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자지 않는, 밥을 먹지 않는, 정리를 하지 않는 아이
어젯밤 딸아이가 새벽 2시에 눈을 떴다. 이 시각에 컨디션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는걸까? 잠에 취한 목소리로 제지해보지만 무력하다. 아이는 안방 불을 켜더니 침대 위에서 방방 뛴다. “나는야 똑똑박사 이름은 에!디!” 라며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부른다. 어떤 노래를 음정 박자 발음까지 정확하게 부르는 건 아이가 태어나고 27개월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눈꺼풀을 은근하게 적시는 형광등 불빛에 미간은 일그러졌어도,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아무리 그래도 새벽은 자야 하는 시간이었다. “딸, 이제 그만 자야지.”
안 자겠다는 아이를 억지로 잠들게 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아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내일 어린이집 가야지. 햇님이가 집에 갔는데도 계속 놀면 안돼. 그러면 내일은 정말 피곤해진단 말야.”
이렇게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도 효과가 없었다. 결국 참다 참다 인상을 쓰며 내뱉는다.
“아빠는 분명 일찍 자라고 했어요. 근데 딸이 논다고 안잔거니 다음날 피곤해도 몰라. 딸이 엄마 아빠 말을 듣지 않아서 그런거니까.”
이렇게 말하고 나니 잠결이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 생각해보니 요즘 아이에게 이런 식의 말을 자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과 블록과 인형을 어질러놓길 좋아하는 딸아이에게 “가지고 논 다음엔 <모두 모두 제자리에> 하세요.” 라고 말한다. 그러면 아이는 또 다른 장난감을 꺼내 더 흩어놓고는 한다. 그대로 뛰어다니다가 우둘투둘한 블럭을 밟고 주저앉는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거 봐, 아빠가 정리하라고 했지요?”
이런 사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매 끼니 때마다 아이와 전쟁을 치렀다. 유독 밥을 먹지 않는 아이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하기도 했다.
“밥 너무 조금 먹었잖아. 그래도 그만 먹을거야? 그러면 네가 그만 먹겠다고 한거니까 이따가 배고프다고 하면 안돼.”
마음이 왜 불편했을까?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빠로서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는데 미숙한 걸, 잘 먹이고 다치지 않게 보살피고 잘 재우지 못하는 이유를 은근슬쩍 아이 탓으로 돌리려했기 때문이었다. 아빠 말을 따르지 않았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불행한 일에 대한 책임은 아이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어떤 대가를 치뤄야 하는지 사전에 충분히 얘기해줬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른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난 잘못 없음>을 주장하는 방어적 태도이기도 했다. 27개월 아이를 상대로 말이다.
딸아이의 시각에선 아빠가 무심코 하나 둘 떠미는 그 짐들이 얼마나 버겁게 느껴졌을까? 새벽에 아이가 잠을 자지 않아 다음날 피곤한 것도, 장난감을 밟아 발을 다치는 것도, 밥을 충분히 먹지 않는 것도 다 아빠의 책임일 뿐인데.
물론 스스로를 위험에서 지키거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 예절과 같은 것들은 인내심을 갖고 엄격하게 가르쳐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그 외 일상적인 생활에서 더 좋은 습관을 들이게끔 도와주고자 한다면, 당장은 힘들고 멀리 돌아가더라도 아이에게 유익한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아이 엄마는 잘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의 감정을 능숙하게 읽어주고,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엄마의 속상한 마음을 조곤조곤 일러주기도 한다. 아이에게 타인의 감정과 공명하는 방법을 몸소 보여주고, 부적절한 행동을 스스로 자제하도록 자연스레 이끈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요즘 “나 정리 안하면 파란색 된다?” 라는 말을 할 때가 있었다. 아빠에게서 평소 정리를 하지 않으면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거라는 말을 들어왔을 거다. 그걸 아이는 자기식대로 표현한 것이다. 하필이면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 파란색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걸 아이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 불편한 감정과 가장 좋아하는 대상이 엉겨붙은 말이라서 더 마음이 무겁다. 부족한 아빠는 아직 배울게 너무나도 많다. 오늘 집에 들어가면 아이와 함께 파란색 물감으로 실컷 색칠놀이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