그 남자를 자신에게 기대서 자게 해주더라는 것이었다. 


 수연이는 물론 그 인도인도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그 프랑스 친구가 보여준 행동에서 악인마저 포용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의 힘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 경험이 인도를 여행하며 얻은 보물 1호라고 했다. 그 프랑스 친구와는 리쉬케시라는 곳에서 다시 만나 같이 명상을 배워보기로 약속했다고 했다. 왠지 모르게 기운이 빠졌다. 그녀는 내게 프랑스 친구와 셋이서 함께 동행하는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난 정체모를 아쉬움에 그 제안이 내키지 않았고 그냥 거절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담벼락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누군가 뒤에서 나타나 내 팔을 세게 쥐고 흔든다. 활짝 웃어보이는 수연이 보였고, 그 옆에는 어제 들었던 프랑스 친구 브랜든이 서 있었다. ‘녀석 인상까지 좋네.’ 속으로 툴툴댔다. 수연을 만나러 여기까지 900km 거리를 단숨에 올라왔다고 했다. 실제로 본 그는 정말 좋은 마음씨를 가진 것 같았다. 아이와 노인을 돌보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오랫동안 해와서 그런지 <온 몸에 사랑이 넘치고, 그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 인 듯 보였다. 길을 가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 한 명, 동물 한 마리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하루는 구걸로 연명하는 걷지 못하는 한 인도인 친구를 세상 구경을 시켜준다며 하루종일 업고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행여나 행인의 이목이 집중되어 그 친구가 예민해져 있을까 봐 수연이 같이 가보려는걸 말리는 그런 배려심까지 갖고 있었다. 이건 수십개의 일화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나와 같은 차원의 사람이 아닌 듯,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성인처럼 보였다. 브랜든은 다섯 밤 지나고 수연과 여기를 떠날 계획이라고 말했다. 몸 속 모든 장기가 덜컹 내려 앉는 듯 했고 그 기분을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며칠 뒤 아침 산책길, 일부러 수연의 숙소 앞을 지나갔다. 마침 방 창문이 열려 있었고 그녀도 같이 산책을 가자고 했다. 외출 준비하는 동안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수연이 “브랜든!” 하고 외쳤다. 그리고 그녀의 방 앞을 그냥 지나쳐 가려던 브랜든은 돌아와서 멋쩍게 인사했다. 분명 내가 그녀의 숙소 앞에 있는 걸 봤을거고,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그냥 지나치려고 했을 것이다. 브랜든도 수연에게 마음이 있다는 확신을 갖기까진 그리 오랜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동시에 그녀에 대한 내 마음도 분명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나란 존재는 브랜든 앞에서는 그저 미미할 뿐이었다. 브랜든은 좋은 사람이자 멋진 남자이고, 수연과는 앞으로도 여행을 함께하기로 한 상태였다. 그녀의 마음은 모르지만 이 둘은 너무나도 이상적인 한 쌍처럼 보였다. 나 또한 가야할 긴 여정이 남아있었다.



 다음 날 늦은 오후, 브랜든이 수연의 숙소에서 나오는 걸 봤는데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수연이 몸이 많이 안 좋은지 오늘 하루종일 쉬고 싶다고 했다며 자기와도 얘기를 별로 하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발길을 돌려 그녀의 방문을 노크했다. 문을 열어주는 수연의 얼굴은 무척이나 지쳐보였다. 일단 데리고 나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던 카페로 갔다. 그녀는 브랜든과 막상 같이 여행하려니 자신이 원하는 여행과는 멀어질 것 같고, 말이 100% 통하는 게 아니라 일일이 조율하는 것도 부담된다고 말했다. 그보다는 새로운 친구도 만나고 새로운 경험도 쌓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고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 브랜든이 자신을 보러 라자스탄에서 여기까지 올라왔기 때문이다. 계속 그녀 얘기를 들어주었다. 몸이 지친데다 여행 슬럼프도 겹쳐서 상황이 더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으니, 기분부터 나아지면 모든게 더 좋아질거라고 토닥여주었다.


 조금 지나자 그녀 기분이 조금은 풀려보였다. 그녀는 브랜든과 동행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수연은 <내일 같이 떠나자. 오후 7시에 버스정류장에서 만나.> 라는 쪽지를 썼다. 밤이 늦었기에 쪽지는 내가 대신하여 브랜든 방에 갖다주기로 했다. 그녀는 같이 가겠다고 했지만 난 혼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늦은 밤 쪽지를 브랜든 숙소 문 아래로 넣고 돌아오는 길, 내 자신이 그렇게 처량하고 바보같아 보일 수 없었다. 마음 속에서 무언가 자꾸 삐져나오려고 했지만 애써 안으로 꾹 눌러 담을 뿐이었다.


 

 그녀가 떠나는 날, 내 아쉬운 마음을 표정에서 채 지우지 못했는지 수연은 대뜸 나보고 정이 많다고 했다. 반사적으로 "네가 맥그로드 간즈에서의 낙이었어.” 라는 대답이 튀어나왔고 그녀는 “갈구는 낙이잖아!” 라고 받아쳤다. 그런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우물쭈물 하다가 그냥 “아무튼.” 이라며 대화를 정리했다. 버스에 짐을 실을 땐 멀찌기 떨어져 있다가, 그녀가 버스에 오르기 직전에 다가가 “몸 건강하고 행운을 빌게.” 라는 말을 전했다.


 행여나 인연이 훗날 다시 이어진다고 한들 결코 이 때와 같은 마음일 수 있을까? 또다른 환경에서의 어색한 재회로 이 소중한 장면을 덧칠하고 싶지 않았다. 같은 사람과 같은 순간, 같은 경험 속에 다시 놓여지고 싶을 때가 있다.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러기에 수연이 말했던 것처럼, 후회가 남지 않도록 당장 눈 앞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순간의 감정을 마음껏 누려야 한다. 인연의 끝을 직감할 때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그 사람을 보내는 것까지, 오래 추억하고픈 인연이라면 그렇게 매듭지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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