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 장소, 관계 정리의 필연적인 시간
'서울 자살률 1위, 금천구'
궁금하지도 않은 뉴스 헤드라인을 굳이 크게 읽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옆에 있던 다른 할머니가 거든다.
"노인들이 많아서 그렇지 뭘."
"요샌 젊은 사람들이 더 많이 죽는 거 몰라요? 부모들이 너무 다 해주니까 그래."
아이와 내게로 시선을 주며 말씀하신다. 내가 받을 잔소리는 아닌 것 같아 나도 남일처럼 거든다.
"그러니까요. 모르기라도 하면 대~충 키울 텐데 요즘 너무 아는 게 많아서 대충 하기도 어렵죠."
'광명에서 와서 내 인생에 광명을 찾았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좋은 동네, 좋은 입지, 좋은 학군, 편리한 생활. 포천에서 내 삶이 삼천포로 빠져 우울의 늪을 허우적거릴 때 깨달았다. 시골과 자연에 대한 치기 어린 로망은 버려야 마땅하다. 그보다 도시가 주는 매력이 더 클 나이라는 걸 인정하기로.
신랑과 내 직장 중간지인 문래에 첫 터를 잡았다. 집은 좁았지만 영등포시민이 되고 핫플 근처에 사니 기갈이 났다. 집주소를 알려줄 때도 걸림이 없었다. 그런데 오랜 코로나로 단절되다 보니 자연이 그리웠고 좁은 집이 답답해서 늘 캠핑이나 여행으로 밖을 나돌았다. 중간 지라고 결코 가깝지 않은 수도권 통근생활. 그냥 한 명한테 몰아주자!
그래서 임신 준비를 위해 내 직장 근처로 왔다. 혼자 자취할 땐 몰랐는데 그사이 광명은 너무나 비싸져서 들어오기가 힘들었다. 그럼 그 옆 금천구는? 가파른 오르막이지만 대단지에 산세권에 넓게 빠진 구형 30평대! 게다가 주인이 임대사업자라 전세금을 많이 올릴 일도, 갑자기 나가라고 할 일도 없다고요? 당장 계약을 했다.
너른 공간이 주는 개방감 덕분에 확실히 여행에 대한 욕구가 줄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거기서 아이를 낳았고 뒷산에서 태교를 했다. 아이가 적어서인지 금천구는 미취학아동을 위한 무료 지원이 참 많았다. 이런 걸 다 공짜로 누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이고 태어나고 내내 무료 수업이나 공연 등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나 남편은 늘 우리가 사는 곳을 못마땅해하고 부끄러워하는 듯했다. 아이의 출생신고도 부산 시댁으로 했을 정도였다. 아이의 인생에 서울에서 제일 못 사는 '금천구'를 남겨주고 싶지 않다나.
그땐 몰랐다. 골목풍경이 좀 노후했고 지나가며 이따금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을 본 정도다. 부산에서 놀러 온 언니네 식구들의 얘기를 듣곤 좀 놀랬다. 시흥행궁 행차에 거의 온 금천구민이 다 나왔을 때 유독 장애인이나 행색이 안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아이들 안전을 위해 빨리 자리를 뜨려 했다고. 정말 그런가? 조금씩 이 동네에 대한 인식과 이곳 사람들에 대해 알아갔다.
영어 모임을 모집하면서부터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왜 이곳에서는 영어로 말할 수 있는 전문직 엄마를 찾기 힘든지 뼈 때리는 주변의 말을 들으며 깨달았다. 그래도 나는 금천구를 사랑했다. 은행나무나 책달샘 같은 구내 작은 도서관들은 언제나 따뜻했고, 어딜 가나 아이들은 환대를 받았다. 버스를 타면 아이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셨고 육아종합지원센터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무료 수업이나 지원을 항상 아낌없이 해주셨다. 홈플러스 문화센터도 가까운데 2개나 있고 오미생태공원 같은 생태 프로그램도 다양해서 미취학 아동들이 자라기에 크게 부족함 없이 자연과 문화, 교육이 고루 갖춰져 있다고 느꼈다.
이제야 엄마들과 좋은 이웃도 많이 사귀고 영어 모임도 안정화되어서 안정감이 들 무렵 4년 차에 우리는 또다시 청약 당첨이 되어버린 경기도 시흥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 준비가 더디 진행이 안되었던 이유, 이사 준비보다 모임에 더 열성을 냈던 이유를 이제야 돌아보니 떠나기가 싫었던 것 같다. 좋은 이웃들, 내가 터를 닦아놓은 지역기반시설들, 직장과의 거리 그 모든 것들에 만족하고 있었기에 이사 가고 싶은 마음이 1도 없었다. '새 집'이라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잘 몰랐다.
막상 와보니 새 집, 고층 하늘뷰는 기대이상으로 좋긴 좋다. 젊은 엄마들이 많은 신도시 인프라의 대단지, 편세권, 역세권. 늘 있던 먼지 알레르기와 비염이 사라졌고 감기도 덜 앓았다. 그간 헌 집증후군이었나 싶을 정도로.
인연을 좇아 만남을 이어가려니 자꾸 한이 남은 영혼이 구천을 떠돌듯 이사 나온 곳을 자주 오가게 된다. 차로 30분. 너무 멀진 않지만 결코 가깝지는 않은 거리다.
이사 온 곳에 적응하고 새터에 붙박으려면 집 주변을 아이와 더 많이 다니고 단지 내에서 좋은 인연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모임을 다시 만들 에너지는 없고, 이웃도 왠지 천천히 자연스레 알아가고 싶다.
복직까지 2개월. 어떻게 보내야 후회가 없을까?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해서 아까운 날들. 아이가 예뻐서, 이제 엄마랑 집에 있는 것보다 어린이집에 가는 게 더 좋아진 아이에게 내가, 부모가 최고인, 엄마가 꼭 필요할 날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더욱 애가 닳는다.
제주 한 주 살이, 경주 한 주 살이? 아니 아니. 국내 여행은 천천히 하면 되지. 그냥 조부모님 곁에서 부산 살이나 오래, 더 자주 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더 많은 추억 만들면 좋겠다.
교육비에 아낌없는 엄마들이 가득한 영어 모임에서 가장 가난한 내가 무보수로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친절을 베푸느라 홀로 고군분투한 시간들이 애처롭고 우스워져 몇 날며칠을 앓았다.
"회비 겨우 만원이요?"
신입 회원이 회비를 말하는 내게 너무 싸서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회비에 대해 정리되지 않은 내 마음이 건드려졌다.
'네, 알아요. 우리 모임의 가치는 분명 그 이상이죠.'
그 마음은 그냥 미소로 대신했다.
내가 한 작당이 단지 내 아이와 신랑을 쉬지 못하게 했을 뿐이라면, 구성원 모두가 돈 들여 모임을 할 마음이 있는데 굳이 '사교육 제로화'를 외치며 사회운동하듯 중산층의 엄마들에게 원치 않는 친절을 베풀고 홀로 상심한 내가 참 가엽고 우스워졌다. 내가 제일 가난할 자신 있었다. 내 빚이 가장 많고 우리 가족 수입이 제일 적음을 확신했다. 내가 내 이익을 위해, 내 아이의 이득을 위해 모임을 했음을 직면하고 인정했더라면 내가 얻고 있는 것, 플러스 요인에 더 집중하며 감사한 마음을 키워갈 수 있었을 텐데. 할수록 모두를 위하는 척 내 욕구를 숨기니 행정적인 일들이 더 버겁고 짜증이 났다.
'아무도 안 도와주는데 나 혼자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나! 이 사람들은 날 위해 대체 뭘 해줬나! 나는 이 모임 때문에 가정에 소홀해서 부부싸움만 늘고 아이는 주말 리듬이 깨져 낮잠도 제 때 못 자고 무리만 하는 것 같은걸!'
아무도 정부 지원받으라던 사람 없었다. 내가 생산적이고 싶어 시작했다. 내 맘대로 모임을 만들고 품앗이며 우수학습동아리에 지원했으니 그 덕에 지역사회 자원을 제대로 누리고 지원받으며 지역 사회 내에서 더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던 거다. 돈 되고 돈 받는 모임이 아니니 내 멋대로 내 아이의 자람과 내 양육철학에 맞게 요리조리 들쑥날쑥 운영한다한들 그 누가 뭐라 할 수 있는가! 도움 안 받는 대신 눈치 볼 필요도 없지 않은가!
내 이사 준비기간 동안의 공백과 행정적 일에 대한 심적인 부담감, 남편과의 불화로 모임을 주말에서 주중으로 옮기고 운영에 소극적이었던 기간 동안 많은 회원들이 다른 영어 모임을 찾아 나가고 있었다. 사실 버거워서 내가 그들을 밀어냈다. 그럼에도 그게 왜 그리 허탈했을까. 그들은 그저 오가면 그뿐인데 나는 왜 이게 전부인양 의미를 두며 여기에만 묻혀 올인하고 있었나. 내 미련함에 내 스스로가 가없고 우습게 보였다. 나도 그냥 더 좋은 모임 찾아가면 되는 걸 뭣하러 이 고생을 사서?
어느 모임도 내 마음에 백 프로 안 들 거다. 멀어서, 엄마들이 나보다 지나치게 부유해서, 영어를 나보다 너무 잘해서 혹은 못해서, 아이들이 너무 난해서, 나쁜 간식에 일찍 노출이 되어서 등등 이유는 많을 거다.
내가 원하는 가까운 곳에서 내가 환대한 이들과 내가 원하는 모임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는 게 얼마나 큰 권능이었고 기회였나. 모임이 없었다면 3년간의 일 공백으로 내 사회성과 직업적 전문성은 녹슬 대로 녹슬었을 것이다. 지금도 모임 사진을 보면 부스스한 머리와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 낯설어 빠르게 스크롤을 내린다.
남편과의 관계는 다시 가정중심으로 회복해 나가면 되고, 모임이 필요할 땐 소모임으로 내가 있는 곳에서 여력이 될 때 다시 만들면 된다. 아이를 발도르프에 보내면서 차분한 하원 후, 주말 자연에서의 가족과의 안정감 있는 시간을 만들어가 는 게 내 새해 목표이자 도전이다. 일을 시작하고 사회에 나아가면 나 역시 가정에서 쉬고 싶어 질 것이고 신랑과의 주말 욕구가 비슷해질 거다.
'그러니 신랑, 조금만 참읍시다요. 집에만 혼자 있으니 사회적 관계에 대한 욕구가 있을 수밖에 없는 마누라를 좀 이해해 주시고 나랑 육휴 바통터치하면 겨우 한 달이지만 나를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수치심이 화로 번져 나 자신에 대한 화가 모임 내 사람들과 인간 전체로 번져갔다. 마침 생리 직전이다. 그는 나를 멀리하고 사소한 스킨십조차 없다. 크는 둘째를 가지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현실적으로 양가 도움 없이는 불가하다며 나를 더더욱 물리적, 심리적으로 멀리 하는 것만 같다. 애정과 스킨십의 욕구 충족이 안 되는 나는 아이의 모유수유를 더더욱 끊어내지 못하고 있고 아이와 살부대 끼며 젖먹이고 잠드는 그 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하다.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일정량의 스킨십과 애정이 보존되어야 내가 산다.
글로 거친 마음들을 뱉어내보고 보니 이제야 보인다.
행정적인 일을 하면서 '보여주기 위해, 뽑히기 위해' 썼던 내 생각과 마음들이 진짜 내 것인 양 살게 되어버리는 함정에 빠졌었구나! 나는 애초에 '공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익'을 위해 일을 벌였다는 걸 까맣게 잊었구나!
힘든 데 부탁할 용기는 없고 거절당할 것이 뻔해서 혼자 마음앓이를 했구나! 이 힘든 일로 예산받아서 좋은 건 다 같이 수혜를 입는데 왜 당신들 아무도 안 도와줘? 할 게 아니라, 애초에 공감을 끌어내고 참여나 협조를 끌어내는데 실패했고, 그냥 혼자 벌리고 혼자 마무리지어야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 않나?
일을 시작할 때 무리해서 충동적으로 벌인 일은 언제나 이렇게 마무리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다시 한번, 처절하게!!
정 떼려고 그런 거야.
이사가, 터전을 옮기는 일이, 관계도 새로 쓰는 일이라는 걸, 외면하려 했지만 직면하려고 이렇게 아픈가 보다. 몸은 멀어졌지만 언제나 원하면 볼 수 있다는 마음을 위해 몸이 고단하니 가족이 다 같이 아픈 거라고.
'여보.. 내가 주춤하던 마음을 어떻게 다시 끌어올려 모임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그 무겁던 짐들을 내려놓고 다시 밀어내던 모임에 나갔는데... 그 모임 직후 들려오는 소리라곤 늘 힘들고, 누가 마음에 안 들고 그런 소리라 정말................. 너무나 나는 힘이 빠지고 낙심했어요........................ 모든 걸 다 잃어버린 것처럼, 모든 걸 다 파괴하고 싶은 상태. 내가 지은 모든 것, 공동체, 관계를 다 생채기 낼 수 있을 것 같은 날 선 에너지가 내 안에서 날뛰어요. 당신의 작은 인정, 지지, 응원.. 나는 정말 그런 게 필요했는데..... 함께 가주는 것만으로, 가서 좋은 시간을 보내주는 것만으로 내게는 큰 힘이지만 오가면서 하는 그 한마디에 나는 왜 그렇게나 상처를 입는 걸까... 그게 본심인 것 같아서. 그게 미안하고 동시에 싫기도 해서. 왜 모임을 오롯이 즐기지 못하는지, 그 너머의 결여된 사회성, 자존감 같은 것들이 보여서. 그게 밉고, 답답하고. 그런 당신을 변화시킬 수 없으니 나를 변화시키는 수밖에 없는데 그게 내겐 힘들고 답답하고.... 언제나 상자 속에 갇혀있는 듯 답답해서 오늘 종일 집 밖에서 아이와 여행을 하고 나니 속이 좀 뻥- 뚫리네요. 집밥, 건강식 다 내려놓고 그냥 아이랑 단둘이 오래 여행 가고 싶은 마음. 나를 오래 보듬고 싶은, 아이만이 위안인 시간들.'
부산에 안 간 지 너무 오래돼서 그래. 찬란하고 조건 없는 부모님의 사랑과 집밥이 너무 그리워서. 자꾸만 사람들에게서 그걸 기대하고 상처 입고 나다니지만 외롭고. 그래요.
아무도 안 볼 테니까, 봐도 그만일 테니까 쓸 수 있는 내 모든 찌꺼기들. 음식물처리기처럼 다 태워서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기록하는 게 사치인 부스러기 같은 이 마음들. 이나마 뱉어내지 않으면 곰팡이가 생길 묵은 마음들. 여기에 다 내어놓고 훠이훠이.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